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브레너 외. 『농업계급구조와 경제발전: 브레너 논쟁』

Reading 2014. 4. 9. 05:21

로버트 브레너 외. 『농업계급구조와 경제발전: 브레너 논쟁』. T. H. 아스튼 외 엮음. 이연규 역. 집문당, 1991. Trans. of The Brenner debate : Agrarian Class Structure and Economic Development in Pre-industrial Europe, eds. by T. H. Aston and C. H. E. Philpin, NY: Cambridge UP, 1987.


20세기 후반부의 장기불황을 둘러싸고 1990년대 후반부터 신 브레너 논쟁이 벌어지기 전,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중세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봉건제로부터 자본제 사회로의 이행 혹은 자본주의의 출현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구 브레너 논쟁이 있었다. 조금 더 빨리 출간된 이 책의 또 다른 국역본 『신 자본주의 이행논쟁』은 브레너 논쟁을 1950-60년대 모리스 돕Maurice Dobb과 폴 스위지Paul Sweezy 간의 논쟁으로부터 벌어진 "이행논쟁"Transition Debate의 계승으로 간주하며, 원저에 붙은 로드니 힐튼의 서문도 브레너 논쟁의 이러한 성격을 강조한다. 힐튼의 서문 대신 역자들의 해설이 붙은 후자와 원문의 서문을 그대로 옮겨놓은 전자는 번역에 있어 큰 차이는 없다. 다만 두 판본의 앞부분을 대조해본 결과 개인적으로 집문당 판이 조금 더 매끄러운 문장으로 텍스트를 옮겨놓아 선택하여 읽게 되었다. 용어들을 조금 더 맑스주의 경제사의 관점에서 읽고 싶다면 후자를 골라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의 흐름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로버트 브레너가 1974년 프린스턴 대 부속 고등연구원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의 사회과학 세미나에 "전산업시대 유럽의 농업계급구조와 경제발전"("Agrarian Class Structure and Economic Development in Pre-Industrial Europe")이란 글을 발표한다. 여기에서 브레너는 중세말~근대초 유럽경제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해석하는 당대의 주요한 두 흐름, 곧 상업주의적 해석--경제체제의 변화는 상업발달의 산물이다--과 상업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며 나타난 신 맬서스주의적 해석--인구변화에 주목하는--양자를 비판하면서 농민들과 영주 사이의 계급갈등구조("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를 유의미한 변수로 간주할 때에야만 비로소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브레너는 '상부구조'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네오맑시스트로 간주되기도 한다. 브레너의 이의제기가 한편으로 인구변화에 주목하는 거물들, 곧 케임브리지의 마이클 포스탄Michael M. Postan(홉스봄보다 한 세대 정도 위)과 아날 3세대의 대표주자 에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Emmanuel Le Roy Ladurie(국내에는 <랑그도크의 농민들> <몽타이유>가 번역되어 있다)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고, 동시에 브레너의 논지가 기본적으로 영국-프랑스-독일-동유럽 간의 비교사적 관점을 통해 얻어진 서로 다른 결과에 근거한 것이었기에 비판 받은 이들은 물론 프랑스의 (상대적으로 "정통적인") 맑시스트 기 부아Guy Bois(<봉건제의 위기>The Crisis of Feudalism이 영역되어 있다)를 포함한 프랑스/동유럽의 경제사가들까지 브레너에 대한 반론 및 논평에 참여한다. 비판 및 논평에 대하여 브레너가 좀 더 구체적인 해석과 폭넓은 자료를 통해 반론에 답변하며 원래의 논지를 그 방향전환 없이 심화시킨 결과물이 1982년 Past&Present 97호에 발표한 "유럽자본주의의 농업적 뿌리"(“The Agrarian Roots of European Capitalism”)로, 책의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다. 만약 논쟁을 세세하게 따라가는 대신 브레너의 입장과 커다란 논지만을 참고하고 싶다면, 힐튼의 서문과 함께 브레너의 비교적 짧은 첫 글과 제법 긴 분량의 반론글만 읽으면 된다.


