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벤느.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재독 + 인용

Reading 2014. 8. 16. 04:47

폴 벤느(Paul Veyne).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Comment on écrit l'histoire). 1978. 이상길, 김현경 공역. 새물결, 2004. [592쪽]


 방금 폴 벤느의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를 재독했다(이전에 같은 책을 짧게, 별 영양가 없이 언급하긴 했다. http://begray.tistory.com/62 참조. 같은 저자의 <푸코, 사유와 인간>을 다룬 단평도 이 블로그에 있다). 부분적으로는 수개월 전 최초로 이 책을 읽을 때 내가 너무나도 조급하게 달려들었다는 점에서--데리다가 말했다고 알려져 있듯, 책은 원래 천천히 읽어야 한다--, 또 텍스트에서 이야기하는 논지들이 상당한 곱씹음을 요구하기 때문에 적어도 내 수준에서는 재독이 필요한 책이었다. 아마 수 년 뒤에, 내가 그 기간 동안 정신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정도로 운이 좋다면, 한번 더 이 책을 읽고 지금 얼마나 눈 뜬 장님 같았는지 확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지적 성장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전에 읽었던 뛰어난 책을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는 것이다...똑같은 이해를 반복하게 된다면, 자신의 지적 지평이 그 책을 이미 뛰어 넘었거나--물론 보통 정말로 탁월한 저술이라면 이런 일이 쉽사리 발생하지 않는다--자신의 지적 성장이 정체했음을 뜻한다.


 이 텍스트의 독서가 까다로운 이유로 셋을 들 수 있겠다. 1) 역사학이 무엇을 대상으로 어떤 작업을 하는지(1부 "역사학의 대상"), 기존의 역사적 시각들이 어떤 문제들을 갖고 있는지(2부 "이해"), 그것이 과학과 어떻게 다르며 인접한 다른 학문들(인간과학, 경제학, 사회학 등등)과 어떻게 구별되는지(책 전체 및 특히 3부 "역사학의 진보")와 같이 벤느가 다루는 주제 자체가 상당한 숙고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아마 인문사회계열에서 훈련받지 않은, 특히 역사적 방법론의 기본 전제를 고민해본 적이 전혀 없는 독자라면 벤느가 '가볍게' 주장하는 세목들에 축적된 이론적 함의들 자체가 매우 낯설 것이다. 2) 벤느의 서술 스타일 자체가 우리가 통상적인 학적 서술에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 한편으로는 에세이에 가깝게 경쾌하면서도, 비판의 날카로움은 전혀 무뎌지지 않으며,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냉소와 아이러니의 제스처들은 종종 저자가 정확히 자신의 입장을 어디에 위치시키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그는 어떨 때는 매우 과감하지만 동시에 매우 미묘한 지점에서 말을 아끼곤 해서, 그의 입장 자체를 이해하는데 섬세한 감각이 그 자체로 요구된다. 이것은 문장 단위가 아니라 각 장 단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특성이자 난점이다. 이 책은 가령 페리 앤더슨처럼 명시적으로 체계적인 스타일로 서술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진동한다'는 비유가 더 알맞을지도 모른다. 3) 아마 일반적인 독자들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분과학문적인 학적 훈련을 받은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난점일텐데, 벤느는 단순히 박식할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박식하다; 몇몇 부분에서 그는 자기 자신이 단지 '교양있는' 저자인 척 하지만, 꽤 작은 글자들로도 47쪽의 분량을 자랑하는 인용 및 주석들을 보면 벤느는 자신의 전공인 고대 로마의 텍스트들만이 아니라 기존 및 (비교사, 아날 학파, 영국의 관념사history of ideas 등에서) 갱신되고 있는 역사학의 전통들, '기본적인' 철학(물론 영국경험론도 포함이다), 사회학(베버와 파슨스가 얼마나 깊게, 많이 인용되는가!), 동시대 프랑스에서 만개하고 있던 갖가지 인간과학의 전통들(인류학, 과학철학 등등), 18-20세기 경제학(스미스, 왈라스, 뵘-바베르크, 슘페터, 폰 미제스, 하이에크, 사무엘슨을 한 명의 저자가 전부 수준높게 인용한다!)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분야들에 관해 깊은 이해도를 보여준다. 내가 읽으면서 인지하고 기억한 것들만 이 정도이며, 적지 않은 인용들은 내게 완전히 낯설었음을 감안한다면 이 뛰어난 저술이 한국에서는 지금 도서관에서나 구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는 아쉬운 사실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벤느의 기본적인 태도가 드러나는 문장들의 일부를 서문에서 인용해보자. "역사학에는 방법이 없다. [...] 역사학은 주관이며 관점이라고, 우리는 과거에 대해 우리의 가치를 바탕으로 질문을 던진다고, 역사적 사실은 사물이 아니라고, 인간은 이해되는 것이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고, 인간에 대해서라면 과학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 역사학은 이런 과학[인간과학 또는 인간에 대한 물리학]이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일 역사학이 과감해지기만 한다면 (과학 아닌) 다른 방향에서 무한한 혁신이 가능할 것이다"(14). 언제나 그렇지만, 이미 책을 읽고 벤느의 주장이 가리키는 요지를 이해한 독자에게 내가 인용한 문장들은 그냥 평범한 이야기일 것이며, 벤느의 텍스트를 거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그냥 낯선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거나 여기서 몇 가지 요점들을 정리한 후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는 이런 거다, 이렇게 정리하지는 않겠다. 벤느는, 물론 몇 가지 큰 주제들에 수렴될 수는 있겠지만, 아주 다양한 질문들을 통해 거의 역사학이라는 것 자체를 정의가 아닌 묘사, 스케치, 데생(내게 이것들 간의 차이를 묻지 말기를 바란다--나는 지극히 감으로 단어를 고르고 있다)을 하고 있다. 독자들은 가급적이면 그 세부적인 질문들과 직접 대면하고 자신이 어떤 입장을 선택할 수 있는지(예컨대 나는 벤느가 맑시즘에 대해 가하는 가열찬 비판을 대체로 196-70년대 프랑스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또 자신이 (벤느가 비판하는) 어떠한 편견 위에 자리하고 있었는가를 질문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이 텍스트의 독해로부터 가장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독자들은 인문사회계열에서 연구자로서 훈련받고 있는 이들일 것이다--아마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 연구자들은 12장을 읽으며서 가슴이 철렁할 수도 있겠다. 이 텍스트는 분명 역사 서술에 대한 책이며, 그런 점에서 2차 자료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종종 매우 뛰어난 2차 텍스트들은 1차 텍스트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벤느의 책은 그런 값을 한다. 여튼 텍스트를 요약하는 대신 몇 가지 인상깊은 대목들을 인용한다.







