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3일 일기. 대중정치의 문학적 심성
Comment 2015. 12. 13. 16:33* 약간의 편집을 거쳐 ppss에 게재되었다(http://ppss.kr/archives/63975).
정당 정치에 관해서는 딱히 귀띔해주는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유효한 코멘트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번 안철수 탈당과정에 관련된 논평들을 보면 마치 "유명한 걸로 유명한 사람"의 기사를 읽는 기분이 든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그에게 어떠한 정치적 자산이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몇 가지를 열거해보자. 1) 정치인 안철수는 현재 유의미한 당외 지지기반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2) 집단탈당 선언이 나오는 대신 그를 따라 탈당을 고려하는 의원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전망만 되풀이되는 상황은 새민련 당내에 그가 의견을 조율하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동반자 그룹이 존재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3) 지금까지 딱히 정치적인 판단력을 보여줄 일도 없었고, 늘 주창해온 "혁신"이 추상적인 강령 이상의 구체성을 띤 것도 아니다(탈당 기자회견문도 마찬가지로, 어디에도 구체적인 정치적 구상이 없다--개인적인 정념의 언어라면 모를까). 그럼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를 지지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문제에서 종교적 신념을 갖기에는 나는 지나치게 세속화된 인간이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그가 유력한 정치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은 다음의 요소들에 기인한다. 하나, 새민련의 지리멸렬함과 함께 그 반작용으로 "구태와 결별한 탈정치적 정치인"에 대한 순진한 환상이 고조되었던 2012년도의 대선정국이라는 정황적 조건. 둘, 기존의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유의미한 지분을 갖지 못했던 "시민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결집한 당외 지지기반. 그러나 대선 후 3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그는 더 이상 환상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으며, 결정적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기는커녕 그것을 유지하는 데도 실패했다--오히려 자신이 그 원천을 파괴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지금 그에게 정책적/정치적으로 유용한 조언을 제공하거나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집단은 남아있지 않으며, 다음 총선을 실질적으로 준비하고 운용해나갈 캠프 혹은 그걸 단기간 내 조직할 역량이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그의 '영향력'을 구성하는 것은 당대표 문재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새민련 내 자칭 "비주류"의 선택에 따른 기대감 뿐이다. 내가 (안철수보다 파트너로서는 신뢰감이 갈) 천정배의 호남신당에도 합류하지 않은 "비주류"라면, 탈당을 선택했을 때 굳이 안철수와 함께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부터 고려할 것이다. 만약 기존에 탈당한 세력과 어떠한 합의 없이 혼자 떨어져나간 것뿐이라면--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정황은 그런 것 같다--지금 안철수와 합류하는 건 (압도적인 지역구 통제력을 이미 확보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상 자멸행위에 가깝다. "비주류" 의원 2-30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겠지만, 그런 결집력이 있었다면 이미 벌써 무언가를 보여줬어야 했다. 설령 그런 집단이 향후 출현한다고 해도 안철수에게 이미지 개선 이상의 실질적인 조타수 역할을 맡길 이유는 없다(냉정한 관찰자라면, 안철수에게 정치적 리더로서의 역량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이미 새민련의 지지자들이 안철수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듯이, 탈당과 함께 "새민련에서 밀려난 찌꺼기" 취급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에서 유력한 행위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이는 역설적이게도 문재인이다. 최근 혁신전대 수용을 둘러싸고 전국 지지율 및 호남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한 결과를 해석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겠지만, 내게는 한국 특유의 '대마는 살려야 한다'는 의식과 함께 '고립된 상황에서 강력한 결단력을 발휘하는 지도자'에 대한 미적인 애호가 엿보인다(좋든 싫든 우리는 정치현상 또한 그것이 일종의 문학적 서사인양 이해하고 반응한다). 문재인이 안철수의 다소간 억지스러운 요청에 거부의사를 명백히 표현할 때 사람들의 지지가 올라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약간 씁쓸함을 섞어 말하자면, 물론 통합된 지도력의 부재를 두고두고 한탄해온 야권 지지층 정서를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지만, 진보적 스탠스를 자처하는 사람에게조차도 "강력한 지도자"에게 이끌리는 지극히 한국적인 심성은 예외가 아니다. 상당히 세련된 기술을 요구하기는 하겠지만, 문재인이 현재 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더욱 '강하고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면 이것이 역설적으로 그의 야권 내 헤게모니를 본격화하는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그가 대중적인 여론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한다면, 비주류는 더더욱 탈당을 감수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문재인의 호남 지지율이 높은 상태에서 비주류가 "호남 민심"을 따르겠다며 탈당으로부터 물러서는 모습을 보라.
마키아벨리적으로 보자면, 좋든 싫든 운에 대항하여 힘을 발휘할 기회는 그에게 주어졌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대선 이후로 심지어 이슈메이킹에서조차 새누리당에서 밀려 조연의 위치만 차지하던 새민련이 여론의 중앙으로 들어오게 된 것을 반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 무대 한 가운데는 몇년 안에 처음으로 주인공이 될 기회를 잡은 문재인이 마치 수 년 간 무명생활 끝에 우연히 대타로 주연을 맡게 된 배우처럼 서 있다. 그가 정치감각을 갖춘 존재라면, 모두가 그의 대응을 주목하고 있을 지금 이 순간에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느냐가 향후 수년 간의 정국을 바꿔놓을 수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 진행 전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대중정치는 여전히 정책의 효과와 같은 실효적인 지점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이미지와 연결되는지, 어떻게 서사화되는지에 상당히 깊게 의존한다. 안철수의 탈당과정 역시 그 예외는 아니며, 막연한 전망기사만이 난무할 뿐 그것이 갖는 의미는 입장을 떠나 유용하게 참고할만한 분석기사는 거의 나오지 않는 상황은 기자들조차도 한국정치를 둘러싼 문학적 심성에서 예외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서사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복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치에 대한 문학적인 분석이 가능해지는 건 물론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의 전부처럼 작동하는 상황이 마음 편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정치적 현실이 필연적으로 허구적 서사처럼 이해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그 서사 너머의 것이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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