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13일 일기

Comment 2014. 8. 13. 13:06

다음 날 저녁에 시작할 세미나 준비를 막 하려다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 불려 나갔다. 전에 세미나도 같이 했고, 파주로도 두 번씩이나 면회를 와준 친구가 곧 군대를 간다고 했다. 합정역까지 가는 지하철에서 Locke를 조금이라도 읽으려 했지만 몇 페이지 읽다 못 버티고 계속 앉아서 졸면서 갔다. 합정역 8번 출구는 에스컬레이터 공사로 막혀 있어 다른 출구로 돌아서 나왔다. 대로에는 깎아지를 듯이 높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에 협소한 비중만을 차지하고 있는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지만 구름의 영향 이상으로 어두웠으며 하늘과 땅 사이의 대기 또한 탁했다. 엊그제의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던 달은 이제 희뿌옇고 살짝 노란빛이 비치는 둥근 얼룩 정도로만 남았다. 어둠과 먼지가 마치 음울한 꿈 속처럼 뒤덮은 대기 사이로 마천루들은 검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었고 높은 곳에 붙어 있는 기업의 로고만이 거의 환상적인 이미지에 가까울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 건물들의 뒤쪽으로 돌아내려오는 순간 오래된 주택가들, 작고 낡고 번화가라고 부르기엔 퇴색한 기운이 역력한 점포들이 평일 여름밤의 한적한 거리의 배경으로 깔려 나타났다.


일행들은 이미 얼큰히 취했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화를 내는 듯 하다가 금방 풀고, 수 년 전과 비교해 변했는지, 변하지 않은 것인지 경계선을 긋기가 어려운 모임이다. 지인의 전셋방으로 갔다.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짜장라면을 끓였다. 술안주로 가져온 크래미를 조금 넣었는데, 사실 몇 십 초는 더 볶았어야 조금 더 그럴싸해졌을 것이다. 술기운은 이런 안주라도 맛있게 느끼도록 한다. 드러누울 애들은 드러눕고, 기운이 남아있던 혹은 짜낼 여력이 있던 넷이 노래방을 갔다. 지루해하던 주인 아주머니가 남자 넷을 보면서 "넷이서만 노실 거예요?"라고 묻는다. 우리는 그냥 생수 네 개만 골라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정작 환송회(?)의 주인공은 원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별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몇 년 전 10대였을 때는, 마치 나의 20대 초반처럼, 마구 소리를 지르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제는 취향이 제법 바뀌어 내가 조금 더 부드럽고 목을 덜 쓰는 노래를 부르게 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졌다. 끝에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들을 같이 불렀다. <보편적인 노래>를 부르고, 마지막으로 이제 이런 자리에 등장하기엔 너무 클리셰가 되어버린 <이등병의 편지>를 대신하여 <졸업>을 불렀다. 노래의 가사가 너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와 심경에 들어맞아서 부르면서도 기가 막혔다. 우리를 위한 자리가 세상에 있기나 한지, 우리가 맞는 길을 가고 있는지,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잊지 않을게, 이 미친 세상을 믿지 않을게.


방은 좁고 더운데다가, 세미나 준비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오고 싶었다. 다들 기력이 다해 잠들 때쯤 드디어 할증 시간이 풀려 택시를 타러 거리로 나왔다. 수 년 동안 그래도 몇 번은 갔던 길을 지나가는데, 강변북로로 향하는 대로를 수십미터 앞두고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어 차도를 건넌 오른편을 보니 기묘한 가게들이 있었다. 무성의한 간판, "일반음식점"이란 작은 글자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창문 없이 붉은 빛깔의 테이프로 둘러싼 유리 벽 옆에 한 사람이 들어설 수 있는 작은 문 하나, 그런 가게들 서너 개가 딱딱 붙어있었다. 몇 년 전 동행과 함께 산책하다 마주쳤던 인천의 사창가의 기억이 떠올랐다--그때 우리는 스스로에게만큼이나 서로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워 했다. 너무 늦어서 불이 꺼져있기에 무심결에 바라보면서 걷다가, 가게 하나의 문에 누군가 기대어 서 있는 실루엣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마네킹 같아 보였던 그것은 사실 사람이었고, 이런 류의 업소에서 흔히 예상할 수 있는 헐벗은 복장에 진한 화장을 한 얼굴이었는데, 가게에 조명이 켜져 있지 않아서인지 건물의 그림자에 가리워져 있어 그 화장이 검게만 보였다. 그는 나에게 어떠한 흥미도 보이지 않고 시선을 길 건너 어딘가에 고정시키고 있었고, 그 시선을 담은 표정은 '노동'을 거부하기라도 하는 듯이 음울했다. 그 모든 순간에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은 뒤엉켜 있었고, 나는 두렵고 기이한 낯설음/낯익음unheimlich을 느끼고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터벅터벅 아무런 온기도 없는, 습한 기운만이 남아있는 수십 미터를 전진하여 대로로 나왔다. 대로를 따라 조금 걸으니 다시 고개를 꽤나 꺾지 않으면 전체를 볼 수조차도 없는 건물들이 나타났다. 여기에는 TV에 나오는 회사들이 있고, 바로 근처에는 TV에 나오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연예인 소속사가 있다; 그 바로 앞 편의점에는 다양한 국적의 팬들이 누군가와의 예상치 못한 만남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단 수십 미터 차이로 현격히 이질적인 공간들이 병존하는데, 가장 퇴락한 곳보다도 가장 세련되어야 할 곳이 오히려 더욱 더 기이한 꿈, 결코 기분좋을 수 없는 꿈 속의 세계 같았다.


택시는 말없이 기숙사를 향해 달렸다. 어떠한 방송도 틀어놓지 않은 고요함이 인식하지 못했음에도 좋았다. 한강 곁을 달릴 때, 갑작스러운 부패의 악취가 창을 넘어 택시 안을 점유했다. 한참이 지나기 전까지 악취는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기숙사에 내리는 순간 보다 서늘하고 덜 탁한 공기가 나를 맞았다. 그러나 합정역의 잘려나간 하늘과 이곳의 하늘 모두 그 어두움은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그 사이에 하늘의 어두움은 더욱 짙어졌고, 공기 역시 조금의 거리로도 뿌연 무언가가 끼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달은 이제 주의깊게 한참을 살펴야 무언가 희미하게 빛깔이 다른 듯 구름 속의 희미한 얼룩, 마치 착시와 같은 수준의 얼룩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고, 기숙사 뒤 산을 뒤덮은 어둠은 그 산 뒤로 더 어둡고 손이 닿지 않았을 압도적으로 큰 산의 능선이 자리하고 있다는 상상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투시불가능했다. 어디에서든 삶은 고유의 사실성을 잃고 마치 어릴 적 읽던 음울하고 기묘한 이야기들의 세계에 발을 한짝 걸친 것처럼 나타났다.


창 밖에 먼동보다 빠른 매미의 울음이 도래한다. 씻고, 조금이라도 자고, 세미나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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