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일기. 글쓰기첨삭과 고등교육제도
Comment 2015. 10. 18. 14:51새벽까지 학부수업 페이퍼 첨삭을 했고 어쨌든 예정해두었던 데드라인까지는 마친 셈이다. 학생 수도 많지만 (제대로 된 첨삭이 가능하려면 첨삭자 1명 당 학생 10명 정도를 넘지 말아야 한다...그러나 한국에서 이 비율을 존중하는 대학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1학년 비중이 높은 수업이라 평소보다 더 힘들었다; 정련되지 않은 글을 많이 읽는 건 마치 망친 요리를 억지로 꾸역꾸역 먹는 것처럼 사람의 정신을 피로하게 만든다. 1/3 정도가 영어로 썼는데, 솔직히 내 한국어 숙련도에 비해 영어 숙련도가 훨씬 떨어지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동일한 수준의 첨삭을 제공하지 못하는 데 따른 미안함이 있다. 한국어라면 단어의 뉘앙스부터 시작해서 세세한 스타일까지 전부 고쳐줄 수 있지만 영어는 논지전개에 관련된 것 이상을 이야기해주지 못하니까. 영어 글쓰기 에디팅 문제 때문에라도 유학을 가지 않는다면 최소한 따로 교육을 받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많이 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다루는 수준까지는 올라가지 못하리라는 한계도 벌써부터 느낀다). 코스웍 기간 동안은 따로 뭘 할 수는 없겠지만...내 관심주제 관련해서 공부할 것도 한 아름인데, 해야 할 일은 자꾸 늘어만 간다.
이번에 첨삭하면서 한국 글쓰기 교육이 얼마나 황폐한 상태에 놓여있는가를 다시 한 번 강하게 느꼈다. (상대적으로) 잘 쓴 페이퍼들 중에서는 영어로 쓴 글들, 그러니까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많은 교육을 받고 영어로 글쓰는 훈련을 받은 학생들의 과제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한국어로 작성된 과제물은 대부분의 경우 학적인(academic) 글을 써본 경험 자체가 부족한 티가 역력했다. 쉽게 말해 대학에 입학하기 전 외국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의 영어 글쓰기가 한국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의 한국어 글쓰기보다 대체로 한 등급 정도 좋았다; 한국 필자가 쓴 한국어 글보다 외국의 석학이 쓴 글을 한국어로 번역한 글이 훨씬 괜찮게 다가왔던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학에 입학하는 한국인 학생들이 교육에 시간 및 자본을 투자한 정도가 결코 적지 않으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사례로부터 한국의 교육과정에서 글쓰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언어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의 질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결론을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 가설은 참일 확률이 높다. 우리는 일정수준 이상의 정보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처리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최상위층에 속하는 학생들임에도, 엄청난 자본의 혜택을 받은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글쓰기 자체의 숙련도가 현격하게 떨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차적으로는 앞서 언급했듯 고등학교까지의 과정에서 글쓰기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 및 그 질 모두 높지 않다는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좀 더 일반화된 수준의 인식으로 올라가고 싶다. 거칠게 말하자면 한국사회는 세대와 연령, 계급을 불문하고 공적인 글쓰기와 합리적인 언어사용에 대한 교육을 폭넓게 받은 집단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좀 더 심각하게는 교육제도를 운영하는 집단이든 학부모 집단이든 이런 교육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고민 자체가 부재하다. 애초에 제대로 된 교육시스템의 수혜를 받을 수 없었던 세대에서 언어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다룰 시 있는 사람들이 예외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90년대 이후 고등교육이 보편화되기 시작한지 거의 2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사회적으로 상층부에 속하는 집단조차 이러한 필요를 깨닫지 못한--그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관련된 교육을 시키지 않고 있는--상황은 당황스럽다. 우리는 지금 4-50대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최소한의 논리적 적합성을 갖추지 못한 언설을 어떠한 자의식 없이 펼쳐내는 사례에 익숙해져 있다. 문제는 한 세대가 지난 지금에도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기대되는 수준도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상층계급 학부모들은 교육을 통한 계급재생산과정에 무척이나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그 교육의 질을 제고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다. 자녀를 가둘 '뒤주'를 탐내면서도 그 뒤주 안에서 무슨 책을 읽을지에 대해선 생각이 없는 셈이다.
