프랑코 모레티. <세상의 이치> 1장 발제.

Reading 2014. 8. 26. 21:57

* 아래의 글은 모레티를 읽고 있는 세미나를 위해 이번 주에 발제한 내용이다. 세미나 직전까지 쓴 글이라 문장이 좀 성기고 과도하게 압축된 표현들이 있다(그리고 오탈자와 비문이 반드시 있을 거다). 지적&질의해주시는 대로 수정할테니, 필요하신 분들의 참고 바란다.






<세상의 이치>(The Way of the World) 1장:  「문명의 위안」(The Comfort of Civilization) 발제


<세상의 이치> 전체를 서문에 따라 교양소설을 “상징형식”1)으로 간주하여 그것이 사회학적/역사적 지식(내용)들과 문학적 기호들을 어떻게 매개하는지 밝히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1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역할, 즉 “고전적 교양소설”the Classical Bildungsroman의 전형을 확립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를 위해 선택된 텍스트는 1795년 독일에서 출간된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와 영국에서 1813년에 출간되었지만 1796년에 처음 집필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이다. 이후 분석이 스탕달-발자크-디킨즈/엘리엇과 같은 시간적 순서대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분석의 순서에서만이 아니라 (모레티가 상정하는) 교양소설의 역사에서도 괴테와 오스틴의 소설들이 원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모레티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세상의 이치> 이전에서도, 이후에서도 원형적인 형식—물론 베버적인 뉘앙스를 강조하고 싶다면 ‘이념형’idealtypus—을 정립하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만약 모레티의 분석틀을 구성하는 모티프들을 논의하는 게 허용된다면, 우리는 그의 ‘과학적 기획’에 두 가지 상반되는 경향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한 편으로는 산포된 변이형들의 집합을 그리는 것, 그리고 그 반대편에 그러한 변이형들 사이에서 이론적 중심으로 기능하는 이념형의 구축. 최종적으로 그가 전자와 같은 기획에 도달하고자 할수록 그 이론적 토대로서 후자가 갖는 중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변이들,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표현형들을 인식·이해 가능한 지식으로 환원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개념적 구축을 전제하기 때문이다—특히나 그것들이 더 많은 자료를 다룰수록 최초에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로서 개념의 구축이 갖는 중요성은 커진다. 우리가 아직 살펴보지 않은 모레티의 ‘계량적’ 작업도 이런 점에서는 세 가지 단계--(계량을 위한) 개념의 형성, 계량적 자료의 산출, 산출된 자료의 해석—로 나뉠 수밖에 없으며, 그 토대에 놓인 개념, 원형, 이념형의 형성에 항상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장의 서두에서 모레티는 교양소설의 ‘정신’을 해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전제를 제시한다. (명백히 칸트적인)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과 (역시나 마찬가지로 헤겔을 떠올리게 하는) “사회화”socialization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면, 고전적 교양소설은 이 두 가지 경향, 즉 “개인성”과 “정상성”을 향한 경향들의 갈등관계를 어떻게 다루는가(국역본 44; 이하 인용쪽수는 국역본만 표기)? 교양소설의 기능은 두 상충되는 경향을 종합 혹은 공존시키는데 있다. 그러나 요점은 그가 벤다이어그램의 비유를 들면서 말하듯, 이러한 ‘종합’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가를 해명하는 것이다—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핵심어 ‘타협’은 그러한 종합 혹은 공존의 양태를 묘사하기 위한 개념이다. 1장의 세 절은 각각 종합, 개성=서사구조(수제sjuzhet), 사회=파불라fabula를 다룬다고 소개된다(46). 그러나 모레티의 요약은 세 부분 간의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고전적 교양소설의 원형을 이해함에 있어서 무게가 실리는 부분은 최후반부에서 논의가 종합되는 3절이며, 1장은 어떤 면에서 (비록 ‘종합’이라는 단어가 최초에 사용되지만) 정-반-합의 고전적인 헤겔식 도식을 따르고 있기도 하다. 다만 그로부터 모레티가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 고전적 교양소설의 이념형(또는 ‘종합’)의 ‘형식’으로서의 타협, 교환exchange의 모티프라는 사실만 잊지 말자.

