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6일.

Comment 2014. 8. 17. 05:52

1. 엊그제 교황 방한을 계기삼아 가족이 같이 성당에 나가자는 (냉담자) 어머니의 제안을 굳건한 무신론자답게 끄떡없이 튕겨냈고, 교황이 방문하는 과정에서도 이 사회가 그를 맞아 어떤 갖가지 상처/증상들을 드러내는가를 먼저 보려했다. 방금 교황이 세월호 사고 희생자 유족을 만나고 단식투쟁자를 만나 손을 잡는 장면을 보았다. 영상도 아니고 페이스북에 뜬 화질도 좋지 않은 사진 한 장을 보았을 따름인데, 갑자기 속이 끓어올라 깊은 한숨이 나왔다. 아마 현장에 있었거나 방송을 보았으면 눈물이 터져나왔을 것이다. 논평없이 지극히 사실만을 나열한 짧은 기사 하나에 이렇게 격앙되는 걸 보면, 아무리 대학원에서 만사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다 해도 마음이 꼭 그렇게 되지는 않나보다. 더불어 나도 4월 중순으로부터 벌써 4개월 가량 지난 그 사건과 뒤이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여럿의 영혼에 입힌 상처들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못함을 깨닫는다. (일년에 상당 기간을 그런 '치유' 혹은 아픈 자들과의 진심어린 대면으로 채워야 하는 교황의 마음은 어떠한 것일까?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 그는, 당연히 강력한 의지를 가졌겠지만, 아프지 않을까? 그의 아픔은 누구와의 만남으로 덜해질까?)


며칠 전 (나보다 8살쯤 많은) 지인이 술 좀 먹은 다음에 내 페이스북을 보면 자기가 젊었을 때랑 비교해도 세상이 진짜 끔찍해졌다는 걸 알겠다고, 자기 때도 안좋은 일은 많았지만--활동가로 계속 살아온 양반이니 남들보다 덜 보고 살지는 않았을 거다--지금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그런 세계에 살고 있는 내가 안쓰럽다고 이야기했다.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는데, 지금 와서 그 말을 다시 곱씹게 된다. 아마 내가 적어도 단기간에 어떤 '치료'를 필요로 하는 일은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계기가 절실히 필요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늘 그래왔듯이 그 요청은 묵살되거나 얄팍한 형태로, 상품화된 형태로 사람들의 마조히스틱한 면을 자극시키는 '아편'들로 답해질 것이며, 다시금 상처와 고통에 무감한 권력은 제갈길을 갈 것이다. 현재 한국의 조건에서 권력의 진행과 마음의 병리는 절대로 무관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 지난 4개월 간 한국의 정치적 투쟁은 '아픈 마음'을 둘러싼 것이었고, 공식적 권력의 층위에서 그런 마음에 어떤 종류의 책임을 지려는 진지한 자세는 나오지 않았다; 대체로 무감하거나, 잇속을 챙기거나, 더 모욕하거나 그런 것들이었다. 단지 몇 마디 말을 하고 짧은 시간 동안 손을 내밀 뿐인 교황에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인간의 고통을 전혀 돌보지 않는 이 사회의 공적/사적 영역의 어두움을 비추는 그림자와 같다. 우리는 항상 필요한 것들을 바깥에서 수입하기만 하지, 여기에서 만들지 못한다... 비판도, 학문도, 심지어 인간적인 다독거림도.


...자비를 베푸소서, 평화를 주소서. 어떠한 주어를 덧붙임 없이 천주교의 기도를 이렇게만 읊어본다.



2. 계속 딴짓하며 빈둥거리다가(제발 과업task 앞에서 이렇게 도피하는 습관을 좀 고쳐야 하는데 역시 맘대로는 안 된다) 늦게서야 시작한 알바 때문에 밤을 새고 있다. 계속 노트북만 보다가는 눈이 정말 맛이 가 버릴 것 같아 때때로 창 밖의 먼 곳을 보려 한다. 원래 바람이 드나드는 걸 선호해서, 너무 덥지만 않으면 창문을 열어두고 대신 커튼을 치거나 수건을 걸어두곤 한다. 화면을 보다가 창 밖을 보면, 처음에는 방충망 사이로 맞은 편 건물의 아직까지 불이 켜진 방만 어둠 속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그러니까 그 불빛들을 둘러싼 어둠의 압도적인 두께만 남고, 어둠이 그 자체로 하나의 평면처럼 자리함을 본다. 이윽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불을 켜놓은 방 근처의 벽돌들,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의 실루엣이 어슴프레 드러나며 그 곁에 먼 산의 능선과 그 위의 산 자체보다 아주 약간 희끄무레한 새벽의 하늘이 나타난다. 다시 시선을 돌리면 방 곁의 조용히 숨쉬듯 흔들리는 나무들이, 나무들의 잎이 나타나고 수풀 사이로부터 곱게 잠든 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마냥 부드럽게 반복되는 풀벌레들의 울음 소리가 비로소 귓가에 들린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마치 푹신한 풀밭에 안기는 것과 같은 기분이라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이어 열어둔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냉기가 가벼운 옷만 걸친 몸을 감싸면 살짝 열이 과한 내 몸은 포근하게, 온난하게 서늘해진다. 그때에 비로소 나는 자신이 늦은 밤과 새벽녘의 연계 위에 흐르고 있음을 느끼고 이 시간이, 온갖 자연과 인위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 공간 위의 시간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사람을 매만지며 또 존재하도록 하는지 안다... 이 짧은 평온은 곧 저 먼 곳에서 가동하는 기계들과 새벽녘에 출퇴근하는 자동차들의 소리, 그리고 첫 차의 부산함으로 다시금 다음 날을 기약할 것이다. 이 순간은 사람의 마음에 어떤 부드럽고, 서글프고, 외롭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빈 공간 자체를 빚어내어, 이때를 한번이라도 만끽한 이에게 다시는 자신을 잊지 못하도록, 전혀 다른 시간에 다른 삶을 살게 되더라도 무엇인가 결여된 듯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도록 한다. 꼭 늦은 시간의 일감이 아니더라도 이 시간에 잠들지 않은 채 창밖의 냉기를 접하고 서로 다른 풀벌레들의 울음이 합하여 하나의 보드라운 덤불숲처럼 만들어지는, 그리고 조금씩 그 소리가 가라앉고 이윽고 전혀 다른 리듬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장면과 마주하게 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내게 이 시공간의 감각과 정서가 잊히지 않게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온 몸이 바깥으로 나아가 거니는 밤의 산책이--그 또한 인위의 공간을 전혀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주는 느낌 못지 않게 방과 밖의 문지방에서 양자의 좋은 것만 취하고자 하는 고요함도 자체의 맛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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