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크리스마스 일기: 코멘트들

Comment 2016.12.26 02:19

1. 24일 오후


아직 기말과제를 위한 약 600쪽 가량의 2차 문헌을 거의 손대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고 더 심각하게는 1차 문헌을 읽었음에도 뭘 써야 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내 과제를 잠시 내버려두고 코멘트를 부탁받은 글들을 읽고 있다. 루소에 대한 첫 번째 글은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빨리 출간되어 주변 사람에게 마구 알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만큼 까다로운 질문들을 담은 코멘트를 저자에게 보냈다. 두 번째 글은 어떨까?



2. 26일 새벽


25일 밤, 두 번째 글 코멘트까지 완료. 문장첨삭 빼고는 내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걸 얼추 해준 것 같다. 걱정에 비해 문장이 (내 취향은 아니지만) 대체로 나쁘지 않게 잘 읽혔다. 학부생, 아니 심지어 원생이나 교수까지 포함해서 한국어 학술문장을 탈나지 않게 쓰는 사람은 의외로 찾아보기 쉽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분명한 장점이다. 자료조사도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절대로 게을러보이지 않을 정도로는 했다--물론 나는 추가로 읽어야 할 자료 두 개를 지적했다...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영역의 글쓰기를 지도하기 위해 해당 전공자에게 문의해서 참고문헌 추천을 받는 조교는 학부생들에게 악몽의 대상일까? 이번 코멘트에서의 목표는 이미 많은 걸 쌓아놓은 학생에게 자신이 가진 자원을 좀 더 효과적으로 조직해서 설득력 있는, 괜찮은 '이야기'(narrative)를 만들 수 있도록 자극하는 데 있었다.

심지어 박사급 연구자들도 종종 자각하지 못하는 사실인데, 대부분의 인문사회계열 논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를 가지며, 뛰어난 연구자들은 그 서사의 설득력을 제고하기 위해 독자들이 어떤 구조의 서사를 보다 쉽게 받아들일 것인지, 어떤 수사(rhetoric)가 자신의 논리를 제대로 뒷받침할 수 있는지를 오랜 시간 고민한다.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정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하며 주어진 대상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등의 행위만으로도 좋은 연구성과물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구체적인 연구행위, 특히 논문의 작성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봐도 좋다. 똑같은 자료를 어떤 순서로 배치하고 어떠한 연결사를 통해 잇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힘을 갖는 글이 탄생하기도 한다는 것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다(이런 점에서 학부생들의 페이퍼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고쳐야 더 나은 글이 될 수 있는지를 수정제안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경험이다). A->B->C와 A->C->B는 다르며, 최악의 경우에는 단지 설득력이 약간 떨어지는 걸 넘어 틀린 이야기까지도 될 수 있다.

학문은 바깥에서 보면, 그리고 학문장을 구성하는 순수한 사람들에게는 오직 지적 성실성과 명민함, 진리만이 중요한 영역처럼 빛나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학적인 대화가 읽고 이해하고 쓰는 행위로 구성된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글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이해시키고, 반대 입장을 효과적으로 논박하며, 독자의 흥미를 잡아채고 또 계속 지속시킬 수 있도록...결정적으로 오독가능성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한다는 점에서 우리 연구자들 또한 다른 이들처럼 독자를 눈 앞에 둔 필자다. 단지 우리가 사용하는 서사적 구조/전략, 수사적 기술이 다른 분야와 조금 다른 규칙 및 언어적 자원에 기초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작업이 의도한 효과를 충실히 낼 수 있도록, 혹은 좀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던 사고의 덩어리를 튼튼한 뼈대와 충분한 근육 및 살을 가진 형상으로 빚어낼 수 있도록 그러한 전략과 기술을 활용한다. 유감스럽게도 글쓰기의 기술적 측면을 높은 수준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훈련받을 기회는 한국에서 좀처럼 제공되지 않는다--어쩔 수 없이 연구자가 스스로를 훈련시키기 위해 뛰어난 선행연구, 특히 수사학적 기술을 잘 체득한 저자들의 저작을 단지 내용정리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사고하고 어떻게 틀을 짓고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염두에 두어가면서 읽는 과정은 이래서 중요하다. 뛰어난 저자가 글을 어떻게 쓰는가를 짚어가며 이해하다보면 그가 명료함을 창출하는 방식 자체에 감탄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나는 충분히 장래성을 갖춘 지도학생에게 내 코멘트가 바로 이러한 의도에 입각해서 제공되었다는 점이 분명하게 인식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의 글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단지 골치아프고 어렵기만 한 게 아니라 보람차고 심지어 재밌기까지도 하다는 점까지 전달할 수 있다면 더욱 기쁠 것 같다.

...
이제 그동안 미뤄놓은 기말과제 리딩이다,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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