(http://understandingsociety.blogspot.kr/2010/01/brenner-debate-revisited.html (영어홈페이지)에서 간략한 논쟁사를 소개하긴 하는데, 마지막 결론--단일 원인이 아니라 원인의 복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는--은 작성자가 이 논쟁을 충분히 이해하며 따라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애초에 이 논쟁에 참여한 누구도, 가장 고령자에 속할 포스탄을 포함하여, 자신이 단일한 원인을 지지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상식론으로 논쟁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가려버리는 무익한 결론이니 걸러서 보길 바란다)


(보다 상세하게 논쟁의 이모저모를 뜯어보는 글은 http://www-personal.umd.umich.edu/~delittle/brenner.htm 를 참고할 것)



브레너 논쟁의 기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된다.


 첫째, 중세부터 근대 초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맬서스의 덫"Malthusian Trap이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기술이 정체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타난 인구의 증가는 그 주기의 상향국면에서 노동력에 비해 토지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공산품에 비해 식량가격을 상대적으로 높이며, 일인당 생산량을 하락시키는 (이는 이따금 노동생산성의 하락으로 해석된다) 결과를 낳았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인구과다는 그 자체를 교정하고, 결국에 가서는 인구동향을 역전시키며, 그리하여 다시 토지에 대한 노동력의 비율과 제 요소들의 상대적인 가격에서 정반대되는 추세가 나타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하향국면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처럼 두 국면으로 이루어지는 주기적인 패턴은 중세말(1100~1450)에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 경제를 지배했으며, 근대 초(1450~1700)에 들어와서도 유럽 대부분의 지역들에 걸쳐 줄곧 지배적인 패턴으로 남았다"(브레너, 300). 즉 생산력에 비해 인구가 모자랄 경우 인구는 계속해서 증대하다가 생산력의 한계지점을 넘으면 다시 감소하는 패턴이 반복되었고, 이것이 18세기-19세기에 확실하게 분쇄되기 전의 유럽은 일종의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맬서스가 이러한 '법칙'을 발견하고 이론화한 시점(1790년대의 "인구론")에서 유럽은 이미 맬서스의 덫을 깨트리고 인구증가를 지속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둘째, 16-17세기를 거치면서, 특히 영국에서 이와 같은 봉건제-상업화가 진전되지 않은 농업-맬서스의 덫이 깨지며 "자본주의적 귀족이 등장해 농업혁명을 이끌어가"기 시작한다(브레너, 406). 즉 영국의 대토지보유자들은 늘어난 생산량을 바탕으로 상품작물에 대한 투자를 심화시키면서 자본주의적 차지농들과 함께 상호경쟁적인 '자본주의적 농업'을 실시하고(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부분적으로 이러한 사실의 편린들이 나타난다...특히 <에마>Emma를 볼 것), 과거의 농민계급들은 점차 산업예비군화 하여 도시 등에서 공장을 위한 노동력으로 기능한다. 늘어난 생산량과 함께 세계시장으로서의 영국의 위치는 증대한 인구를 계속해서 먹일 수 있는 식량공급에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국 사회 전체의 총소득/총인구의 증대를 가져온다(18-19세기에 널리 퍼진 "감수성의 문화"culture of sensibility는 부분적으로 이러한 경제적 조건 위에서 소비주의가 발달하면서 가능했다; 영국의 인구는 1450년의 220만 가량에서 1700년에 500만을 넘어서고 있다(431)). 즉 이후 19세기부터 본격화되는 산업혁명 및 소득증대를 위한 제반 조건(제조업생산 및 위기상황에서 경제수준을 지탱시킬 수 있는 내수시장의 성장을 포함한)이 이 시기부터 갖추어져 일종의 선순환구조를 형성한 것이다. 반면 프랑스의 경우 18세기까지 사실상의 인구정체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농민계급이 여전히 강력하게 존속하여 "프랑스의 경제적 후진성"과 같은 용어까지 사용되기에 이른다. 맑스가 프랑스 혁명 3부작, 특히 <브뤼메르 18일>에서 묘사하는 루이 나폴레옹의 성공은 이러한 농민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동유럽은 영국/프랑스에서 무너지고 있던 농노제가 15세기부터 다시 강화되면서 (이른바 재판농노제second serfdom) 서유럽을 위한 곡물수출기지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한다.


 즉, 맬서스의 덫이 왜, 어떻게 깨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국가의 전개가 이토록 상이했는가, 왜 각 국가 및 지역은 근대적 자본주의에 서로 다른 형태로 입문하게 되었는가를 어떻게 해명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브레너의 주장이 시작된다.


