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초 일기. 독서기록, 전문분야로서의 근대학문.

Comment 2016. 2. 11. 22:43
1.

그동안 책세상판 루소 전집 <사회계약론 외> 레닌의 <국가와 혁명>(한번 더 봐야 할 것 같다), 뢰비트의 <역사의 의미>, 리돌피의 <마키아벨리 평전>을 다 읽었고, 강정인 선생이 편역한 <마키아벨리의 이해>에서 스키너의 글과 <만드라고라>를 보았다. 지난 주말에는 <로마사 논고>를 마지막까지 읽었다. 세미나로는 칸토로비츠를 읽고 있고...두 번째 세미나는 근대 공화국의 이념과 가부장제라는 주제로 아마도 두 달 간 제임스 해링턴(James Harrington)을 읽을 것 같다(푸코 <성의 역사> 2,3권을 앞에 낑겨넣을까 고민 중이다...). 그 틈새에 2월말까지 마감인 글 하나를 쓰면서 보댕(<국가에 관한 6권의 책>)을 읽으면 이번 방학이 끝나겠네. 사실 글쓰기를 위해 자료리딩을 시작해야 해서 보댕을 과연 읽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연휴 간에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계몽" 편과 "노동/노동자" 편을 보았다. 이걸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한국어 번역본은 한번씩 다 훑어본 셈이다. 물론 기억 속에서 이것들은 사라질 것이며, 그때 그때 필요한 것만 다시 찾아 읽을 수 있을만큼만 기억하기를 희망한다.

이남희의 <민중 만들기> 한국어판을 읽었다. 나와 이전 세대의 단절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실감하고 있다(엊그제 다른 일로 만난 분이 이 책에서 기록한 사건의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최규석의 <송곳>이 매우 달리 읽힐 것 같다. 이 주목할 작업은 80년대 중후반의 노동자 문학에서 묘사되는 지식인-노동자 구도를 변형승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학 중에서도 이 텍스트의 방법론은 문화연구라고 할만한데, "이론"의 개념들이 튀어나오는 것에 여러 가지 기분이 교차한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서 몇몇 대목을 찾아 읽었다. 이영훈 선생과 박지향 선생의 글이 내 관심사고, 이것들은 레토릭의 차원에서 아주 흥미로운 분석대상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읽을 뉴라이트들의 글에 비하면 이것들은 아주 정갈하고 차분한 글이리라 생각한다.

틈틈이 보댕을 읽고 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속도가 다를 것 같은데, 어차피 나는 전공자가 아니니까...말달리듯 읽기로 마음 먹었다. 사상사가들이 매우 짜증났을 이유를 알겠다. 아카넷의 편집은 때때로 불만스러운 구석이 있다.

영화 <윈터스 본>(Winter's Bone), <맥베스>, <인사이드 아웃>, _Man Up_,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을 보았다. 정말로 미국적인 영화 WB, IO와 한국적인 정치범죄물의 집성같은 <내부자들>에 관해선 언제고 짧은 코멘트를 남길 기회가 오기를.

사실 몇 주 전에 <정치신학>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바울의 정치신학>을 다 읽었는데 시간이 없어 정리를 못하고 있다. 보고서 쓸 것도 있고 해서 정리를 해야하는데...그새 기억이 가물하다.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오른손목에 압박붕대를 감고 냉찜질을 하고 있다. 골절은 아닌데 인대손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자고 일어나야 할듯. 왼손만으로 손전화 qwerty 키보드 타이핑하는 건 쉽지 않다.

설 이후로 두 달 짜리 알바가 하나 더 들어왔고, 그 뒤는 어떻게 될 지 아직 모르겠다. 장학금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2.

키배 하나를 죽 훑어 따라 읽고 있는데, 분명 본인도 전문가급으로 공부한 사람이 19세기 후반 이후 가장 폭발적인 성장을 해온 학문분야 하나의 전문성과 분업체계, 그리고 양자의 결과물로 생겨난 거대한 지식 축적물의 복잡한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서 솔직히 놀랍다. 물론 전문성과 분업체계, 그리고 양적 축적이 반드시 어떤 학문분야의 유효성을 선험적으로 증명하는 건 아니지만--그러나 선험적으로 스스로의 유용함을 증명할 수 있는 근대학문분과가 몇이나 있을까--, 그러한 과정을 거친 학문분과는 외적/내적 비판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합리성을 획득하며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과 고유의 합리성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한 필드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러한 합리성에 기초하여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다른 전문가의 사유 또한 그러한 역량을 획득하기 위한 훈련의 결과임을, 나아가 그것이 고유한 합리성 혹은 지적 축적물에 기초한 것임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연구자가 다른 필드의 연구자에게 예의를 갖추는 까닭은 속물적인 예의범절의 산물이 아니라 상대의 뒤에 축적된 합리성=지적 축적물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다.

애초에 한국에서 학문분과 하나의 무게를 오롯이 느낄만큼 공부해본 사람들이 등장한 게 비교적 최근 일이라, 그런 경험을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근대학문에 대해 마음대로 코멘트하는 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그런 비판 중에 맞는 것도 있고). 그러나 공부를 적지 않게 해본 사람들조차 왕왕 근대학문의 역사를 매우 단순화된 형태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학문과 그 종사자들이 그 근대적인 형태로서, 하나의 거대한 지식생태계로서 온전히 대우받는 날은 아직도 멀지 않았나 싶다.

P.S. 사실 학문의 전문성과 근대학문의 역사 및 성격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게 되는 건 다른 무엇보다도 내 전공이 끊임없이 다른 이들에게 전문성을 의심받는 분야인 탓도 있다. 물론 현대 영문학은--더군다나 한국의 영문학은--인문학의 여러 분과 사이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경로를 걸어왔고, "문학" 분과의 특성상인지 모르겠으나 심지어 그 종사자들이 스스로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professionalism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게 예를 들어 "지적 사기" 사건이 소비되는 방식처럼 되도않는 수준의 비난을 정당화하도록 해주지는 않는다--사실 소칼 케이스가 활용되는 사례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는 지점은 전문적인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자기 못지 않게 훈련받은 사람들을 어떠한 고민도 없이 손쉽게 멍청이들로 매도한다는 상황 그 자체다. 어쨌든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맥락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좀 생각해보며 삽시다, 가 오늘의 뻔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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