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트무트 샤이블레. <아도르노> / 우도 틸. <로크> / 푸코의 홉스.

Reading 2014. 4. 6. 03:59

한길 로로로 총서로 나온 하르트무트 샤이블레Hartmut Scheible의 <아도르노>와 우도 틸Udo Thiel의 <로크>를 읽었다. 로로로 총서가 독일 로볼트 출판사의 것을 번역한 것이라, 저자의 이름들만 봐도 알 수 있듯 독일어로 씌어진 책이다(국역된 로크의 전기 중 학교도서관에서 검색되는 유일한 책이 독일인 저자의 책이라니, 한국의 로크 수용도 참 얇다면 얇은 셈인가?).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나름 주요저작과 이론적 쟁점을 전기적 사실과 함께 충실하게 전달한다. 샤이블레의 책은 유년시절의 배경과 프랑크푸르트 대학 시절 초기 한스 코르넬리우스와의 관계, 그리고 아도르노의 미국 시절(물론 최근 미국쪽에서 _Adorno in America_ 같은 책도 나오곤 했으니 샤이블레의 89년 텍스트에 손볼 지점이 없진 않을 것이다), 경험적 연구에 대한 입장 등에 관해서 한국의 다른 문헌에서 읽기 힘든 내용을 꽤 많이 제시한다. 저술들에 대한 짤막하지만 비평적인 진술도 흥미롭고. 다만 <부정변증법> <예술 이론>과 같은 최후기 저작이 너무 간단하게 폄하되면서 그것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거의 행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한 마디로 하자면 아도르노로 향하는 길을 걷는 독자들에게 몇몇 흥미로운 사안을 건질 수 있게 해주지만 텍스트 및 이론을 깊이 있게 숙고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짧은 책에 비해 그가 언급하고 있는 아도르노의 텍스트가 워낙 많아서이기도 하고. 아직 아도르노를 충분히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끈기를 갖고 따라온 입장에선, (모든 사상가들을 대할 때 마땅히 그래야 하듯) 누군가의 입장이 최종적인 답변을 제시해주는 경우는 아직까지 없었다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중요한 진술들, 모티프들을 제법 많이 건질 수 있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특히나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성향이 어쩔 수 없이 강한--항상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역설적으로 경험적 연구를 주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도르노로부터 무언가를 얻기란 해석적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에 비해 훨씬 어려우리라--그의 특성상 더욱 그러하다. 아도르노의 비교적 최근에 나온 전기는 Suhrkamp에서 나온 Stefan Müller-Doohm 이 쓴 두꺼운 책이 있다. 2003년에 나온 책이 2년만에 영역되어 나왔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한번 읽어보고는 싶다.


우도 틸의 <로크>는 무난한 입문서다. 그것이 역으로 로크의 중요성과 역할은 아도르노의 그것에 비할 때 이미 아주 많은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가리키기도 하고. 개략적인 전기 및 역사적 배경은 그 자체로는 대단찮아 보일지 몰라도 모르면 바보되기 딱 좋은 것들이기에 한번 정도 읽어두는 게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로크를 단순한 의미의 경험주의자로 간주하면 안 된다는 것, 그가 본래부터 휘그당의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젊은 시저에는 역으로 꽤나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지지했다는 것 등은 약간 주의깊게 읽을 부분이다. 원서가 90년쯤에 나온 책이니까 25년이 지나긴 했지만 크리티컬하게 낡지는 않았다고 봐도 될 거다. 래슬릿Peter Laslet 같은 사람의 논의도 언급이 되고...어쨌든 이 책보다 더 진지하게 파고들어간 로크의 전기는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인식론(<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통치에 대한 논의(<Two Treatises of Government>), 종교에 대한 관용론, 그리고 화폐정책에 대한 두어 편의 논문 정도면 대략 로크에 대한 상식적인 정리는 완결될 것 같다. 화폐 및 빈곤정책에 대한 로크의 입장은 놀랍게도 벤담을 예견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노동가치론의 원조격인 로크가 일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직접 해당 법 초안을 보면 좋을 것 같다. 아마 경험주의와 공리주의를 잇는 긴 끈을 그려내려는 나의 계획이 조금은 더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푸코와 홉스: <안전, 영토, 인구>에서 홉스를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부분들에 집중할 게 아니라, 사목-국가이성-조절권력(자유주의적 통치)로 넘어가는 통치성의 역사적 국면에서 푸코가 홉스를 국가이성의 대표적 텍스트 중 하나로 맥락화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대략 50년이 못 되는 시간 뒤에 씌어진 로크의 텍스트에서 더 이상 '국가'가 초점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과의 대비도. 이는 영국의 독특한 맥락, 즉 푸코가 "비교적 최근까지 국가이론 없이도 잘 통치하고, 통치되어온"(<생명관리정치>) 땅이라고 언급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로크가 종교적 관용과 관련해 국가의 역할을 신민의 영적인 인도, 푸코가 정확히 '사목'이라고 부른 기능과 분리시키지 않는 이들과 맞부딪혔음을 상기한다면, 17세기 중후반의 영국은 푸코의 틀로 본다면 사목-국가이성-자유주의적 통치의 맹아가 동시대에 공존하는 매우 흥미로운 공간이 된다. 푸코라는 프리즘을 통해 영국을, 그리고 홉스를 보는 것, 홉스를 자기완결적 텍스트로, 완결된 정치철학적 논의로 간주하는 대신 보다 넓은 맥락 안쪽에 위치시키는 것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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