1부 역사학의 대상

1장 단지 허구가 아닌 이야기일 뿐

<사건과 자료>

"역사는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머지는 모두 여기서부터 나온다. 역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가 되살게 해준다 해도 그것은 그저 소설만큼이다. 역사가들의 손으로부터 나온 체험은 행위자들의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서사narration이다. [...] 소설처럼, 역사는 분류하고 단순화하고 조직해서 한 세기를 한 페이지에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

 이 한계란 다음과 같다. 역사가들이 사건이라 부르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온전하게, 직접적으로 포착될 수 없다. 그것은 문서 자료나 증언을 통해서, 말하자면 테크메리아tekmeria, 즉 흔적들을 통해서 언제나 불완전하게, 간접적으로 포착된다. 설령 내가 워털루 전투의 동시대인이자 목격자일지라도, 아니 내가 그 사건의 주된 행위자이자 나폴레옹 자신이라 할지라도, 나는 역사가들이 워털루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하나의 관점만을 가질 것이다. [...] 본래 역사란 자료에 의거한 인식이다. 또한 역사적 서사는 모든 자료 너머에 자리하는데, 왜햐하면 이 자료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사건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록 사진의 몽타주가 아니며, '마치 당신이 현장에 있는 것마냥 생생하게' 과거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제라르] 주네트의 쓸모 있는 구분을 빌려오자면, 역사는 미메시스가 아니라 디이게시스diegesis다." (21-22, 이하 강조는 인용자)


<사건과 차이>

"당연하지 않은 모든 것이 바로 사건이다. [...] 우리는 일반 개념의 문제가 역사가들에게도 제기된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잠정적으로 딜타이와 빈델반트의 구분을 채택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 법칙과 유형을 정립하려는 목적을 지니는 법칙 정립적 과학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개별 기술적 과학이 있다. 물리학이나 경제학이 법칙 정립적이라면, 역사학은 개별 기술적이다"(27).