고등학교까지의 과정에서 글쓰기 교육이 부재한 거나 마찬가지라면, 이 막대한 책무를 대신 떠맡아야 할 대학의 상황은 어떠한가? 내가 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한다면, 한국의 대학교육 역시 이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부분의 대학교육정책 담당자에게 학생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정보처리/소통능력을 습득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 자체가 인지되고 있지 않다. 인식의 부재를 보여주는 제도 상의 사례를 몇 가지 꼽을 수 있다. 첫째, 거의 모든 대학에서 학부생 및 대학원생에게 지속적인 글쓰기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다. 기초교양 수준의 글쓰기 강좌 하나 정도를 제외하고 과제물에 대한 첨삭을 제공하는 수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 해도 첨삭자 1인당 학생 수를 일정 수준 이하로 낮추기 위한 제도적인 고려는 행해지지 않는다(나는 첨삭자1인당 20명이 한계치라고 생각하며, 좀 더 깊은 수준의 지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1인당 10명 이하로 내려가야 한다고 믿는다). 임금 형태로든 장학금 형태로든 고용되는 첨삭조교의 수는 매우 적고, 많은 학생들을 상대할 경우 그에 비례하여 합당한 반대급부가 제공되지도 않는다. 둘째, 첨삭 수준을 일정 정도 이상으로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인 교육을 일상화한 학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첨삭 및 면담을 통해 이뤄지는 글쓰기 교육의 질은 첨삭자(대부분의 경우 대학원생 조교)가 글쓰기 교육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도를 갖고 있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 중에서 첨삭자의 교육을 일정 수준 이상 보장하기 위해 제도적인 교육을 시행하는 곳을 나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보고 들은 적이 없다. 현재로서 첨삭교육의 질은 첨삭자 개인이 원래 어느 정도의 역량을 보유했는가라는 우연적인 요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한국의 대학은 글쓰기 수업 및 첨삭 조교의 수와 그 질적인 관리를 거의 완전히 방치하고 있다.
몇몇 전문화된 전공을 제외한다면, 이런 환경에서 학생들이 교양교육은 물론이고 전공의 심화된 이해에 필요한 정보처리능력을 갖출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학생들 간의 자체적인 학업네트워크가 무너지면서 이 문제는 점점 더 치명적이 되고 있다(나는 읽고 쓰기가 정보처리 능력의 기초라는 당연한 전제 위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정보접근성이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한 사람이 접하는 정보의 양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한 사람이 언어 및 비언어 데이터에 접근하고-소화하고-비판적으로 평가하여-종합/가공해 표현하는 역량 또한 증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정보접근성의 상승은 정보처리능력의 제고를 요구한다. 유감스럽게도 201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교육과정 전반이 새로운 필요에 부응하는 양상은 지극히 미소하게만 보인다. 우리는 이제 겨우 우리가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 및 형식적 다양성이 급격히 넓어진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며, 이에 걸맞은 '처리능력'을 제공해야 한다는 인식은 유감스럽게도 극히 소수만의 것이다. 이는 정부의 대학평가 및 대학구조개혁안의 논리에도 마찬가지여서, 대학평가에는 교수자 대 학생 비율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양적인 척도조차 거의 무의미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대학구조개혁안에서는 어떻게 고등교육의 질을 확보 및 제고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고등교육 담당자들의 뇌를 차지하고 있는 가장 큰 주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어떻게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는 수익구조를 만들 수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대학을 기업자본이 즉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양성소로 변화시킬 수 있느냐이다(한국의 자본은 이 점에서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교육을 제공하려는 책임조차도 방치하고 있다; 일본의 기업들과 비교해봐도 한국 자본의 대책없음은 놀라운 수준이다...생산성 저하를 재교육을 통해 극복하는 대신 해고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솔직히 비합리적이다). 어느 쪽에도 교육의 질에 대한 고민은 없다. 이는 심지어 기업에도 장기적으로 해로운데, 정보처리능력교육을 기술교육과 맞바꾸는 건 즉각적으로 사용하고 버릴 수 있는 '인스턴트' 노동자를 확보하는데는 유효할 수 있지만 장기간에 걸쳐 노동자의 업무처리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는 기본토대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일본의 우파들은 이를 교육의 양극화, 곧 기술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계층과 고도화된 사고를 담당하는 계층을 분할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한다면, 한국은 고도화된 사고를 담당하는 계층을 아예 양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지어 엘리트 집단을 육성한다는 오래된 반평등주의적 전략까지도 포기하는 것 같다(대학은 이를 박사학위를 미국에 외주화함으로서 해결하려 하지만, 기업에도 과연 같은 방법이 효과적일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과연 그들이 장기적인 전략을 구상하기나 하는지조차도 잘 모르겠다. 기업과 정부의 다소간 대책없는 요구에 대학이 질질 끌려가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어떻게 교육의 질을 확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텐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조차 희귀한 상황에서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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