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역사: 오해와 진실?
Intellectual History 2017. 10. 7. 05:41*3번 링크가 열람이 안 된다는 분들이 계셔서 코멘트를 옮겨놓는다.
먼저 영찬 님의 코멘트:
"(whiggism과 liberal 이 대립한다는)이 충격입니다 ㅠㅠ!!! 그럼 로크는 나중에 역수입이라도 되나요?!" 라는 지인의 말에 둘이서 이를 더 찾아본 결과..... (https://www.facebook.com/justin.y.choi/posts/10156149849010265)
로크가 19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 지는 좀 더 찾아봐야하겠지만 (대강 rationalist로 분류됨 -_-?), 1908년의 우드로 윌슨의 책 constitutional government in the United States를 보면 자연권은 18세기 뽕쟁이의 헛소리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남부 데모크랏에게서 인식이 이 정도라는건 이미 liberty에 대한 인식은 소멸로 보면 됨.
영국은 잘 모르겟지만 미국의 경우, 이런 자연권 - individual liberty가 프로그레시브의 손에 소멸되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무자비한 gilded age 자본주의로 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론화된 economic right를 받아들인 프로그레시브는 반대로 개인 재산권의 뿌리가 되는 individual right를 죽여야 했다.
이로 인해 19세기 말부터 1920년대 까지 individual liberty의 핵심이자 헌법적 재산권의 근간이었던 liberty of contract를 파기하기 위해 (특히 노동근무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하려했던 로크너 케이스는 '계약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패배; 이후 로크너는 드레드 스콧과 함께 대법원 최악의 판결로 리버럴 사이에서 꼽힌다) 시정부, 주의회, 그리고 대법원에서 'clasical liberal'들과 싸웠고 결국에는 FDR아래 뉴딜이라는 승리로 이끌었다.
19세기 말이 되면 17-18세기의 liberty, 특히 로크식의 자유권에 매달리는 고전적 리버럴들은 21세기 연세대 NL 주체파 만큼이나 희귀한 종자가 되었고, 대신 '사회과학'으로 무장하고 police power를 두른 프로그레시브에게 씨가 말려지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심지어 남부의 대표 지식인 우드로 윌슨까지도 프로그레시브로 변절함....
1930년이 되면 liberty는 몇몇 철학자나 신학자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fraternité 만큼이나 철지난 개념이 되어버려, 대신 independence, autonomy 등이 쓰이는 상황이 됨. 당시 liberty를 옹호하는 집단은 예방접종을 거부하는 집단 정도... (대법원 명령으로 경찰서에 끌려와서 예방접종 당함...) 이렇다보니 이 당시에 심각한 얼굴로 liberty를 주장하면 약간 또라이 취급....
또 1900-1920년대까지 liberty가 심각하게 쓰이는 케이스는 요즘 법학자들이 밝히고 있듯이 liberty of conscience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전통적으로 liberty of conscience는 펜실베니아의 메노나이트들을 보호하기 위한 예외법령으로 이해되어졌고, 프로그레시브의 다수는 정부의 공산주의자, 반전 평화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을 지지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ACLU에 대하여 더 찾아볼것~
그럼 20세기 초 철저하게 매장된 자연권/liberty는 어찌 되살아 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 온다.
이 부분은 나도 더 찾아봐야 하는 고로 20000~
[2016. 9. 29.]
다음은 나의 코멘트:
공유한 글에 언급된 것처럼 나와 영찬님은 과연 로크(John Locke)가 실제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나를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물론 기본적으로는 내가 묻고 영찬 님이 답하는 형식이었다^^). 대략 "영미 모두에서 인식론, <인간지성론> _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_ 및 <교육론> _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_ 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 하지만 18-19세기까지 미국에 로크의 정치철학의 영향력은 미미했다"는 어느 정도 합의된 것 같은데, 그럼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과 18-19세기 영국은 어땠나라는 질문이 남는다. 공유한 글이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로크 혹은 우리가 (로크적) 자연권이라고 부르는 개념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소개한다면, 나는 18-19세기 영국에서 로크가 어떻게 수용되었는가에 좀 더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다. 이하는 그때 이야기하면서 1660년대부터 2016년까지 존 로크 관련 문헌들을 정리해놓은 무시무시한 Bibliography(https://www.libraries.psu.edu/tas/locke/bib/index.html#toc)를 훑어보면서 간단하게 정리한 내용.