<자연과 역사>

"우리는 과학과 역사학을, 보편적인 것의 연구와 개별적인 것의 연구라는 식으로 대립시킬 수 없다. 우선 물리적 사실은 역사적 사실만큼이나 개별화되어 있다. 다음으로 역사적 개별성에 대한 지식은 보편적인 것과의 관계 설정을 전제한다. "이것은 폭동이며, 저것은 혁명인데, 언제나 그렇듯이 계급투쟁 혹은 하층계급의 분노에 의해 설명된다." 역사적 사실이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해서, 그 설명이 선험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존 왕의 두 번의 행차가 두 개의 다른 사건이 되는가? 우리는 그것들 각각을 설명할 것이며, 그게 전부다. 역사학은 과정의 직조물이며, 과학은 과정들을 설명하게끔 할 뿐이다." (30)


"진정한 경계는 역사적 사실과 물리적 사실 사이가 아니라, 역사서술historiographie과 물리 과학 사이를 지난다. 물리학이 한 묶음의 법칙이라면, 역사학은 한 묶음의 사실이다. 물리학은 이야기되고 설명된 물리적 사실들이 아니라,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하는 데 쓰이는 법칙들의 집성이다. [...] 역사가에게 사정은 다르다. 만약 역사 법칙의 집성인 과학(그런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치고)이 있다 해도, 그러한 과학이 역사학은 아닐 것이다. 그런 역사학은 이 법칙들이 설명하게 될 사실들의 집성인 것이다." (31)


3장 사실도, 실측도도 아닌 줄거리들

<사건의 장의 구조>

"사건은 존재가 아니라, 가능한 여정들의 교차로이다."(72)


"사건은 사물이나 견고한 대상,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재에 대해 자유롭게 가하는 재단이며, 상호 작용하는 실체들, 즉 인간과 사물이 움직이고 괴로워하는 과정의 집합이다. 사건은 자연적인 단위를 지니지 않는다. [...] 비-사건적인 역사는 일종의 망원경이었다. 그것은 고대의 천체학자들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수많은 별들을 하늘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면서, 별들을 가득 찬 하늘을 성운들로 분할했던 우리 방식이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끔 만들 것이었다.

[...] 우리는 입방체의 모든 면들을 동시에 볼 수 없다. 부분적인 관점에서만 그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반대로 이 관점들을 늘려나갈 수는 있다. 사건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건의 접근 불가능한 진실은 우리가 내세우는 무수한 관점들, 그 나름대로 부분적으로만 진실인 관점들을 통합할 것이다. [...]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실측도와 동일시한다면, 이는 기만적인 일이며 편리하기보다는 오히려 위험한 일이다." (73)

: "별자리"의 비유. 아도르노의 konstellation 참고.


<일관된 종합의 어려움>

"우리는 역사적 명목론으로부터 유용한 세 가지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우선 모든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비교사histoire comparée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적절한 것으로 포착해서, 그에 비추어 하나의 개별적인 사실을 기술하게 되는 특성들은 일반 개념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모든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비-사건적인 것의 가장자리에 둘러싸여 있다. 바로 이 가장자리야말로 '사실'을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른 식으로 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끝으로 '사실'이란 필요한 유연성을 갖춘 경우 우리가 존재하게끔 만드는 대로의 것이기 때문에, 역사학에 비견될 만한 분과학문은 문학 비평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라신에 관한 교과서의 내용이 그에 관해 말해질 수 있는 것 가운데 극히 일부분이라는 점을 안다. 라신에 관해 백 명의 비평가가 백 권의 책을 쓴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차별성이나 진실성, 섬세한 정도에 있어 모두 제각각일 것이다. 별로 재능 없는 비평가만이 교과서적인 정통, 즉 '사실'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다." (87)


