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교과서, 개념어, 일상어 문제에 대한 코멘트
Comment 2016. 1. 29. 17:15한국 수학교과서에 대한 서화숙 기자의 발표문(http://m.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7820)을 읽고 간단한 코멘트.
"영어로 ‘무리수’는 irrational number입니다. 즉,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숫자라는 말입니다. 유리수는 rational number 즉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숫자를 의미합니다. 그렇죠? 영어 사용 국가 사람들은 자기 나라 말인 영어를 이해하면 수학 용어도 이해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말을 이해하면 수학 용어를 충분히 이해합니까? ‘유리수’, ‘무리수’ 라는 말을 일상 언어로 씁니까? 전혀 안 씁니다."
"아이들이 수학을 접할 때는 ‘숫자’라는 별개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렇죠? ‘숫자’와 ‘도식’이라는 별개의 언어를 익혀야 되는데 이것이 한국말로 되어 있으나 일상적인 한국말로는 알 수 없는, 말만 한국말이지 별개의 언어인 것입니다. [...] 일상용어에서 흔히들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오면 수학적 언어가 따로 있습니다. [...] "‘연산’이라는 말 우리 일상에서 씁니까?"
"‘인수분해’는 factorization 입니다. factor로 만들어 가는 것이 ‘인수 분해’다 그런 것이지요. 한국 아이들이 영국 가면 왜 수학을 잘합니까? 수학의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용어의 벽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학적 특수 용어의 장벽이 없으니, 수치만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근’이라는 말도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근’이라는 말 언제 씁니까? 수학계에서는 ‘해(解)’라는 말을 씁니다. 박경미 교수님, 죄송하지만 아까 계속 ‘해’, ‘해’ 말씀하시는데, 평상시 누가 ‘해’라는 말을 씁니까? 수학에서 일상용어하고는 전혀 다른 언어를 쓰고 있으니, 수학 지식보다 수학 용어가 더 어렵습니다."
------------------------------------------------------------------------------
1.
먼저 첫 문단은 위키피디아도 한번 안 찾아본, 지적으로 게으른 주장이다. rational number는 일상어 "합리적인"(rational) 이 아니라 라틴어로부터 기원한 ratio(비율, 비례)와 개념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말이다. 당연하지만 영어라고 해서 '일상어'만 배우면 알아서 개념어가 익혀지는 마술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서화숙 기자가 rational이란 '일상어'에 기초해 유리수를 엉터리로 해석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테니까. 거기도 라틴어, 불어권을 포함해 "순수 영어"(그런 게 있다면!) 바깥에서 들어온 어휘들이 있고 그게 개념어 구축과도 면밀히 이어져 있다. 단지 그 어휘들과 더불어 살아온 시간이 한국어 지식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날 뿐.
2.
두, 세번째 문단을 살펴보자. 수사학적 분석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서화숙 기자의 주장이 두 가지 주장의 결합물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그는 "한국말" "일상어"라는 두 개의 개념에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여기에 기초해 "외국말"로 된 "개념어"를 재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순우리말-일상어 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90년대 한국에서 "일본어 잔재" "불필요한 한자어"를 몰아내자는 주장 등과 결합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는 내 또래의 경우 아무도 모르는 순우리말을 일부러 찾아내서 사용한다거나, 순우리말로 이름을 짓는다거나 하는 유행으로 이어졌다. 민족주의 시기 유럽의 문헌을 접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유기체적 생명력의 이미지-민속/민중의 언어-국민형성으로 이어지는 민족(속)주의적 수사학을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인상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미르" "뫼" 같은 단어의 의미를 잊어버린지 오래 된 사람들이 이 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용(龍), 산(山) 과 같은 한자어 개념을 동원하면서도 여전히 순우리말이 더 직관적이고 이해가 쉬울 거라는 믿음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90년대의 언어-민족주의가 이데올로기로서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다면, 순우리말-일상어 주창자들이 영어권 어휘가 한국어에 파고들어 각종 일상적/전문적 개념어들을 대체하가는 과정에는 비교적 취약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순우리말-일상어 이데올로기가 유발한 가장 큰 효과는 (일본계든 아니든) 한자어 개념어가 서구권 개념어로 대체될 수 있는 근본적인 계기를 마련한 데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동안 정말로 일상어에 기초한 순우리말 개념어가 자리잡은 건 글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지 않을까.
