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일기: 트럼프 당선

Comment 2016. 11. 10. 13:21
1. 생각보다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학업의 부담이든,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책무든, 사적 인간으로서든 한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지난 10월 하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이미 멘탈붕괴를 한번 겪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로는 더 이상 충격받지 않게 됐다는 점도 고려해야겠지만, 4년 전 한국 대선 결과를 보고도 그다지 당황하진 않았으니 그냥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정치는 주어진 결과를 일단 현실 그 자체로서 바라보고 출발해야한다는 태도 같은 거랄까.


2. 일단 주어진 상황을 받아놓고 보면 세 가지 서로 다른 방향의 물음이 남는다.

1) 현재의 선거결과를 두고 볼 때, 미국 유권자들의 정치적 결정에 어떤 요소들이 중요하게 작용했는가?
2) 현재의 선거결과, 즉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선거 및 미국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다수당이 된 상황으로 인해 이후 미국의 제도정치가 어떤 공적 결정들을 내리게 될 것인가?
3) 현재의 선거결과는 미국 사회 혹은 각 집단에 어떻게 해석될 것이며, 이러한 해석은 이후의 비공식적 정치행위·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달리 말해 미국인들은, 혹은 심지어 미국 바깥의 행위자들은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고 그로부터 어떠한 실천을 수행할 것인가?


3.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직접 영어권 기사를 뒤져보는 습관은 아직 없어서 이런저런 경로로 사람들이 추천·공유하는 글들만 보고 있는데,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아티클들은 다음 두 개다(이걸 공유해주신 지인께 감사).

1) http://www.pewresearch.org/fact-tank/2016/11/09/behind-trumps-victory-divisions-by-race-gender-education/
: 이 기사는 인종(흑인, 히스패닉, 백인), 성별(여성, 남성), 학력(대학[College] 학위)/백인+학력, 연령차(30세 미만과 65세 이상)와 같은 기준을 두고 민주당/공화당 후보 지지도 차이가 80년대 이후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간결한 그래프로 보여준다.

*아래 이코노미스트 통계를 같이 볼 것.
http://www.economist.com/blogs/graphicdetail/2016/11/daily-chart-5

*가장 상세한 뉴욕타임즈 출구조사통계: 인종, 거주지(도시 대 시골), 종교, 혼인여부 등이 눈에 띈다.
http://www.nytimes.com/interactive/2016/11/08/us/politics/election-exit-polls.html


2) http://www.theglobeandmail.com/news/world/us-election/the-average-trump-supporter-is-not-an-economic-loser/article32746323/
: 이 기사는 이전까지 많은 이들이 견지했던 해석, 즉 경제적 좌절과 세계화-자유무역의 피해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지지층의 핵심부라는 믿음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의 평균소득은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들 평균소득보다 높으며("well-off"), 또한 이민자를 접해봤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민자들을 일상적으로 접촉할 가능성이 낮은 지역에서 트럼프 지지율이 높았다("segregated").

우리가 두 번째 기사로부터 이끌어내야 할 교훈은, 단지 정치현상을 이해하는 주요한 해석이 틀렸다는 것만이 아니라, 기사 말미에서 암시되듯 사람들의 정치적 의사결정은 각자의 사회적 존재 자체로부터 바로 도출되는 게 아니며 오히려 그들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떠한 해석적 서사를 이끌어내는지와 같은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부터는 이야기와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이 작업할 수 있는 영역이 생기게 된다.


4. 공식적인 정치제도에서 앞으로 어떤 의사결정이 비롯될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아무도 쉽게 예측할 수 없을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는 과연 자신의 공약을 어디까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그가 일부 공약을 상당히 축소된 형태로 이행하거나, 역으로 매우 초과된 형태로 이행할 가능성은 없는가? 더불어 선거 직전까지 트럼프에게 비관적인 이들의 비율이 결코 적지 않았던 공화당의 양원 의원들은 트럼프의 정치적 행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내게는 이러한 물음을 다룰 능력이 없지만, 어쨌든 우리가 한동안은 쉽게 전례를 찾기 힘든 불확실성 하에서 살아가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오히려 내게 좀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앞서 제기한 세 번째 물음, 즉 선거결과 자체가 미국 내외의 각 행위자들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또 어떤 반응을 야기할지를 바라보는 일이다. 많은 사회적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투표에는 복수의 요소들이 매우 복잡하게 작용하며, 이번 미국 대선은 특히 더 그런 듯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현상의 복잡성이 증대될수록 역으로 사람들은 더욱 단순하고 명확한 해석적 서사를 만들어내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이번 트럼프의 승리 혹은 트럼프 지지자들이 자신들이 "다수"임을--총 득표율 자체는 클린턴이 앞섰지만--확인하는 과정이 미국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속한 각각의 행위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브렉시트 이후 인종주의 혹은 외국인 배타주의가 점차 공공연해지고 있는 영국의 전철을 미국이 그대로 밟을 것인가?