4장 종별적인 것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

<역사는 종별적인 것과 밀접히 관련된다>

"역사는 개별화된 사건들에 관심이 있으며, 이 사건들 가운데 어느 것도 역사에 있어서는 불필요한 중복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가의 흥미를 끄는 것이 사건의 유일무이성 그 자체는 아니다. 역사는 사건들을 이해하고자 한다. 풀어 말하면 사건들 속에서 일종의 일반성généralité, 더 정확하게는 종별성spécificité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104)


<역사 지식의 정의>

"보편적이지 않으면서, 독특하지 않은 것이 역사적이다. 보편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차이가 있어야만 한다. 독특하지 않기 위해서는 종별적이어야만 한다. 이해되기 위해서는 줄거리로 되돌려져야만 한다." (109)


<덧붙이는 글. 가치론적 역사>

"그것[가치론적 역사]은 다만 역사가의 중요한 능력을 요구한다. 공감이 아닌, 모방의 능력 말이다. [...] 이 모방의 능력은 화랑 운영자에게 필요한 전부이기도 하다. 그 능력을 갖춤으로써 그는 딱히 감식안을 가지지 않아도 되고, 고객의 취향을 더욱 잘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 애호가들과 대화하려면, 그는 사람들이 어떤 각도에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지, 어디가 특히 작품을 가치 있게 만드는 부분인지 알아야만 할 것이다. 베버가 말하듯이, "평가와 구분되는 가치론적 해석은 주어진 현상 앞에서 '가능한', 의미 있는 여러 입장들의 발전에 있다."

 다시 말해 가치를 알아차리는 것과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로마시대 초상화의 역사가는 어떤 작품들을 그 스타일 상의 계열 안에 정리하는 데 있어 완벽하게 틀림없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술로서 그것들의 절대적인 가치에 관해서는 전혀 개념이 없을 수도 있다." (125)


2부 이해

6장 줄거리를 이해하기

<'설명하다'의 두 가지 의미>

"역사책을 펼쳐 읽을 때, 우리는 소설책이나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듯이 그것을 이해한다. 달리 말해 역사가의 입장에서 설명이란 '줄거리의 전개를 보여주기,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기'를 의미한다. [...] 우리는 여기에 '이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하겠다.

 역사가는 줄거리들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줄거리이지, 예컨대 지리학적 드라마의 줄거리가 아니기 떄문에 그것의 동기, 수단, 동력 역시 인간적이다." (153)


<이해하기와 설명하기>

"역사적 설명이란 자료소써 충분히 뒷받침된 이야기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명징성에 불과하다. 역사가에게 그것은 서사 속에서 나타나며, 소설가에게 그렇듯이 역사가에게도 서사와 구분되는 작업이 아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155)

: 서사(이야기) 자체가 이해의 하나의 방식. 이야기가 가능한 것은 이해가 가능함을 함축한다.


<우연, '물질' 그리고 자유>

"역사적 설명은 요소들의 명료화를 한껏 밀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현세에서 이 요소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우연이다. 그것은 피상적 원인causes superficielles, 우발적 사건, 요행 혹은 운수라고 불린다. 또 다음 것은 원인, 조건 또는 객관적 소여라고 불린다. 우리는 그것을 물질인이라고 부를 것이다. 마지막 것은 자유, 심사숙고이다. 우리는 이것을 목적인causes finales이라고 부른다. 아무리 사소한 역사적 '사실'이라도 그것이 인간사라면 이 세 요소들을 포함한다." (164)

: 세 가지 요소들. 이것들에 기초해서 복잡한 틀을 짜보기.