 "영주와 농민 사이의 잉여착취관계가 얼마만큼 강력했는가가 농민에 기반을 둔 경제 및 인구의 팽창가능성을 제한하거나 증가시키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및 "17세기 말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어 있었던 서로 다른 사회적 생산조건들이 영주의 수입을 가장 잘 보호하고 더 나아가 증대시킬 수 있는 전략을 서로 다르게 결정지었다"는 브레너의 주장(426)은 단순한 경제적인 요소 이외의 경제외적 관계를 포함한 계급구도가 각 지역별로 상이했다는 사실을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한다. 각국의 차이는 직접적으로 생산 및 소득증대의 요구에 직면한 대토지보유자/영주들이 소토지보유자/농민들로부터 토지를 얼마나 수월하게 획득할 수 있느냐에 기인한다. 즉 프랑스의 경우 국왕의 중앙집권적 권력의 강화를 위한 사법적 개입 등을 통해 영주와 대비할 때 상대적으로 (세수확보의 기본이 되는) 농민들에게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었으며, 더불어 농민토지의 관습적 보유가 소유권에 가깝게 인정됨으로써 (자신들끼리도 경쟁관계였던) 영주들이 토지 자체를 더 많이 획득하여 대규모 농지경영자--자본주의적 농업의 기초가 되는--로 탈바꿈하는데 실패한다; 절대주의 왕정의 성립에서 봉건영주들이 점차 중앙정부의 귀족-공무원으로 변모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13세기에만 해도 프랑스보다 인구밀도가 낮았던 영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영주들의 결속력이 튼튼했을 뿐만 아니라 왕의 사법권도 비교적 영주에 우호적이었다(자유민이 아닌 예속농들은 사실상 토지보유와 관련된 재판에서 이길 수 없었다). "...최상위 주군으로서 영국 국왕이 그를 에워싸고 있으면서 그들 스스로가 그 자신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던 제후들과 체제상 본질적으로 대립된 관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종종 인식되어왔듯이 거의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이례적으로 강력한 왕권은 유럽에서 가장 고도로 발전된 봉건국가에서 계서적으로 조직되어 있던 이례적으로 강력한 귀족을 반영한 것이었다. 국왕정부는 사실상, 영주들이 그들이 서로 공통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었으며...농민들을 성공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도 그들 서로간의 관계를 규제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다소간 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었음을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에서 강력한 국왕국가가 성장해나왔음은 "단순히 정치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영역에서 가장 효율적인 "축적"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사회적인 계급관계의 형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50). 다만 농민들의 이주 및 조직적인 저항 등으로 그들을 직접적으로 수탈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영주들은 (공유지 소유권의 이전을 포함해) 토지보유 자체의 확보를 늘리고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는 영주와 대규모 차지농의 "보다 생산적이고 보다 협동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426). 대토지보유, 생산량증대, 환금성 상품작물에의 투자--이것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인클로져("울타리 치기") 운동, 혹은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와 같은 문구들에 반영되어 있다. 동유럽의 경우, 특히 엘베 강 동부의 농토들은 서부로부터의 계속되는 식민작업을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계급결속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영주들의 권력이 매우 강했다. 지속적인 농민반란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농민들의 저항이 효력을 발휘한 엘베 강 서부와 달리) 엘베 강 동부지역은 농노제가 다시 등장하면서 아예 영주의 농민에 대한 인신적 지배 자체가 강화된다.


중세 말부터 근대 초까지 상세하게 각 시기별/지역별 차이를 추적하는 이 논문을 간편하게 요약할 수는 없다. 대신 프랑스와 영국의 전반적인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다소 긴 부분을 인용한다.


