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친.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외.
Reading 2014. 8. 23. 05:52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내가 러시아어 표기는 못하겠고, 영제는 _Rabelais and His World_) 국역본을 읽었다(이덕형, 최건영 공역. 아카넷, 2001). 아마 판권을 이대 쪽에서 사들여서인가 아카넷 판은 절판이라 도서관에서 구해 읽을 수밖에 없다. 자세한 사항은 전해들은 바가 없는데, 번역을 새로 제대로 하는 건 나쁘지 않지만 이렇게 오래 질질 끌면서 새로 책을 구할 수 없게 하는 건 좀 민폐가 아닌가 싶다. 예컨대 _Dialogical Imagination_으로 영어판에 묶인 논문들도 저작권에 걸려서 <장편소설과 민중언어>가 개역판이 못 나오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사정이고(창비에서 나온 판은 영서랑 대조했을 때 글 하나가 빠져있다).
2010년도 본격적으로 이론 공부를 처음으로 시작할 때 바흐친은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 문제>를 처음으로 흥미있게 읽었다. 나름 국역된 것들 중 유명한 저술들은 그래도 좀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라블레>랑 <말의 미학>을 못 읽어서 늘 아쉽던 차에 이번에 전자를 다 읽어서 마음의 부담을 좀 던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대치+분량만큼 많은 걸 건지진 못했다. 사실 바흐친이 주장하는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자체가 역사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유토피아적인 것, 저자 자신의 희망이 매우 강하게 투영된 이상적인 개념인 것 같다. 실제로 이 두터운 저술에서 바흐친은 계속해서 기존의 라블레 및 르네상스 문화 연구사를 검토하면서 비판하지만, 그 모든 비판은 (자신이 상정한) 민중적=카니발적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풍부한 면모를 기존의 연구자들이 되살리지 못한다는 논리가 반복될 뿐이다. 물론 나름대로 방대한 자료들을 연결하면서 중세 및 르네상스의--사실 중세 및 르네상스 연구자라면 이 두 시대가 이렇게 쉽게 묶일 수 있는지부터 의심하지 않을까?--'민중문화'를 재구성하려는 노력 자체를 가볍게 볼 생각은 없으나, 중세/르네상스가 무엇인지, 민중이 무엇인지, 그가 민중문화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특정한 정신적 성격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모두 구체적이지 않아 보인다. 나 자신이 그 시대를 연구하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말하기 힘들겠지만, 솔직히 개념적으로 구체화되지도, 성숙되지도 않은 채로 특정한 모티프들을 꿰어 자기 자신이 만들고 싶은 이념형에 끼워맞춘다는 인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바흐친은 ~라고 말했다"라고 인용할 수는 있겠지만, "바흐친의 주장에 근거하면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는 ~한 성격을 지닌다"라고 인용하기는 어렵다는 느낌. 같이 빌린 <바흐친의 산문학>을 읽으면 좀 더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으려나. (라블레 연구자들이 왜 이 책을 하나도 인용하지 않는지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라블레>를 읽는 것이 전적으로 무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단 바흐친이 '민중문화'를 재구성하며 끌어내는 몇 가지 설명들은, 그걸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그 논리 자체가 흥미롭다. 단적으로 육체적/물질적인 묘사들로부터 죽음과 재생의 모티프 같이 상이한 요인들이 결합되는 모습을 읽어내는 것은, 물론 여기서 우리는 정신분석의 영향을--바흐친이 프로이트 또한 주의깊게 읽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볼 수 있지만, 특히나 대중문화/민속문화처럼 '정제되지 않은' 요소들의 덩어리들을 다룰 수 있는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더불어 라블레의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육체가 삶과 죽음, 재생과 같은 것을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시간의 초월적인 면모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육체를 초월하는 '집단적 육체'를 현시한다는 지적과 같은 것은, 물론 나는 이걸 완전히 뒤튼 형태로 오늘날의 좀비라는 모티프를 떠올리는데--그런 점에서 단순히 시체훼손 정도로 좀비영화에서 육체의 모티프를 설명하고 마는 비평은 불충분하다...여기에는 육체가 더 이상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광경이 있다--, 주체와 인식의 단위를 개인이라는 협의의 범주로 제약시키는 걸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하는 '근대적'인 시선을 반성케하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물론 근대를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시선이야말로 맑스주의의 특기 중 하나며, 그런 점에서 <라블레>는 그 초역사적인 면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맑스주의적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바흐친을 통상적인 포스트모더니즘적 논의에 합류시키는 (이제는 낡은 것이 되어버린) 시선에는 찬성할 수 없다. 적어도 속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개인이라는 범주를 진지하게 문제삼은 적은 없으며(그들이 그 자체로 개인-주체를 상정하는 소비를 비판하지 않은 순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름을 조금 바꾼 자유주의자로 전락한다), 바흐친은 확실하게 그 범주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그 디테일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바흐친의 목적이 오늘날 우리에게 자명한 '근대적인 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우리는 바흐친이 재구성하여 제시하는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족문화'를 그 자체로 실증적positive인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근대인들에게 자명한 요소들을 반성하기 위한 부정적negative인 개념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아주 손해보지는 않을 것 같다.