유학 중인 친구들의 반응을 볼 때, 외국인들을 포함한 비주류 집단에게 더욱 큰 두려움을 주는 것은 트럼프가 내릴 정치적 결정 그 자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승리자고, 다수며 이제 마음껏 공개적으로 날뛰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범람 가능성이다--사람들은 정치인 못지 않게 이웃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국의 비/제도적 영역이 이러한 움직임을 어떻게 제어하고 결국에는 극복할 수 있는지가 이후에도 중요한 이슈로 남을 것 같다.


5. 나를 포함해 내 주변 한국인 관찰자들의 호기심은 브렉시트 결정-트럼프 당선을 보며 우리가 무엇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지를 건드리게 될 것 같다. 즉각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반응은 브렉시트 찬성·트럼프 당선을 그 자체로 비합리적인 결정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두 번의 투표를 직접민주주의·대중민주주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히나 민중주의 전통의 강한 영향력에 대한 반감 및 '합리적인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노인 투표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 즉 교육받은, 보다 냉소적인 젊은 세대에서 이러한 해석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실제로 브렉시트 때 적지 않은 트위터 유저들은 이를 "교육받지 않은 나이든 이들의 결집" + 직접민주주의의 결합물로 받아들이는 해석을 제시했다). 최근 한국의 정세에서 비합리성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져 있음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적어도 일부의 한국인들에게 비합리적 군중 VS. 합리적 제도정치,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반지성주의 대 합리주의의 도식이 기본적인 프레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며, 후자가 어떻게든 전자를 견제해야 한다는 (손쉽게 엘리트주의적 입장으로 옮아갈 수 있는) 태도가 더욱 강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 정 반대편에는 (여성혐오 및 반다문화, 반민주주의적 이유로 트럼프를 지지하는 일베 유저들을 제외하면) 바로 트럼프의 승리를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저항과 반발의 결과로 해석하는 입장이 존재하며, 대표적으로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었다면 트럼프를 꺾었을 것이라는 이재명 성남시장의 발언을 꼽을 수 있겠다(http://www.nocutnews.co.kr/news/4682416). 샌더스의 주요한 구호이기도 했던 "1% VS. 99%"으로 집약되는 이러한 입장은 힐러리를 포함한 미국의 전통적인 정치 엘리트들은 현재의 자본주의/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유지에 공모할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 대항하는 '진정한' 대중민주주의정치만이 우리를 더 나은 사회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한다--이러한 체제비판적 좌파의 해석틀은 근본적으로 유사한 사고구조를 공유하는 한국의 민중주의자들에게 어떠한 위화감 없이 수용될 수 있었다. 물론 이번 선거득표결과를 신자유주의 대 (비록 트럼프가 잘못된 선택지라고 할지라도) 새로운 대중정치에의 갈망이라는 대결구도보다는 오히려 다양성에 기초한 체제재구성의 지속 대 백인 중심의 "위대한 미국"이라는 전통적인 이상향의 복원요구 사이의 충돌로 설명하는 게 좀 더 설득력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해석이 현실에 부합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이러한 해석틀을 통해 트럼프의 승리를 기존의 정치체제를 대체하는 혁신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근거로 삼는 목소리 또한 쉽게 잦아들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공론장에 자리를 할당받지 못할--적어도 두 입장의 지지자들은 적극적으로 그러한 사태를 막고자 할 것이다--일베와 같은 정치적 스탠스를 제외하면, 앞으로 두 입장은 지속적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합리적 제도정치의 지지자들에게 민중적 민주주의 지지자들은 실제로 트럼프 지지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퇴행적 반지성주의에 가깝게 비춰질 것이며, 역으로 후자에게 전자는 불평등의 근본적인 혁신을 거부하는 엘리트 과두정의 지지자들로 보일 것이다. 현재까지 박근혜 대통령-새누리당 지지자들이라는 보다 전통적인 보수층의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연합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양자 사이에는 실제로 쉽게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으며, 이번 미국 대선 결과에 대한 해석은 그러한 차이를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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