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쓰기에 관한 일기 / 2월 12일

Comment 2019. 3. 3. 21:45

*2월 12일 페이스북에 올렸던 포스팅을 옮겨둔다.




서평 원고를 (초고 수준에서는) 마무리 했다. 원래 네 권을 다루려고 했는데 시간 + 지면의 한계로 세 권만 다루게 되어 무척 아쉽다. 빠트린 책인 마이클 하워드의 <전쟁과 자유주의 양심> 서평을 쓰기 위해 한국어로 번역된 하워드 책 대여섯 권을 전부 읽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역자 안두환 선생님의 무시무시한 노동투입--책 본문 분량만큼, 즉 200쪽 분량의 짧은 인명사전이 역자부록으로 추가되었다(...)--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라도 포함시키고 싶었는데...나중에 어딘가에서 다시 쓸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 거의 밤샘 작업에 가까운 힘든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마감 덕분에 제롬 슈니윈드의 <자율의 발명>(한국어로 1230쪽 정도 분량)을 거칠게나마 꾸역꾸역 다 읽게 되어 그것만큼은 보람이 있다.

<학산문학>에 기고한 서평이 벌써 일곱이니, 이전 <말과활>에 썼던 걸 포함하면 진지하게 쓴 서평이 벌써 여덟 번째다. 내 서평쓰기가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읽는지 나는 잘 모른다. 나는 단지 내가 맨 처음 페리 앤더슨의 <스펙트럼>을 읽었을 때--지금 다시 보면 앤더슨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지점들이 여럿 있겠지만--혹은 좀 더 시간이 지나 London/New York/LA Review of Books 의 기고문들을 읽었을 때, 그 이후에는 다시 _The Historical Journal_의 리뷰 에세이를 읽었을 때 느꼈던 기분을 독자들 중 소수가 조금이라도 공유할 수 있었으면 했다. 서평이 단순한 신간소개, 독후감, 칭찬과 비난을 하는 게 끝이 아니구나, 이렇게 유용하고 또 이것저것 많은 걸 해볼 수 있는 글쓰기 장르구나, 하는 그런 느낌, 좀 더 나아가면 글로 이런 일까지도 해볼 수 있구나, 는 느낌 말이다. 물론 저자는 독자의 머릿속--혹은 가슴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단지 상상만 할 수 있다. 저자가 알 수 있는 건 오직 저자 본인에 관한 사항 뿐이다.

