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배, <샌프란시스코 화랑관>과 한국적 무도만화의 가능성

Reading 2017. 7. 28. 06:39
단기간이지만 적지않게 신경을 기울여야 했던 일이 하나 끝났고, 그보다 더 심각한 스트레스를 주는 일들이 남아있다. 오늘은 완전히 지친 상태로 들어와 18세기 국제정치사상에 대한 논문 한 편을 읽고 나니 더 이상 지적인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휴식을 갖는 셈치고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597449&no=1). 이 뛰어난 만화가 사랑받을만한 이유는 매우 다양할테니 나는 개인적인 감상만을 쓰겠다.

1. 내게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은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무도'(武道) 만화다. 이 작품이 매우 귀엽고 부드러운 로맨스 만화라는 사실에 가려질 수 있겠지만, 작가는 신체의 움직임과 단련, 그리고 그 단련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성숙함에 대해 확실한 안목을 갖고 있다. 액션이 두드러지게 화려하진 않지만 각각의 동작과 자세에서 어떤 포인트가 중요한지 섬세하게 캐치하며, 무엇보다도 겨루기나 승단심사와 같은 어떤 경계선상의 순간에 사람들이 느낄법한 것들을 매우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무도에 진지한 애정을 가진 경험이 없다면 보여줄 수 없는 내용들이 분명 있다. 여기에는 작품이 다루는 대상이 단지 자신의 신체를 강화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심신을 함께 다스려야만(govern, control, and care) 하는 '무도'이기 때문에 좀 더 잘 드러나는 영역도 포함된다.

장르로서의 무도가 보다 넓은 의미의 격투액션장르와 구별되는 독자성을 띨 수 있다면, 그것은 전자가 단지 투쟁의 모습과 신체의 단련을 그리는 것을 넘어 신체적-정신적으로 완성된 인간의 추구라는 고전적인 목표를 간직한다는 데 있다. 단지 남보다 더 우월한 폭력을 보유한 혹은 그것을 습득해가는 존재를 그릴 뿐이라면 기껏해야 성장의 내러티브를 덧붙인 격투액션만화에 불과하다. 무도를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단지 타인보다 우월한 정도를 넘어 질적으로 탁월한, 무엇보다도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완성된 인격의 상을 전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장르로서의 무도만화는 기본적으로 근대의 상업적 문명화과정이 수반하는 고전적 이상의 축소와 사멸을 어떤 식으로든 피하거나 버티어내는 정신적 토양을 요구한다. 지난 30년 간 한국이 그것이 가능한 시공간이었는지 단정지어 이야기할 순 없지만--그 기간동안 우리의 세계는 서구적 근대의 이상(들)에 대한 신앙과 모든 '깊고 진정한 것'에 대한 추구를 경멸하는 왜소한 실용주의가 그럭저럭 공존하는 곳이었다--어쨌든 우리의 대중예술이 삶의 양식으로서의 무도를 진지하게 다루는 전통을 보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90년대 이후로 '민족적 전통'은 국수주의적 미신에 가깝게 전락했으며, 진보와 보수가 각각 나름의 버전을 구축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심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깊이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에서 '수련'의 개념은 목적을 상실한 수단으로만 남아 더욱 더 축소된다. 우리에게 '수련'의 개념은 일부 예술영역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대입시험이나 헬스·다이어트, 상업화된 불교·신비주의에 키치적인 형태로나 남아있다. 너무나 얄팍해져서 어떤 진지한 의미를 부여할 수조차 없게 된 현실을 견디어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중2병" "세상을 모른다"는 표지가 너무나 쉽게 붙여지는 사회에서 장르로서의 무도가 자리 잡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도만화로서의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에 주목하는 지점은 이 작품이 '문명화'된 사회와 무도적 이상이 공존할 수 있는 지평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데 있다. 주인공 이가야를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미국 서부의 발전한 도시로 대표되는 서구 근대사회에 아무 무리없이 소속될 수 있는 인물들로, 이들 중에 자신이 속한 사회와 '시간적으로' 갈등을 겪는 이는 없다. 가령 초반부 이가야의 고뇌는 서구근대문명과의 갈등 같은 것이 아닌 이주자의 적응이라는 그 자체로 근대적 지평 내에서 생겨난 문제이며, 컴퓨터 엔지니어라는 그녀의 직업-정체성은 미국 서부와 그녀의 충돌가능성을 더욱 축소한다(이는 작품이 제시하는 다른 갈등들, 즉 체중감량이나 성정체성으로 인한 가족과의 불화, 장애와 부모의 이혼 등과 같은 예도 마찬가지다). 일본만화에서 무도가들이 종종 시대착오적인 삶을 사는 이들로 그려지는 클리셰를 떠올려본다면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이 갖는 독특함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 작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대표되는 근대적 사회인의 이상--유머와 세련된 매너를 갖추고 타인을 배려하되 개인의 영역을 분명히 존중하는 '미국적인' 사회성sociability의 체득--과 "화랑관" 혹은 도장(道場)이 상징하는 무도인으로서의 자기수양전통 사이에는 본질적인 긴장이 존재하지 않으며, 후자는 전자 속에서 전자를 더 보완하고 낫게 만들어주는 요소로 제시된다.

