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 혹은 물질적인 것의 이해를 위한 노트

Comment 2014. 8. 2. 09:28

만약 우리의 모든 언어행위가 "나"로 귀결된다면, 언어가 말라붙은 뒤에는 무엇이 남는가? 감각자료, 예컨대 쾌와 고통은 언어에 선행하는가? 감각의 주체로서의 "나"는 언어 이후에도 남는가? 언어의 타자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아니, 왜 갑작스럽게 언어는 "나"를 가리키게 되었나?


자연 앞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주어진 코드체계에 입각하여 우리의 지각을 언어화할 뿐이라면, 비자연을 언어화할 때와 다른 점이란 무엇인가? 자연적인 것, 인위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과 같은 코드의 영역구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축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영역을 구별하게 되었는가와 같은 질문이 남는다. 왜 우리는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표현하는가? 다르다는 것, 다르게 인지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에 비하면 투명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내 가장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특정한 정념이 있다고 가정하자. 내가 그것을 본원적인 나의 것으로 믿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내게 본원적인 정념이 있다고 가정하자. 내가 그것에 따라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나의 행위를 인도하는 특권적인 위치에 놓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 "가슴 속 깊은 곳의 목소리를 들어 봐"라는 요청은 사실 전혀 진리를 담보하지 않는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든 간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왜, 언제부터 우리는 이와 같은 '자연주의'에 굴복하게 되었나? 자신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끔찍한 무언가를 보는 이에게 그와 같은 조언은 저주이자 유혹과 같다. '자연주의자'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세공된 육체가 그만큼 쾌락을 잘 생산한다는 사실, 그만큼 세상살이에 맞춰져 있다는 것일 뿐이다. 나의 편안한 본성, 그것이 끔찍한 게 아닐까라는 질문을 한 번쯤은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종종 우리는 의심하는 논리를 단순히 편리하기 때문에 채택하고는 한다. 나는 그러한 편리함과 편리함으로 인해 논리가 채택되는 결과로부터 논리의 물질성을 본다. 논리는 때로 그 타당함과 별개의 이유로 살아남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보통 이데올로기는 설득력을 가져야 살아남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설득력의 종류는 조금 더 복잡하게 생각될 필요가 있다. 생각보다 살아남는 방법은 많다.


기원의 신화가 있고, 기능의 신화가 있다. 전자로부터 우리는 '태초의 시점에' 있었던 무언가를 특권적으로 사고하도록 이끌린다. 후자로부터 우리는 '현재의 시점에'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특권적으로 보도록 이끌린다. 그러나 많은 물건들은, 논리들은 과거의 기원과 현재의 기능을 비껴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마 도구 앞에서의 상상력이란 도구가 활용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맥락들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할 것이다. 사카구치 교헤가 소개하는 노숙자=도시형 수렵채집자들을 보라. 벤야민이라면 어린이의 놀이로 비유를 들면서 이러한 마법과 같은 능력을 기쁘게 찬양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으로든 자신의 범행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살인자 또한 도구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운 관계를 확립한 인간이지 않은가? 숟가락이 범행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편견이다.

도구는 과소평가되고는 한다. 그러나 도구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성립하는 목적도 있다. 도구의 등장과 함께 지평 자체가 재구축된다(이것이 사적 유물론의 핵심적인 가르침이기도 하다). 사실 수단과 목적의 분리는 수단 자체를 고찰하는 과정을 통해 목적 또한 재고찰되도록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평 자체가 흔들리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도구의 가능성을 거부하거나, 애초에 도구를 초월하는 지평을 구축하려 한다. 후자의 삶은 때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도구의 기다림 혹은 발명의 추구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사물과 사태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어떠한 이야기를 만들도록 이끌린다. 그 이야기는 대체로 완벽하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어떻게든 반박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만들기는 계속된다. 올바른 대응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방식을 살피는 것이지, 소거할 수 없는 환상을 소거하려는 무익한 시도가 아니다. 환상을 소거하려는 이들의 귓가에 그들이 어떤 이야기에 의거해 움직이는가를 먼저 생각해보라고 속삭여 주자.


텍스트 읽기를 위한 세 가지 단위: 표현(수사), 서사, 맥락. 표현은 아주 미세한 지점에서 서사의 방향을 바꾸려 한다. 서사는 맥락 위에서 맥락에 대응한다. 주어진 맥락에 반하고자 하는 서사가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서사에 반하는 뒤틀린 표현의 양식이야말로 그 서사를 위한 형식적 정합성을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따라서 여기에서 네 번째 항이 출현한다: 단위들 간의 관계와 형식.


무엇이 틀렸고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설명하기는 좀 더 어렵다.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가"가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근거의 끝에서 자신의 근원적인 편견-방향성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한번 정도 반성을 더 이상 반성불가능한 지점까지 끝까지 밀고 가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렇게 반성의 끝에서 획득한 반성불가능한 편견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매우 쉽게 비슷하지만 다른 종류의 것으로 바뀌어 있곤 한다.


바뀌지 않는 인간은 없다. 단지 모두가 바라는 방향으로 바뀌지 않을 뿐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세상이 늘 변화하고 있음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배움의 최초는 사실 역사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역사로부터 덧없음을 이끌어내는 이들이 있다. 그 덧없음의 감정이야말로 역사적으로 특수한 경험임을 말해주는 역사가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몸의 허약함이 얼마나 정신을 제약하는 구속처럼 다가오는지를 토로한다. 물론 그러한 허약한 몸조차 없었다면 구속을 받을 정신조차 없었을 터이다.


변증법적인 태도는 도구를 유심히 살피고 원래의 기능과 다르게 쓰일 수 있는 용도를, 빼어난 점이 때로 위험하게 기능하는, 그리고 열악한 것이 빛나는 돌처럼 활용될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경험에서부터 출발한다. 변증법의 핵심은 정신이 아니라 운동이며, 언제나 구체적인 것만이 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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