나는 서평을 쓰면서 어떤 일들을 했을까? 두어 달 전부터 무슨 책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지 느슨하게 계획을 짜고, 몇 주 전쯤에 책을 한번 읽고, 글이 독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줄 수 있게, 신뢰감을 줄 수 있게 마감 직전까지 다른 자료들을 계속 읽고, 글쓰기 직전에 다시 책을 훑어보면서 이야깃거리를 배치하고, 마감을 연장해달라고 요청하고, 마침내 글을 쓴다. 가능하면 지인에게 부탁해서 원고를 한번 읽어달라고 하고 사소한 거라도 코멘트를 받아 수정한다. 가급적 사사표기를 한다. 보통은 해당 주제에 관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글 중 가장 좋은, 적어도 기존에 한국어로 나온 가장 좋은 글만큼의 정보와 시사점을 줄 수 있는 글을 쓰겠다고 기준을 잡는다(솔직히 말해 '한국어로 나온 가장 좋은 글'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주제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주제만 적절히 고르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단순히 1차원적 정보만을 주는 게 전부여선 곤란하다. 상승없는 박식함은 지루하고 더 나쁘게는 조잡한 좌판 같은 인상을 준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주제면 가장 단순한 논리부터 출발해 그것이 서서히 복잡하고 까다로운, 마치 현실과 같은 무언가가 되는 과정을 눈 앞에 가장 명료하고 신속한 형태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을 독자가 몇 번이나 반복하여 복잡함을 이해가능한 복잡함으로서 음미하는 게 가능하도록 말이다. 지적인 쾌감은 다른 무엇보다도 기존의 사고체계에 아직 들어와 있지 않던 사고패턴이 이해가능하고, 결국에는 활용가능한 것이 될 때 발생한다. 늘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지만(그게 가능한 책·주제는 아주 드물게만 나온다), 기회가 주어질 때 더 많이 훈련받은 독자에게도 그런 쾌를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대편에는 전문가가 아닌 독자라도 대략은 이해를 하고 논의를 따라갈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또 다른 과제가 있다. 섬세한 뉘앙스까지 캐치하지 않더라도, 주석에 언급된 다른 문헌들을 일일이 따라가보지 않더라도 "이 정도면 끝까지 읽고 대충 무슨 이야기인줄은 알아먹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긴 문장은 주술호응이 분명하게 써줘야 하고 복잡한 구조는 필요하다면 토막내서라도 어느 정도 단순화한다. 그러면서도 독자가 붙잡을 수 있는 호흡과 리듬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쉽고 단순한 주제라도 재미가 없으면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 반면 까다롭고 복잡한 논의라도, 애초에 주제만 보고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어찌 끝까지 재밌게 읽도록 할 순 있다. 그래서 논지를 명료하게 제시하고 또 그게 재미있고 유용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한다. 좋은 저자는 글을 쓰는 매 순간 거의 항상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사람이다. 저자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끔은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어떤 상을 떠올릴 수 있는 감각적인 언어를 쓸 수도 있다. 결국엔 세 가지를 묻는다. 말이 되고 설득력이 있는가? 유용한가? 재미있는가? 세 질문 모두에 '그렇다'고 답하는 독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어쨌든 목표치의 최소조건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그 독자의 내면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는지는 끝까지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건 단지 희망할 수만 있는 영역이다.

저자가 알 수 있는 건 오직 저자 본인이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 뿐이다. 짧은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고 글을 썼고 고쳤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다른 어떤 독자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많은 걸 얻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모든 생산적인 글쓰기가 그렇듯, 모든 자기단련으로서의 글쓰기가 그렇듯.

글쓰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글쓰기에 대해 두 가지 관념을 가진다. 하나는 낯설고, 기이하고, 자신의 삶과 가급적 멀리 두는 게 안전한 것이다(물론 악플은 예외다). 다른 하나는 너무나도 기계적이고, 반복되고, 괴로운 것, 강요되는 것이다. 두 유형을 벗어나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글쓰기가 자신도 모르는 패턴과 통념들, 언제 자신의 정신에 낙인찍혔는지도 모르는 구속을 반복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순진하거나, 아니면 어떠한 질서도 없이 일단 무언가를 나오는 대로 쓴다는 데 환희와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스스로의 글쓰기를 가장 엄격한 눈으로 똑바로 검토해야 하는 까닭은 미처 자각하지 못한 사슬이 나를 마치 한 쪽 바퀴만 돌아가는 장난감 자동차처럼 같은 곳을 뱅뱅 돌도록 하는 게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안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에 구속받고 있는지도 안다는 것이다. 동시에 계속해서 합목적적인 질서와 리듬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블럭을 쌓지 않고는 올라갈 곳을 만들 수 없기 떄문이다--그 위에 말을 걸고자 하는 독자가 있든,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든 말이다. 물론 원하지 않는 구속을 벗겨내고 자신이 선택한 질서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목적은 많고, 목적에 따라 더 적합한 방식이 무엇인지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오직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글쓰기가 지성을 진정으로 단련시킬 수 있다. 글쓰기가 그 자체로 정신을 성숙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원고를 냈으니, 이제는 다시 세미나를 가고, 책을 읽고, 번역을 할 시간이다. 학위논문과 몇 가지 프로젝트를 생각해야 한다. 언제나처럼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하게 될 연구거리, 공부거리를 만나고 대충 생각해둘 것이다.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커다란 일들을 떠안고 있고 무엇이든 최대한 후회없이 할 것이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말고, 한 일은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러니 이제 운동하고, 씻고, 자야한다. 맛있는 물 한 잔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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