"...튜더 시대 동안에 등장한 국가는 결코 절대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상업적인 영주와 자본주의적 차지농 그리고 임금노동자의 세 계급으로 이루어진 새로이 대두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계급구조를 주도함으로써 지대상승으로부터 이익을 얻어낼 수 있었던 영국의 토지소유계급들은 잉여를 착취하기 위해 직접적인 경제외적 강제에 의존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또한 그들은 정치적 수단(세금징수/관직과 전쟁)을 통해 잉여를 수탈하는 장치로서 국가가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이 적어도 대내적 차원에서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질서를 바로 잡고 사적 소유권을 보호하며 그리하여 계약을 기반으로 한 경제적 과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보장해 줄 값싼 국가cheap state였다. 그들은 16세기와 17세기가 지나가는 동안에 (본 논문의 서술영역을 훨씬 넘어선 과정들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부에 대해 중앙집중화된 통제를 가할 수 있도록 해주는 특수한 기구로서 의회를 강화시키고, 국가의 관직이 무엇보다도 지방적인 차원에서 늘어나지 않도록 점점 더 강력하게 억제함으로써 바로 이러한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사실상 17세기 말부터 줄곧 세금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 그러한 세금들이 국왕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던 덕분에 이제 확고하게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토지소유계급에 의해 그 자체의 구성원들에게 부과되었다는 점은 실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프랑스에서 나타난 상황과 뚜렷하게 대조되는데 프랑스에서는 지배계급에 속해있다는 한 가지 징표만으로 국세가 면제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국가가 본질적으로 귀족을 위해 부를 제공해주는 정치적인 장치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영주계급이 농민들을 이미 몰아내고 있었으므로 대부분 "비개인적"이고 "경제적"인 과정들--자본주의적 차지농들이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것, 그리고 또한 특히 농업부분에서 차지농들 사이에서, 하지만 경제 전반에서도 자본가들 사이에서 내부적으로 경쟁이 벌어지는 것--의 작동에만 의존해도 충분하였다.

요컨대 영국에서는 농업자본주의를 향한 발전이 17세기 말에 이미 "경제적인 요소"와 "정치적인 요소"의 유서깊은 "혼융"을 끝장내고 있었으며, 국가와 시민사회를 제도적으로 분리시켜놓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노동생산성의 향상으로 뚜렷하게 드러났던 경제발전을 향한 돌파가 이루어지는 것과 더불어, 부를 쌓는 일은 봉건적인 사회적 생산관계 아래에서 그랬던 것처럼 본질적으로 서로 먹고 먹히기가 아니게 되었다. 한편 엄밀하게 한정된 사회적 생산물을 재분배하기 위해 군사력을 축적하고 또 직접 사용하는 것도 더 이상 지배계급의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게 되었다. 영국의 발전은 대륙의 대부분 지역에서 나타난 발전과 두 가지 서로 관련된 결정적인 측면에서 이미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귀족이 등장해 농업혁명을 이끌어가고 있었다는 점으로 분명히 특징지어졌던 것이다" (브레너 404-06).


"17세기에 영국의 경제는 그것이 옛 맬서스적 한계들 너머로 인구를 계속 증가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전통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수출을 위한 직물산업이 위기와 정체를 맞이한 데 직면하여 산업과 경제 전반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대륙에 있는 모든 다른 나라의 경제와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다. 영국 산업의 지속적인 팽창은 어쩌면 원래 직물수출로부터 힘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궁극적으로 농업생산의 지속적인 탈바꿈에 뿌리를 둔 내수시장의 성장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와 서부 독일 그리고 동부 유럽 전역에 걸쳐 제조업 생산이 널리 하락한 데는 바로 내수시장이--농업 생산성의 하락으로 말미암아 잠식당한 바람에--한정되어 있었고 또 쇠퇴해갔던 것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440).