<우연과 심층적 원인>

"[트로츠키의 <러시아혁명>에 대해 언급하며] 역사가 피상적인, 즉 효과적인 원인들을 포하하기 때문에, 그것은 전략적이며 상이한 배치를 포함하는 독특한 국면conjonctures singuliéres인 전투들의 연속이다. [...] 전형적인 상황을 위해 미리 짜여진 전략이나 행위의 규칙은 없다." (175)


7장 이론, 유형, 개념

<변전과 개념>

"개념과 범주는 끊임없이 개량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미리 정해진 어떤 형식도 가지지 않으면서, 각 문명 속의 그들 대상의 현실에 맞추어 빚어져야 한다." (231)

: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덧붙이는 글: 이념형>

"오늘날 이념형이라는 말은 종종(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진부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은 사건을 단순화하며 일정한 각도에서 비추는 역사서술 모두를 이념형이라고 일컫는다. [...] 하지만 이와 같은 의미는 베버의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이념형은 역사가의 작업 결과가 아니라, 순전히 발견적인 용도만 지니고 있으며 작업실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분석 도구에 불과했다. 최종적인 이야기récit définitif는 이념형이 아니라 그것을 함참 넘어서는 것이다. 이념형은 정말로 이상적인 것이다. 그것은 제 논리의 끝, 혹은 제 논리들 중 하나를 끝까지 밀고 나갈 너무도 완벽한 사건이다. 이념형을 통해서 역사가는, 이상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재는 한이 있더라도, 구체적인 사건의 논리를 더 깊이 꿰뚫어 보게 되며 비-사건적인 것을 해명할 수 있게 된다.

 베버의 텍스트들은 아주 분명하다. 이념형(종파, 도시, 자유주의 경제, 장인신분)은 "한계-개념"인 동시에, "어디에서도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실재가 이상적 도식과 얼마나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지 따져보는 데 이용되는", "유토피아"다. 그것은 "발견적인" 가치를 지닐 뿐이며, 역사서술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인식 수단으로서만 고려될 따름"으로 "이념형과 역사를 혼동해선 안 된다". 하지만 이념형이 없다면 역사 지식은 "단지 희미하게 감만 잡을 수 있는 대상들의 영역에 묻혀 있을 것이다". 이념형은 평균이 아니며 사실 평균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것은 대체적인 특성들을 비난하며 총칭에 반대한다. 우리는 한 개별성의 이념형만을 고안할 수 있는 것이다." (233)


"이념형의 문제는 총체성으로서 포착되면서도, 그 이해의 기초가 되는 계열화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성을 이해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개별성(줄거리라고 말해두자. 도시국가든 자유주의 경제든 괴테의 교육 배경이든 말이다)의 전개는 결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물질적 난점들 또는 우연에 의해 가로질러진다. [...] 자기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개별성을 상상해보자. 어떤 '어려움'이나 사고도 그것의 발전을 막거나 멈출 수 없는 개별성. 바로 이러한 개별성이 이념형이 될 것이다.

 베버 이론의 바탕에는 개체의 완전한 발전이라는 관념이 있다. "이념형은 발생적 개념 안에서 역사적 개별성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왜냐하면 "어떤 개념의 내용에 대한 발생적 정의를 내리고자 할 때 이념형 말고는 다른 형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념형을 사용하는 방법의 기본 아이디어는 완성된 개체만이 불완전한 개체를 이해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234)

: 맑스, 칼 슈미트, 아도르노, 벤야민.


8장 인과성과 소급추정

"소급추정[rétrodiction]의 문제는 원인들의 개연성, 혹은 가설들의 개연성의 문제이다. 즉 어떤 사건이 이미 일어났다면, 그에 대한 좋은 설명은 무엇인가? 왕이 물을 마시는 것은 그가 목이 마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예절상 그가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인가?

 역사서술의 문제는, 사료비판의 문제가 아닐 때에는, 소급추정의 문제이다. 역사가들에게 설명이라는 단어가 무척 인기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있어 설명하기란 좋은 설명의 발견이며, 공백을 메우기이고, 훗날의 경제적 쇠퇴를 이해시켜주는 과거의 서양과 아랍세계 사이의 관계단절을 발견하는 것이다. [...] 역사적 종합 혹은 소급추정에 대한 연구는 역사에 있어서 귀납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연구이자, '역사적 인과성'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236-37)


<소급추정의 기초>

"시원찮은 조각은 계열 속에 들어가지만 걸작은 그럴 공산이 훨씬 적다. [...] 언제나 큰 문제는 우리가 반복이 이루어지는 부문에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반복에 기댈 수 없는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249)