1) 로크를 언급한 문헌은 18세기 들어가서 로크가 죽은 다음에 점점 언급 문헌 수가 떨어지다가...1790년대 전후에 잠깐 올라갔다가...1800년, 19세기는 정말 확 줄어든다. 1829년에 갑자기 로크에 대한 biographical writing이 여러 건 나오고, 1880년에 문헌 수가 갑자기 확 폭발한 뒤...1930년대 초반부터는 로크에 대한 관심사가 엄청 증가. 그리고 냉전기부터는 역시 증대. 즉 로크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이긴 했지만 19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증대하다가 냉전 구도가 가시화되면서 폭발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 <통치론>_Two Treatises of Government_ 판본의 출간을 추적하면...18세기부터 확 줄어들었다가 1770년대에 좀 부활하고 1790년대에 많이 나오는데, 흥미롭게도 더블린에서 많이 출간된다. 교육론이나 인식론은 abridgment 까지 합치면 훨씬 꾸준히 많이 나온다; 로크가 주로 어떻게 수용되었나 하면 결국 철학자, 교육학자 아니면 자기계발서(?) 쪽이지 않았나 싶다.
3) 아일랜드의 로크 정치철학에 대한 관심사는 주목할 만한데, 18세기 후반 아일랜드에서 교육론(STCE)은 1778년 1번, 인식론(ECHU)은 72년, 77년, 86년에 총 세번 나오는데 비해 근데 TTG만 1766, 1779, 1794, 1798(2회) 해서 총 5회 출판된다. 로크의 다른 인기 있는 책들, 관용에 대한 서한이나 기독교의 합리성은 아예 더블린에서 따로 출판이 안 된다. 생각해보면 1790년대에 대표적인 자연권 이데올로그인 톰 페인도 대대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이 시기에 자연권에 대한 논의가 폭증하고 이러한 맥락 하에서 로크의 정치철학에 대한 관심이 잠시 다시 나오는 게 아닌가 가설을 제기해볼 수 있겠다.
로크 비/수용의 맥락, 즉 왜 무시당했고 왜 받아들여졌는가만 역사적으로 재구성해도 17세기 이후 서구(영미) 정치사상의 중요한 흐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면, 20세기 후반 이후 사상사를 어느 정도 따라가보면 상당히 흔한 이야기가 됐지만, "로크로부터 기원해 점차 확장되며 자리잡아온 현대 자유민주주의"란 사상사적 설명 자체가 계속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로서의 로크는 20세기 초중반에 들어와서 사실상 재발명된 이미지에 가깝다. 그리고 이 테제를 받아들이면, 역사를 자유주의의 점진적인 승리과정으로 이해해온 입장이나, 똑같은 테제를 일종의 타락의 역사로 전유해온 좌파적 서사나 다 근거가 밑둥부터 흔들리게 된다. 사실 이 얘기가 이미 반 세기 전 존 던(John Dunn)이 1968년 <존 로크의 정치사상>_The Political Thought of John Locke_에서 맥퍼슨과 스트라우스, 그리고 미국 자유주의 계열 사상사가들을 다 두들겨 까면서 했던 얘기라는 건 함정.
[2016. 9. 29.]
'Intellectual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케임브리지 학파와 20세기 역사학의 역사 (5) | 2018.01.02 |
---|---|
일기와 코멘트들: 제국의 몰락,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실패, 19세기 지성사 (1) | 2017.12.14 |
Oakley, Francis. _Natural Law, Laws of Nature, and Natural Rights_ 읽고 간략히 정리. (0) | 2016.12.15 |
찰스 테일러. <세속화 시대>. 4부 정리. (0) | 2016.11.29 |
계몽, 서구 근대의 역사, 그리고 동아시아적 근대? (3) | 2016.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