지나가듯 덧붙인다면, 강한 민족주의적 감수성과 결합해 있었던 90년대 한국 진보-자유주의의 정치적 대변인들이 (미국으로부터 유입된) 신자유주의적 언어들에 너무나도 쉽게 굴복한 사실을 상기할 수 있겠다. 서화숙의 발표에서 영미권의 사례가 어떠한 비판적 자의식 없이 '선진국'으로 인용되듯이 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연구자조차도 영미권 자료를 읽는데 익숙하지만 90년대 이전 문헌을 읽는데는 몹시 힘들어하는 세대에 진입하게 되었다--바로 나 자신처럼 말이다.
3.
엄격하게 말하자면, 사실 일상어와 개념어의 대립구도는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게, 개념어가 사용되지 않는 '순수한' 일상적 대화는 사실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버스 카드 충전"은 일상어인가 개념어인가?). 서화숙 기자가 전제하는 구도를 풀어말하면 학적이고 전문적인 언어들과 그러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일반적인 사회화과정을 거치면 습득할 수 있는 언어를 상정하는 셈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상식적인 층위로 옮겨보자면 중고등학교 수학과정에서 사용되는 어휘들이 학생들이 익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어휘들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일견 타당해보이는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반문에 부딪힌다. 만약 일상어에 기초해 학적 교육의 용어를 대대적으로 수정한다고 했을 때, 폐기된 용어를 여전히 유의미하게 사용하며 개념 연결망의 일부로 받아들인 전문지식과의 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오히려 보통교육을 마친 뒤에 학적인 개념어들을 전부 다시 입력해야 하는 사태와 직면하거나, 최악의 경우 전문지식이 해당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경제적/문화적 자본을 축적하는 사람들만의 독점적 자원으로 울타리쳐지는 게 되지 않는가? 궁극적으로 개념어를 일상어에 접근시키려는 노력이 역으로 전문지식과 일상어의 괴리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반지성주의적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교과서 용어를 둘러싼 논쟁이 단순히 혼자 교과서를 읽고 스스로의 이데올로기를 투사해 (잘못된) 주장을 외치는 학부모 집단이나 교육실무기관 사이의 논의로만 국한되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 사회의 언어는 다양한 집단에 따라 필연적으로 분화되지만, 특히 지식과 가치의 언어들은 전문적이고 공적인 수준에서 일상적이고 사적인 수준까지 느슨하게나마 이어진 것으로 상정해야 한다. 특히나 근대사회에서 공적인 지식은 곧바로 사회적 발언권 및 권력의 배분과 직결되어 있기에, 보편교육과정에서 용어를 둘러싼 논의는 결코 독립된 의제일 수 없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학술장을 고려하지 않고 개념어 교육을 말할 수 없다; 일상어가 특권적인 위치를 갖는다는 이데올로기는 비판되어야 한다.
4.
덧붙이자면, 수학포기자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역사적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수학은 늘 어려운 과목이었지만, "수포자"란 말이 일상화된 건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첫째, 9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한자어 어휘가 급격히 일상어로부터 멀어졌다. 조금 더 중요한 두 번째 요인은, 200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중고등학교 내의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슬럼화된 인문계 고등학교"란 말이 보여주듯, 평준화의 반동으로 각종 자사고/특목고가 설립되고 거기에 자원과 우수한 학생들이 집중되면서 그 외의 학교들의 수업환경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종종 구타가 사라진 게 교권의 추락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교권의 추락"을 보여주는 사건들은 대체로 자원의 집중으로부터 배제된 학교에서 훨씬 더 쉽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요컨대 2000년대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함께 한국의 교육정책은 수월성의 키워드로 삼아 학교 사이의 격차화를 촉진했으며, 교총과 같이 격차화를 방조하거나 함께한 집단들은 유감스럽게도 주변적인 위치로 밀려난 학교에서 벌어지는 교육의 해체를 해결할 방법 따위는 찾아내지 못했다. 나는 수포자를 거론하는 목소리가 교과서에만 집중하는 대신 수포자가 어떤 계급에 속하며, 어떤 학교에 다니고, 그곳에서 어떤 교육이 벌어지는지를 진지하게 이야기해주길 바란다. 거기에서 무언가 새로운 대안의 구상을 시작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Comment' 카테고리의 다른 글
2월 초 일기. 독서기록, 전문분야로서의 근대학문. (2) | 2016.02.11 |
---|---|
전국청소년연합의 무상급식폐지운동: 한국우파 관변 시민단체에 관한 단평 (4) | 2016.02.01 |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법 추진안에 대한 비판적 논평 (2) | 2016.01.21 |
2016년 1월 16일 일기. 서울시향, 말러 교향곡 6번. (3) | 2016.01.17 |
2016 신춘문예 평론당선작들을 읽고: 어떤 글쓰기 유형에 관하여 (7) | 2016.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