<역사는 결코 과학적이지 않을 것이다>

"과학적 추상들을 모두 합해서 구체적인 것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거기에 실증주의의 궤변이 있다. 우리가 재단할 수 있는 원인들의 수는 무한하다. 현세적이며 인과적인 이해인 역사는 서술이며, 동일한 사건에 대한 가능한 서술의 수는 무한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274)


9장 의식은 행위의 근원에 있지 않다

<타자에 대한 이해>

"인간이 인간을 이해한다는 관념은 마치 자연에 대해서 그렇듯이 우리가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290)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떤 목적인지는 모른다>

"이해의 유일한 미덕은 모든 행위가 우리에게 설명가능하며 평범하게 보이도록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평범한 설명들 가운데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를 말할 수 있게 해주진 않는다. [...] 첫째,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타자의 가치로부터 어떤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다. [...] 둘째, 이해한다는 것은 소급추정과 재구성에 의해서일지라도, 타자의 목적에 관해서 정보를 얻는se renseigner 것이다." (294)


<이데올로기와 실재의 이원론에......>

"[파레토의 사회학에서] 사람들의 추론은 대체로 그들 심층에 있는 열정의 통속적인 합리화이며, 이 심층의 '잔여물'résidus은 존속하기만 한다면 자기와는 정반대의 대립물로 가장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잔여물이 심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이며, 다른 것들처럼 체험의 일부를 이룬다고 덧붙이는 편이 좋겠다." (303)


<결의론: 네 가지 예>

"우리는 역사의식의 네 가지 사례를 분석할 것이다. 첫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 생각과 같은 의례. 둘째, 연장자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집단의 강한 감정구조. 거기에는 여러 가지 합리화와 '부수적인' 불안이 개입하는데, 제1원인인 것처럼 보이는 이 불안이 실은 결과이다. 셋째, 우리가 관습적으로 '제도'라고 부르는 사회적 유형. 거기에서 필연성은 미덕이 되고, 사회체와 정신의 관계는 전도된다. 마지막으로 겉으로는 부조리해 보이지만, 숨겨진 합리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일상." (315)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

"구체적인 분석과 집단심리학의 경험을 요구하는 수많은 특수사례들이 물질과 정신, 열정과 변명의 이원론을 대체한다. 그런데 집단심리학과의 이러한 친숙성은 현대 문화의 성취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인식에 있어 새로운 영역의 발견이다. 이러한 발견의 결실이 교과서 안에 정식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리로 환원될 수 있는 지식이 아닌, '문학적' 혹은 일상적 심리학이기 때문이다." (329)


3부 역사학의 진보

10장 질문지의 연장

"역사가의 첫번째 의무는 진실을 구축하는 것이고, 두번째 의무는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역사에 (사료)비판은 있지만, 방법은 없다. 이해하는 데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339)


<점진적인 개념화>

"사람들이 얼마나 독창적인지를 알려면, 정신이 풍요로워야 한다고 파스칼은 말했다. 개별적인 것을 감지하면서 시야를 확장하기 위한 조건은 우리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저잣거리의 사람보다 더 많은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평론가는 그림 한 점에서도 단순한 관광객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본다." (341)


<현실과의 대조확인 작업recension으로서의 역사>

"개념화의 노력은 평범한 독자들에게 사건의 '조성'이나 '분위기' 등을 포함하는 총체성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소여들을 담론적으로 제공하는 데 그 이상이 있다." (356)


"역사지식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으며 모든 것은 역사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 특수한 목적들에 집착하는 실용적인 관심과는 달리, 순수하게 이론적인 관심의 본성은 존재의 총체성에 대한 인식 쪽에서 실현된다는 점에 있다." (357)

: 문학/문화의 비평이 참고할 수 있을까? 예술에 대한 비판적 이론이 이러한 논의를 차용할 수 있을까?