비교적 길이가 짧았기에 전체 논지를 파악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공포의 변증법>(Signs Taken for Wonders)과 달리, 훨씬 긴 분량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세상의 이치>는 그 요지를 이해하기가 보다 까다롭다(어쨌든 그의 글쓰기 스타일이 다소 파편적임은, 물론 그 파편들은 그 자체로서 매우 매력적이지만, 부정하기 어렵다). 거칠음을 무릅쓰고 요약해보자면 1장의 1절은 루카치식 고전적 교양소설의 이해, 곧 교양소설을 하나의 종합으로 이해하는 전통을 연장하되 동시에 교묘히 뒤흔들며 문제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다. 그는 <수업시대>로부터 ‘연관’Zusammenhang을 하나의 키워드로 뽑아내면서 교양소설이 전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과정으로서의 성숙을 강조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고전적 교양소설의 행복은 객관적으로 완성된 사회화의 주관적 증상이다”(58). 이는 결혼을 통해서 완성된 공동체인 가족이 “내밀한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중간지대”2)(59)라는 데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모레티가 교양소설=종합의 등식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여기까지다. 곧바로 왜 시장의 메커니즘 혹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직업적 삶이 교양소설에 등장하지 않는지, “고전적인 교양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형성-사회화의 과정을 일의 세계 바깥에 두는 것”인지가 의문시된다(60). 부분적으로 이는 자본주의적 서사에는, 마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인이 공간 속에서 멈출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모험은 시간 속에서도 끝날 수가 없다”(61). 교양소설, 완결된 성장/성숙을 제시해야 하는 고전적 교양소설에서는 이러한 무한한, 끝없는, 성숙이란 개념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상인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요컨대 한 편에는 “‘성숙’이란 ‘근대’와 거의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진술이(65), 다른 한 편에는 (그 앞에서 모레티가 수용한 루카치적 도식처럼) 고전적 교양소설에서는 종합이 이루어진다는 진술이 있다. 이 두 가지 대립명제의 이율배반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3)