유사한 종류의 논의가, 교양서로서는 그럭저럭 흥미롭지만 진지한 역사서로는 높이 쳐주기 힘든 스티븐 툴민의 <코스모폴리스: 근대의 숨은 이야깃거리들>_Cosmopolis: the Hidden Agenda of Modernity_(hidden agenda를 "숨은 이야깃거리"로 번역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툴민은 그것보다는 좀 더 진지한 태도를 갖고 작업을 했다! 결과물이 그저 그래서 그렇지...)에서 나타난다. 툴민은 베이컨과 몽테뉴의 독특하고 실용적인 회의주의, 아니 그냥 실용주의를 옹호하며--그리고 이 옹호는 1960년대 후반부터의 '진보적' 운동과 연결된다; 앙리 4세가 J. F. 케네디랑 동일시되고 뭐 이런 식으로...--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적 세계관을 비판하는데, 이때 툴민이 재구성하는 인문주의 전통이나 근대 전통이나 사실 그다지 역사적인 퍼스펙티브 위에서 형성된 게 아닌 것까지도 비슷한다(예컨대 툴민은 인문주의자들의 관용적인 태도와 근대 철학자들의 불관용적이고 비실천적인 이론적 엄밀함을 대조시키는데, 후자에 속하는 가장 유명한 이인 로크가 <관용론>을 썼고 자신의 가장 철학적인 저술에서조차 실용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는 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흐친의 '민중문화'가 문화적 산물의 모티프만을 꺼낼 뿐 역사적인 맥락을 전혀 언급하지 않듯, 툴민의 저술도 그러한 철학이 어떠한 물질적인, 정치경제적인 맥락 위에 자리했는가를 전혀 사고하지 않는다. 여튼 간에 근대 이전으로 되돌아가 근대를 비판하는 논리--사실 루소야말로 이런 진술의 시조이지 않은가?--가 그 자체로 비역사적임을 지적하는 데 머무르는 대신 이런 텍스트들이 우리 자신의 자명한 전제들에 대항하여 제기하는 질문들은 한번 정도 숙고할 필요가 있다(그래도 툴민의 책이 별로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원래 바흐친의 저술 중 몇몇 흥미로운 대목들을 인용문으로 남기고 싶었는데, 시간 등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그냥 반납처리했다.
NLR에서 골라낸 인터뷰 모음집인 <좌파로 살다: 좋은 삶을 고민한 문제적 인간들> 국역을 읽고 있다. 원래 만델'님'의 인터뷰가 있어서 인상을 끌었는데, 사실 만델님의 인터뷰 분량이 너무 짧아서;;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면 여기서 벨기에인 만델의 회고담에 등장하는 앙리 드 만Henri de Man의 이름이 걸릴텐데, 당연히 폴 드 만Paul de Man의 삼촌이다... 여튼 의외로 아사다 아키라랑 왕후이--600쪽이 넘는 분량 중 서유럽 외 좌파들이 제법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의 인터뷰가 꽤 재밌다. 둘 다 자국의 정치사상적/이데올로기적 국면을 역사적으로 간추려 조망하기 때문에 짧지만 읽어보면 꽤나 알차다. E. P. 톰슨의 아내로만 알려져온 도로시 톰슨(몰랐는데 에드워드가 두 번째 남편이었다)의 인터뷰도 흥미롭다. 물론 영국의 역사가답게 복잡한 이론적인 논의보다는 소박하게 읽힐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페미니즘'들'과 같은 것을 이야기할 때는 주목할 만 하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보는 페미니즘 이론가들과는 꽤나 다른 조건 및 전통 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갖는 힘이 있다. 개인적으론 이 책의 인터뷰이들 중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구성원들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다. 여튼 조금씩 군데군데 짬날 때마다 읽어보고 있다(마지막에는 아리기에 긴 분량을 할애하는데, 오늘날 특히 중국과 관련해서 아리기의 이론이 강렬한 반대파에 부딪힌 지금 이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친구의 군 입대 환송회에 다녀왔다. 씻고, 조금 책을 더 읽고 자야겠다. <자본> 3권은 40쪽만 읽으면 이제 1편이 끝나고, 1/7 정도 읽는 셈이다...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습관의 몇 안 되는 장점은 술자리에 늦게까지 있다 들어와도 책을 좀 더 보고 잘 수 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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