11장 현세와 인간과학

<인간과학은 실천론이다>

"그것[<실천이성비판>]은 칸트의 말에 따르면 "도덕성의 정식화"를 제공하고 있을 따름이다. 도덕적 행위의 논리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 칸트는 도덕적 행위자가 행해야만 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며, 교훈적인 것parénétique에 몰두하지도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한다. [...] <판단력 비판>은 미적 판단의 방식 자체를 추출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미학적인 실천론을 사회학주의 속에서 해소시키고자 하는 예술사회학은 모두 스스로 소진되어버릴 것이다. 그것이 기술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행위가 더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각 행위영역에는 행위자들이 가지는 의식이나, 그들 나름의 동기 또는 사회가 제공하는 합리화와는 독립적으로 그들을 유도하는 숨겨진 논리가 있다." (392)

: 이것은 절대로 신비주의적인 진술이 아니다. '독립적인 논리'.


12장 역사학, 사회학, 완전한 역사학

<그것은 왜 불가능한가>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문화는 특수한 사건들로 이루어지며, 우리는 각각의 사건이 요구하는 설명구조에 대해 속단할 수 없다. 우리가 문화나 역사에 대해 이론을 만들 수 없는 이유, 상식이, 아니 차라리 현대어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범주의 수준으로 승격시킬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18)


<역사학을 불구로 만드는 두 가지 규약>

"첫번째 규약은 역사가 오직 과거의 역사, 사라지고 있으며 기억에 의해서만 보존될 수 있는 것의 역사이기를 원하였다; 현재에 대한 지식은 반대로 자명한 것처럼 보였다. 두번째 규약은 역사가 한 민족의 지나간 삶을 이야기하고, 그 민족의 독자성에 관심을 집중하며, 시공간적 연속체 속에 자리잡기를 원하였다." (441)


"결국에 연속체로부터 빠져 나온 역사학, 줄거리의 선택에 전적인 자유가 주어진 역사학, 시간이나 장소의 단위, 한 세기 혹은 한 민족의 역사가 그저 여러 가지 가능한 재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역사학." (443)


<"일반"지리학의 예>

"지리학에는 역사학이 본받지 않으면 안 될 하나의 커다란 원칙이 있다. 하나의 현상을 반드시 지구의 다른 곳에 분포하는 유사한 현상들과 비교하여 고려하는 것이 그것이다. [...] 비교에서부터 이해가 나온다. [...] 지리학에서는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을 이야기하는데, 전자는 지역이라는 연속체를 좇으며 후자는 빙하, 침식, 식생 등 항목별로 진행된다. 이렇게 해서 이 둘은 모든 묘사의 가능한 두 방향을 이룬다. 금석학자는 이 두 방향을 각각 지역적 분류와 계열별 분류라고 부른다. 이 이분법은 비교사에 대한 역사의 이분법이자 비교문학사에 대한 문학사의 이분법이기도 하다." (444)

: 시계열, 공간항.


<베버의 역사서>

"종합적으로 보건대, 역사학이 완전해지려면 세 가지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첫째, 동시대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사이의 대립. 둘째, 연속성의 관습. 셋째, 사건중심적인 시각. 따라서 구원은 '사회학'과 현대사회에 대한 '민족지', '비교사', 그리고 '심층적 시간성들'을 해체한 비-사건적 역사로부터 올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완전해진 역사학이 사회학의 진실이 된다. 우리 시대의 가장 모범적인 역사서는 막스 베버의 책들이다. 이것들은 전통적인 역사의 리얼리즘과 사회학의 야망과 비교사의 식견을 갖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448)

: 아날과 구별되는 비-사건적 역사?


"베버는 변이들의 망réseau de variantes을 추적한다. [...] 베버의 저작은 결국 긴 역사적인 서술 여기저기에 나타나는 몇몇 문장들로 요약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이러한 종류의 결론의 언명에 있다기보다, 이해적인 서술 그 자체에 있다." (449)


부록: 역사학을 혁신한 푸코

"푸코의 첫 직관, 그것은 구조도 단절도 담론도 아니다. 그것은 라틴어 어원이 지닌 의미에서 희박성rareté이다. 인간적 사실은 모두 희박하다. 그것들은 이성의 충만성 속에 자리 잡지 않는다. 그것들의 주위에는 우리 지혜가 짐작할 수 없는 다른 사건들을 위한 빈 자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르게 존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모스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적 사실은 모두 자의적이다." (454)