1절이 “성숙”과 “근대”로 분할된 두 세계 사이에 고전적 교양소설이 마치 경첩처럼 자리하고 있다는 진술로 끝난다면, 2절에서는 교양소설 내에서 ‘개인적 삶’ 혹은 개성을 완성하는 플롯에 관해 설명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모레티의 설명은 플롯 자체보다는, 교양소설이 플롯이 전개되는 배경 혹은 세계로서 창출해낸 “일상생활의 공간”이 가진 특성을 해명하는 데 맞춰져 있다. “고전적 교양소설에서 역사의 의미는 ... 제한되고 상대적으로 흔한 개인의 삶이라는 보다 좁은 영역 내에서 드러나야 한다.... 소설은 하나의 비평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의 문화로서 존재한다. 이는 결코 소설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것이 아니며, 소설은 이러한 존재의 형식을 조직하고 ‘세련되게’ 하여, 일상을 좀더 생기 있고 흥미롭게” 만든다(79).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모레티가 몇 차례 강조하듯 이러한 ‘일상생활의 영역’이 직업적 영역으로서의 ‘사적 영역’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4) 일단 모레티가 말하는 ‘일상생활의 영역’이 국가, 행정, 역사, 정치, 법 등을 다루는 공적public 영역과 대비된다는 점에서는 사적private이지만, 역시나 (법과 근원적으로 동일한 형식을 공유하는) 계약, 이윤, 직업, 노동과 같은 ‘사적’ 영역과도 구별되는 제3의 영역이라는 사실만 짚어두자. 그곳에서 인간주체는 전혀 영웅적이지 않은 자신의 사이즈에 맞춰 세상의 질서를 재구축하고 ‘이해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 이질적인 요소들을 종합하여 담아둔다. 개성, 대화, 다중 패러다임, 키치kitsch 등등 일상생활의 영역과 연결되는 키워드들은 전부 이러한 성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모두가 인간적 규모에 따라 세계를 ‘다시 만들고’, 인식하고 평가하는 방식들인 것이다”(89).5) 여기에서 타자, 적대, 시련과 같은 장치들은 “‘다치지 않고’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통합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101). 대화에 대한 설명은 시사적이다. “[인간중심적인 일상의 소명은] 대화의 기술로 생각의 드러냄을 통제하고 그로부터 조형적이고 융통성 있는 언어를, ‘구체적인 것’의 세련되고 편집되지 않은 수사법을 이끌어내는 것”이다(107). 아마도 아도르노라면 이 대목으로부터 세상만물의 이치를 자신의 제한된 시각으로 끌어내려 적당히 이해한 다음 “세상일이란 다 그런 법이지”라고 거들먹거리는 속물 부르주아의 이미지를 기막히게 끌어낼 것이다. 어쨌든 요점은 세계의 이질적인 것들을 ‘개인의 사이즈’로 축소시켜6) 그럭저럭 공존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논리가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동맹의 영역”이자 “정상적인 사물의 경로”로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내세우는 시민사회=일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2절이 시작과 결말의 가운데에 있는 ‘플롯’, 개인화, 일상의 영역을 다루었다면, 3절은 소설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결말의 문제로 향한다. 요컨대 일상 또는 시민사회로 대변되는 ‘사적 영역’은 어떻게 공동체적 삶과 융합할 수 있는가? 질문에 대한 답변은 “고전적 교양소설의 존재이유인 상징적인 교환”으로 제시된다: “주인공이 삶의 특정한 영역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그 대신 사회적 활동의 다른 부문에서는 완전한 순응이 지배해야 하는 것이다”(114). 일상이 그것을 지탱해줄 외적 체계=사회의 안정성을 요구한다면, 이러한 안정성은 “초개인적인 진리에 항복”함으로써 획득된다(115). 쉽게 말해 ‘자발적인, 자유의지에 따른 순응’이다.7) 편견이라는 모티프가 이러한 결론을 가능하게 한다. 개인의 비판적인 의심이 한낱 편견일지 모른다면, 개인은 그러한 어려움에 지쳐 자발적으로 자신의 ‘오류가능성’을 포기하고 지배적인 사회질서에 안긴다. “[고전적 교양소설]그것은 개인성으로 가는 접근로를 막지도 않고 또한 개인성의 가치를 낮추지도 않으면서, 개인으로 하여금 소신 있게 개인성의 길을 포기하도록 유도한다. ...그것[개인성]은 너무 길고, 또한 너무나 매력이 넘치며 너무나 자극적인 여정인 것이다. 개인은 그러한 개인성에 싫증이 나야 한다”(121). 교양소설의 핵심이 여행이라면, 그 끝에서 여행을 마치고 어딘가에 정착하는 상투적인 줄거리는 여기에 들어맞는다. 정확히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묘사한 여정처럼, 개인은 자신의 독단적인 해석=비판을 포기하고 공동체의 의식에 판단을 이양한다. 소설 형식의 논리로 말한다면, “수제는 그 특징을 포기하고 파불라의 재구성 내에 체현된 초개인적 필연성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140-41). 모레티는 말하지 않지만, 직업적인 삶으로서의 ‘사적 영역’이 여기에서 개인적 삶의 핵심으로서의 위치를 일상에 내어주고 대신 유기적인 분업/협업체계에 따른 공동체적 삶의 ‘임무’ 정도로 축소되어 다시금 재편입 된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터이다.8)

