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 꿈. 형식의 이데올로기.

Comment 2014. 6. 12. 20:15

수면패턴이 제대로 꼬여서 오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뻗어있었다. 까치(?) 울음 소리가 몹시 거슬려서 더위에도 불구하고 자다 깨어 창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희한한 꿈을 꾸었다. 누군가와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었고, 나는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음을 깨닫자 마자 내 삶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같이 있는 사람을 보며 "이건 꿈이 아닐까"라고 몇 번이고 혼자 질문하다가, 내가 잊어버리고 있던 다른 수많은 의무들이 점차 떠오르고 지금의 행복한 시간이 그것들과 어떠한 연결도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결국 슬프게도 지금 이 순간은 꿈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곁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그가 반은 의아해하면서, 또 반은 미소지으면서 자신 역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중인 것 같다고 답했다.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함께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심지어 자신의 전공도!); 그러나 내 이름을 그에게 알려준 것 같지는 않다. 깨어 점차 꿈 속의 기억들이 잊혀지는 와중에도 그 이름만을 잊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역시 쉽게 있을 수 있는 이름 자체가 아니다(무심코 페이스북 이름 찾기에 적어보니 외국인들의 명단이 뜬다).


지금까지 살면서 꿈을 딱히 많이도 적게도 꾸지 않았고 기억하는 사례도 드물지만, 꿈 속의 인물이 자신 또한 꿈을 꾸고 있으며 이 만남이 서로의 꿈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스스로의 사실성을 호소하는 경우는 처음 겪었다. 마치 자신이 지금 상황을 자각하고 있다는 제스처만으로도 그 순간 그의 존재가 얼마나 실재처럼 믿겨지는지. 이데올로기로 치면, 스스로 메타 레벨에 있음을 호소하면서 자신이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설득하는 형식의 이데올로기랄까(...자유주의인가?!). 생각해보니 근대의 종교비판 이후 주요한 이데올로기들은 대체로 "내용"을 가진 것들을 비판하고 스스로를 내용이 아닌 형식의 차원에 위치시키면서 정당성을 취득했던 것 같기도 하다(예컨대 슈미트가 읽어내는 홉스라든가, 자유주의라든가, 실증주의라든가 등등...). 테일러가 근대를 "세속의 시대"Secular Age라고 불렀다면, 세속의 이데올로기들은 내용과 형식의 분리와 함께 스스로를 메타레벨로서의 형식에 위치시키면서 진리값을 획득한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어떤 면에서 (자유주의-소비주의와 결합한) 속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튼 오랜 습관대로 꿈을 복기하면서 그 꿈을 이루었던 소재들이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나 자신의 욕망이 어떤 재료를 취했고 그 재료의 포장을 조금씩 벗겨내었을 때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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