"[실천에 대해 설명하면서] 내가 말을 할 때 최면 상태에 빠져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한다는 사실은 보통 알고 있지만 본능적으로 적용하는 문법에 대해서 개념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절로 떠오르는 것을 말하면서 나는 내가 자연스럽게 나를 표현한다고 믿으며 구속적인 규칙들을 적용한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465)


"실천은 (프로이트의 이드와 달리) 하나의 심급도 아니고 (생산 관계와 달리) 하나의 원동력도 아니다. 덧붙이자면 푸코에게는 심급도 원동력도 없다(대신에 앞으로 살펴볼 바와 같이 질료matiére가 있다)." (469)

: 푸코에 대한 아주 탁월한 진술! 벤느가 얼마나 이해력 깊은 독자인지 보여주는 대목.


"담론은 발화자들 모르게 실제로 말해진 것이다. 이 발화자들은 스스로 자유롭고 풍부하게 말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부적절한 문법의 제약을 받는 편협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훨씬 더 자유롭고 풍부하다. 당연한 일이다. 이데올로기는 합리화이며 이상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풍성한 주름이다." (470)


"그러므로 푸코에게 방법이란 사물들이 결정된 실천의 대상화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의식은 이 결정들을 개념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규명되어야 한다." (473)


"푸코의 중심 테제이자 가장 독창적인 테제인 이 역설. '만들어진 것ce qui est fait', 곧 대상은 역사의 매 순간에 그 만들기faire가 무엇이었던가에 의해 설명된다. 만들기, 즉 실천을 이미 만들어진 대상에서 출발하여 설명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

 모든 불행은 대상화라는 실천을 자연적인 대상으로 '물화시킬' 때 이용되는 환상으로부터 온다. 우리는 결과를 목적으로 착각하며, 탄환이 스쳐서 찌그러지는 장소를 의도적으로 겨냥된 과녁으로 착각한다. 문제의 진짜 핵심, 즉 실천을 그러쥐는 대신에 우리는 대상이라는 가장자리에서 출발한다." (476)

: 즉 실천 혹은 '만들기' 자체를 해명하고 거기에서부터 대상, 혹은 대상처럼 만들어진 '효과'를 해명해나가는 작업.


"그[푸코]는 다만 네 가지 진실을 환기시킨다. 이 이질적인 것들의 연속이 발전의 벡터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 만화경의 동력은 이성이나 욕망이나 의식이 아니라는 점,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서는 어떤 것을 더 선호해야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 가치에 의해 측정된 이질적인 매력과 단점을 비교하고 또 통합할 줄(하지만 어떤 전환율로) 알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합리화하는 합리주의들을 만들어 내거나 이질적인 것을 물화 뒤에 감추지 말아야 한다는 점. [...] 오직 실천들이 존재할 뿐 '사물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485)


"[<광기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연적인 대상의 부정이라는,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이 푸코의 저작에 철학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486)


"광기를 부정한다고 해서 광인은 존재하지 않는데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여길 뿐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거짓없이 판단했을 때 오직 하나의 대상인 '광인'이 존재하려면, 또 사회가 '광인을 만들려면' 의식의 수준이 아닌 어떤 수준에서 어떤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87)


"푸코는 "나는 불연속, 단절들을 선호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거짓 연속성들을 경계하라"고 말했을 따름이다." (491)


"물론 실증주의는 하나의 상대적인, 그리고 부정적인 프로그램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합리화들을 부정할 때 언제나 실증주의자이다. 형이상학적인 허구들을 치워버린 뒤에는 실증적인 지식을 재구성하는 일이 남는다." (494)


"마지막까지 역사화 되지 않은 대상들, 최후까지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흔적들을 제거할 것. 그리고 그는 유물론을 제안한다. 설명은 이제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서 전체로 나아가며, 이는 형상 없는 질료 위에 시대적인 대상들을 객관화시킨다. [...]

 푸코식의 계보학적 역사는 따라서 전통적인 역사학의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그것은 사회, 경제 등을 한쪽으로 제쳐두지 않으며, 이 재료를 다른 식으로 구조화한다(세기나 민족, 문명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그것이 이야기하는 줄거리들은 실천의 역사이다. 그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진실과 그것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을 보았다." (505)

Trackbacks 0 : Comments 0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