3절은 끝부분은 이러한 설명을 다시금 역사적/사회적 맥락과 접합시킨다. 곧 18세기 말-19세기 초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이중혁명(홉스봄)의 시대에, 교양소설은 (그 주 독자층이었던 부르주아와 귀족들에게) “지배계급 내에서 조화를 회복하는 방법”, 즉 “어떻게 프랑스 혁명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를 설명한다(129). 그 유일한 대안은 새롭게 도약하는 부르주아 계급(빌헬름 마이스터, 엘리자베스 베넷)이 “개혁 성향의 토지 소유 귀족의 문화, 즉 다시와 로타리오의 문화”와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130-31).9) 부르주아들에게 그러한 가치관을 교육=형성bildung시키는 것이 교양소설의 기능이며, 그러한 기능을 위해 자유롭게 자유를 포기하고 귀족적인 세계의 일원으로 (그러니까 여기에서 ‘공동체’는 실질적으로 토지귀족들의 세계다) 들어오는 삶의 충만함이 제시된다.10) 물론 이러한 “사회적 우월성”(지배적인 실천)과 “도덕적 우월성”(지배적인 윤리)의 일치(143)가 가능했던, 혹은 그러한 가능성을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시기는 매우 짧았고, 그것이 이와 같은 고전적 교양소설이 계속해서 재생산되지 못한 이유—마치 한 생물종이 지구환경의 변화로 인해 멸종하게 되었듯—라고 설명하며 모레티는 1장을 닫는다.


1) 국역본에서는 “상징적 형식”으로 옮겨져 있으나, 모레티가 참고하는 카시러Ernst Cassirer의 symbolische form(symbolic form)은 통상적으로 “상징형식”으로 옮기며 여기서도 이를 따른다. “‘상징형식’은 각각의 정신적 힘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 힘에 의해 정신적인 것의 의미 내용이 하나의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기호에 연결되고 이 기호에 내적으로 속하게 되는 것이다. ... 모든 상징형식 속에는 근본 현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근본 현상은 우리의 의식이 외부 세계에 대한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표현이라는 자유로운 작업에 연결시켜 스며들게 하기 때문이다”(<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정신적인 것의 의미내용”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기호”를 ‘매개하는 형식’으로서의 상징형식을 이해할 수 있다(칸트적인 뉘앙스를 배제하기는 어렵다). 모레티가 “상징형식으로서의 교양소설”Bildungsroman as Symbolic Form을 거론할 때, 나는 그가 교양소설을 사회(학)적인 내용과 수사적 기호들을 매개하는 형식=장르로 채택했다고 이야기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2) 물론 위르겐 하버마스의 고전적인 연구 <공론장의 구조변동>이야말로 이러한 해석의 대표자다.

3) 이 ‘이율배반의 해소’를 수행하는 방법에서 모레티의 연구서가 진실로 부르주아 계급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 칸트의 텍스트를 닮아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4) 이는 폴 리쾨르가 <비판과 확신>에서 지나가듯 설명한 것처럼 ‘공적 영역’에 대항하는 범주로서의 ‘사적 영역’ 자체가 갖는 근원적인 모호함과 연관되어 있다.

5) 물론 우리는 <판단력 비판>의 숭고sublime에 대한 설명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6) 피터 브룩스Peter Brooks가 제시하는 멜로드라마의 인식적 기능에 대한 설명을 참고.

7) 이러한 표현이 형용모순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 정확히 이성의 명령=정언명령으로부터 나오는 규율에 따르는 삶을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이라는 논리를 제출했음을 떠올린다면 그렇게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8)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및 헤겔이 스미스를 전유하는 방식(루카치의 <청년 헤겔> 참조)을 보라.

9) 그런 점에서 오스틴의 소설에 노동계급이 거의 배경으로조차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아예 그런 존재는 없는 세계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는 것은 주목할 사실이다.

10) 다만 ‘부르주아적 가치’를 설명하면서 모레티가 묘하게 발을 뺀다는 사실, 곧 자유의 포기와 통합을 이야기한 뒤 곧바로 “자유와 그 반대”라는 “두 가지 반대되는 긴장의 지속적인 공존”으로 풀어낸다는 점은 지적해 두자—‘타협’이라는 말은 매우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지만, 사실 통합이라는 의미에서의 타협과 두 긴장 사이의 공존이라는 점에서의 타협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미묘하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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