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1-13일 일기: 할 일들, <박탈> 창비 서평의 오기, "진실은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
Comment 2016. 12. 13. 23:361.
한번에 너무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있으면 탈도 나고 효율성도 떨어진다. 한 해 동안 거의 한계치 수준까지 아슬아슬하게 컨트롤해왔는데, 11월 중순부터는 몸이 힘들기 시작했다("최순실 게이트" 이후 '세계의 질서'에 대한 감각이 흐트러진 것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나마 종강 및 탄핵 가결 후에는 조금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는데, 엊그제 그동안 굳이 찾아보지 않았던 세월호 사건 관련 영상들을 몰아서 보며 예상했던 것 이상의 감정적인 무게를 추가로 얹게 되었다. 한동안은, 무엇보다도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비롯하여, 세월호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접할 때마다 상당히 큰 감정적 격동과 마주하는 일을 피할 길은 없을 것 같다. 덕택에 주초부터 몸 곳곳이 삐걱거렸는데 오늘 일정 하나가 어그러지면서 다른 것들을 전부 재확인하다보니 스트레스가 위험한 수준까지 올라간 게 느껴졌다. 만사 덮어두고 잠을 더 자고 식사를 충분히 하니까 좀 나아져서 조교업무를 몰아서 하고 있다. 10월부터 사실상 독서노트를 전혀 쓰지 못한 셈인데, 일단 내 마음을 정돈하기 위해 연말 연초까지 걸린 일들을 정리해 본다.
1) 가장 큰 건 크리스마스 전, 혹은 적어도 27일 정도까지는 마무리 해야 하는 중세 기말 페이퍼. 문제는 읽을 건 쌓여있는데 어떻게 풀어나갈지 별다른 감이 없다는 것. 일단 쌓여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야 한다.
2) 나다wom 이번 원고 마감. 원래 책 한 권을 읽은 뒤에 쓰려고 했는데 도무지 시간이 안 나서, 논문 하나를 읽은 뒤에 생각을 정리해서 내일 정도까지 초고를 끝내버릴 생각이다. 기말이랑 다른 원고가 겹치는 건 최악이다.
3) 테일러 세미나. 이제 SA 마무리까진 2회차 남았다(오늘은 일단 17장까지만 읽어두는 게 목표). 그 뒤에도 테일러의 이후 작업을 포함해 몇 주 차 분량의 '연장전'이 있긴 한데, 일단 SA 끝내고 나서 생각하기로.
4) 조교업무. 수업조교 일은 내일로 끝이고, 다른 지도학생은...아직 개입할 게 많지만 그래도 공부를 성실하게 했고 틀이 잡히는 게 보이기 시작해서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다. 생각해보니 나도 A4 10쪽 넘어가는 글을 단지 코멘트나 리뷰를 넘어 '지도'하는 경험은 처음인데, 어떻게 하면 학생을 과부하로 이끌지 않으면서도 나와 학생이 모두 그럭저럭은 만족할 수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과정을 둘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5) 원총 포함, 대학원생 인권&연구환경 관련 활동. 일단 연말까지는 어떻게 최소치만 맞추는 걸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조만간 공개하겠지만, 올해의 목표 중 하나가 가시적인 실적으로 나왔고 새해에 하나 더 나올 예정이다.
6) 기타 책들: 이번 학기에 이것저것 구해놓은 중세 관련 연구서들. 곧 Francis Oakley의 _Natural Laws, Laws of Nature, Natural Rights: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in the History of Ideas_(NY: Continuum, 2005)를 완독하고 다른 책들로 넘어갈 예정. 무려 포칵보다도 네 살이 많은 (2차 대전 참전용사) Brian Tierney와 함께 최근에 흥미를 갖게 된 저자다. 특히 중세 후기를 중심으로 케임브리지 학파와 다른 입장을 가진 지성사/사상사가들의 전통을 접하고 대략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게 이번 학기 중세 공부에서 얻은, 비록 의도치 않았으나 최대의 소득. 이쪽은 역시 최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한 세속화라는 주제랑도 이어져 있어서... 조금 더 읽으면 정치신학과 세속화에 관한 서로 다른 전통들을 적어도 몇 개는 거칠게나마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학기가 끝나면 미뤄두었던 인권사상사 관련 독서도 다시 이어갈 예정. 적어도 린 헌트(Lynn Hunt)와 새뮤얼 모인의 입장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정도는 정리를 해야 한다.
+ 언젠가 루만과 라투어를 읽을 것. 이제 내게는 역사가들의 저작이 아니면 '현대적인' 이론가들만이 지적으로 흥미를 준다(내가 지금까지 읽은 것 중 '현대적인' 사회이론가는 오직 푸코와 루만 뿐이었다...라투어는 어떨까?).
7) 기타 쓸 것: 래리 시덴톱의 책에 대한 리뷰, 그리고 이번에 탄핵까지 이어진 촛불집회에 대한 노트.
8) 기타 연말 모임들.
2.
계간 <창비> 2016년 겨울호(통권 174호)에 얼마 전 출간된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테나시오우 대담집 <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김응산 역, 자음과모음, 2016)에 대한 진태원 선생의 서평이 실렸다. 역자와 서평자 모두 존경받을만한 연구자들이며, 무엇보다 나 자신이 번역 초안을 읽을 기회가 있던 책이었기에 해당 대목을 훑어보았다. 매우 다양한 주제를 오가는 대담집이니만큼 무언가 일관된 논지의 서평을 제시하기 까다로운 책임은 분명하고, 그런 점에서 서평자가 주로 affect나 dispossession 같은 개념들의 역어를 따지는데 집중한 점을 이해할 수는 있다. 물론 나는 서평자의 스칼라십을 고려하면 그것보다 좀 더 논의 자체에 초점을 맞춘 리뷰가 나왔어도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을 갖고 있지만 말이다.
다만 '번역의 정확성'에 초점을 맞춘 리뷰라는 점을 고려할 때 상당히 아이러니컬한 기분이 들게하는 작은 실수가 있는데, 진태원 선생은 이 책의 역자를 "유민석"이라고 소개한다(589쪽). 유감스럽지만 <박탈>의 역자는 김응산 선배며, 유민석 씨는 이 책이 아니라 버틀러의 단독저작 <혐오발언>을 역시 읽기에 무리없는 한국어로 번역했다(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나는 후자에 대해 비판적인 서평을 썼고, 이는 아마도 곧 출간될 <말과활> 2016년 겨울 12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서평자의 공인된 학적 엄밀함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실수지만, 역시나 기고문에 대한 성실하고 꼼꼼한 검토로 이름난 <창비>에서 이런 실수를 걸러내지 못했다는 점도 무척 당황스럽다. 모쪼록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실수가 정정될 수 있기를 바란다.
3.
탄핵 다음날 밤 가슴에 가장 깊숙히 와닿은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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