작가가 이 구도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스터 이바노바의 회상(Episode 19 두 사람 6편)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기본적인 치안조차 유지되지 않는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무도가 생존을 위한 투기였다면, 작품의 현대 미국 서부는 "호신술이 없어도 안전할 수 있는" 시공간으로서 "무도를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사회로 제시된다. 이제 무도는 승부를 가리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투쟁이 아니라 스스로의 중심을 찾고 삶을 건강하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으로서 문명화된 삶의 일부분이 된다.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은 어색한 모순어법(oxymoron)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삶의 양식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한편으로는 현대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으로서의 '미국적인 삶'이 상징하는 진보, 세련됨, 문명화과정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장이라는 독특한 공동체에서 가능해지는 삶의 확장과 깊이에의 추구가 있다. 이 두 가지의 조화는 지금의 한국에서 쉽게 찾을 수 없으면서도--만약 이 작품의 배경이 한국이었다면 서사의 현실적인 설득력은 높지 않은 동화 같은 작품으로 읽혔을 것이다--동시에 젊은 한국인들이 새로운 이상으로 추구해볼 수 있는 삶의 양식이다. 이것은 (적어도 한국에 소개된) 미국만화는 물론이고 우리에게 알려진 일본의 무도만화들, 가령 <공수도 바보 일대>나 <공수도 소공자 코히나타 미노루>, <군계>, <홀리랜드> 같은 작품에서는 그려내지 못했던 것이다(우라사와 나오키의 <야와라>는 확실히 평범한 근대세계에서의 무도를 다룬다는 점에서 독특한 면이 있지만, 그것이 어떤 고유한 이상을 재창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10년대 한국에서 가장 생명력 넘치는 대중예술로 웹툰을 꼽을 수 있다면, 나는 웹툰의 융성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기존의 장르를 성공적으로 한국화하는 사례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은 다른 어디에서보다도 한국사회가 고유하게 이야기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이 한국적인 무도만화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꼭 같은 작가의 작업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한국적 무도만화 장르'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다. 이는 무도만화에 흥미를 가진 독자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단지 개인과 가족의 물질적인 풍족 위에 클리셰가 된 미적 요소를 양념으로 뿌리고 이를 성숙한 사회인의 삶이라는 도덕으로 포장하는 협소한 형태로 쭈그러드는 것을, 그리고 그것만이 올바르다는 편협한 자기기만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의 소망이기도 하다.


2. 벌써 10년 가까이 전의 이야기지만, 지금은 문을 닫은 도장에서의 시절을 떠올린다. 몇 백 번이고 거울을 보며 자세를 가다듬고, 완전히 지칠 때까지 샌드백을 떄리던 반복의 순간, 미트를 잡아주고 스파링을 하면서 함께 성장해나갈 뿐만 아니라 타인의 신체를 내 신체 못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되던 시간. 자신의 신체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던 수줍은 몸치가 스스로의 몸 구석구석을 조금씩 깨닫고 점차 동작의 꼴을 갖추어가게 되던 기억.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을 읽으며 도장에서 수련하던 경험을 그립게 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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