"[네덜란드와] 대조적으로 영국의 경제에서는 근대 초에 국내에서 농업부문과 산업부문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를 발전시키면서 꾸준하게 성장해 나오는 양상이 나타났다. 17세기 두 번째 사반세기에 이미 영국의 생산이 그 당시 팽창하고 있던 내수시장을 지향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전통적인 직물 수출업이 이 시대에 맞이했던 극적인 위기가 경제 전체를 비교적 작은 정도로만 교란시켰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위기는 대체로 수출을 위한 직물생산에 직접 관여하고 있던 지역들에만 한정되었고, 바로 이런 지역들에서는 그 위기가 높은 수준의 실업률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바로 같은 시기(1615~1640)에 수입업--상층계급을 위한 사치품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과일, 레반트의 건포도, 인디아 제도의 양념류 그리고 아메리카의 담배와 같은 폭넓은 범위의 소비재들까지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상품을 취급하는 수입업--은 상당한 정도로 성장했다. 이는 중산계급 그리고 심지어는 더 낮은 계급이 탄탄한 내수시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가리켜준다고 여겨진다. 이 시기에 곡물생산이 실로 남아돌면서 국가가 하락해갔던 현상은, 직물산업이 맞이한 위기의 영향을 크게 감소시켜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 동안에는 튜더 시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양말짜기, 레이스짜기, 아마포짜기 따위의) 산업들이 전반적으로 급속하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칼, 날붙이 도구들, 모자, 그릇 따위를 만드는) 다른 일련의 "소비산업"들도 빠른 성장을 보였다....거시 경제적인 동향들은 산업제품들에 대한 내수시장이 크게 팽창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더욱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구는 17세기 말을 거쳐 18세기에 들어서서까지 줄곧 증가하였고, 그와 함께 줄곧 농업으로부터 산업으로, 그리고 농촌지역으로부터 도시지역으로 옮아가, 런던뿐만 아니라 리버풀과 맨체스터, 그리고 버밍엄도 크게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곡물가격은 더 이상 상승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실질임금이 증대될 수 있었고, 그리하여 노동인구에게는 새로운 황금시대가 열렸다. 바로 농업이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는 소득을 증가시키고 그에 따라 구매력을 증대시켜주었던 덕분에 내수시장은 줄곧 팽창해갔다. 이리하여 산업은 농업에 힘임어 발전해갔고, 동시에 거꾸로 농업이 더더욱 개선을 이루어가도록 자극해주었다. 이와 같이 위로 향한 발전적인 순환은 산업혁명에 들어서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441-43).



우리는 브레너의 모델 상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1) 공시적인 층위에서, 브레너의 분석을 이루는 것들에는 아주 간략히 말해 최소한 인구-생산력-생산관계-세계무역이 포함된다. 이 중에서 생산력이 농업인구와 기술발달로 특정지어진다면, 생산관계는 국가적 사법-영주에 대한 농민의 저항수단-영주의 수탈수단-토지보유비율을 포함한다. 그리고 브레너의 기본모델은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영향을 끼치고, 생산력은 인구에 영향을 끼치며, 생산력과 인구는 다시 생산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등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일국단위의 설명에만 멈추는 대신 여러 지역단위의 상호작용에도 이어진다. 예컨대 동유럽의 곡물수출이 없었다면 영국은 생산성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정체국면을 그 정도로 효과적으로 돌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2) 통시적인 층위에서 브레너의 설명이 갖는 독특함은 특히나 계급대립에서 한때 특정세력에게 유리했던 내용이 반드시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님을, 또 한때 부정적으로 작용했던 요소가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논리구조에 있다. 예컨대 영국의 경우 도식화해서 설명한다면 경제외적 수탈 및 압박에 대한 농민의 강한 저항은 영주의 토지보유증대 전략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토지를 잃은 농민들의 소득수준을 부분적으로 보장하는 산업발전으로 이어진다. <붐 앤 버블>에서 나타나는 사태의 '변증법적' 진행과정이--그래서 브레너를 꼼꼼히 읽을수록 그가 수치로 나타나는 겉보기 이면에 진정한 맑스주의적 논리에 입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유사한 성격을 띤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브레너의 설명은 부분적으로 미시적인 요인들을 포괄하는 '정치경제학'적이다.


어쨌든 경제사를 전공하지 않은 나는 이와 같은 텍스트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특정한 시공간의 '정신'을 해명하기 위한 작업의 밑바탕으로 간주한다. 특히나 인구-생산력과 같은 요소에 자신의 분석을 한정짓지 않고 '상부구조'와의 상호작용과정을 추적하는 브레너의 입장은 경제사적인 요소, '물질적인 것'의 역사를 포괄한 '정신의 분석'을 수행하고자 하는 내게 흥미로운 가능성으로 남는다.


다음으로, 브레너의 또 다른 주저 중 하나인 <상인과 혁명>Merchant and Revolution 이 기다리고 있다. 청교도혁명 전후의 훨씬 좁은 스코프를 바탕으로 상인계급의 정치경제적 역할을 추적하는 꽤나 두꺼운 텍스트인데, 읽으면서 그 값을 할까 기대 반 걱정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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