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표현, 표현의 자유, 관용에 대한 노트

Comment 2015. 2. 16. 11:16

이 글은 경향신문의 다음 기사들에 대한 코멘트이다.


1) [오프닝] 검열과 ‘혐오 막말’… 표현의 자유를 모독하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132237265&code=940202]


2) [표현의 자유 논쟁]혐오 표현 입 막으라? 논쟁 없인 극복도 없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132135265&code=940202]


3) [표현의 자유 논쟁]‘어묵샷’ 고발 박지웅 변호사 “혐오 범죄 맞지만 논의가 필요한 때… 일베 폐쇄는 반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132135365&code=940202]


4) [표현의 자유 논쟁]갈수록 교묘해지는 ‘우회 검열’… 닥치고 ‘재갈 물리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132150235&code=940202]






1. 오늘날 혐오 표현 논쟁은 크게 두 가지 형태의 난국에 빠지곤 한다. 혐오 표현의 제재를 요구하는 측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반론에 직면하며, 표현의 자유를 강조할 때 이는 혐오 표현의 승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비판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혐오 표현 논쟁의 성찰은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급속한, 반성없는 근대화를 거친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마치 선험적으로 주어진 명령으로 간주하곤 하는데, 그러다보니 정작 그 개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한 질문은 좀처럼 제기되지 않는다.


2. 근대 서구세계의 역사적 맥락에서 나는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 사례를 셋 들고 싶다. 로크의 관용론, 칸트의 "펜의 영역", 그리고 개인의 자기표현이 그것이다.


 1) 로크의 요점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의 소유만을 다루는 시민정부는 정치적 권력의 문제와 무관한 종교적/(사적) 양심의 차원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종교적 의례는 시민정부가 정해놓은 법률을 준수한다. 여기서 개인의 내적 양심의 표현은 공적 영역의 규범을 따르는 한에서 자유롭다. 만약 개인의 양심과 법률이 충돌한다면? 개인은 양심을 따라 행동한 후 처벌을 받으면 된다(...).


 2) 조금 더 적극적인 칸트는 현실의 정치적 권력을 존중하면서도, 그 정치적 권력이 따라야 할 이성은 (주로 대학의 철학교수들이 포함된) 펜의 영역, 즉 비판적 언론의 논의를 통해 밝혀진다고 보았다. 여기서는 정치적 권력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때때로 자신의 결정에도 날을 들이대는) 표현의 자유를 감내하고 옹호해야만 한다; 정책을 결정하는 "다수"가 소수파의 의견을 보장해야 한다는 J. S. 밀의 <자유론>도 이런 주장을 포함하고, "알 권리"를 중심으로 하는 오늘날의 언론도 암묵적으로 이 논리에 기초한다.


 3) 개인의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옹호하는 입장은 개개인이 각자 자기 자신의 내면을 아무런 제약없이 표현/표출할 수 있는 상태를 하나의 당위로 설정한다(개성의 완전한 전개를 삶의 목적으로 놓은 빌헬름 폰 훔볼트나 이걸 받아들인 밀이 여기에 속한다; 밀은 2번과 3번을 다 자신의 논거로 가져온다). 즉 개인이 자신의 사고과정을 마음대로 표현하고 발현하는 것 자체가 선이며 공적인 권력은 이러한 자유를 보장해야만 한다.


 

3. 2번에서 볼 수 있듯, 사실 표현의 자유의 핵심은 공권력 혹은 정치권력과 사적 개인 간의 갈등상황을 상정한다--애초에 갈등국면이 없었다면 표현의 자유가 논제가 될 이유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즉 사적 주체의 자유로운 표현이 공적 주체의 의지 및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경우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로크는 정부의 영역 자체를 시민의 재산권(소유물, 생명, 계약의 자유)에 국한시킨 뒤 사적 주체들의 삶은 이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 한 자유롭다고 본다. 칸트는 (이성을 지닌) 사적 주체들이 공적 영역의 판단에 자유롭게 이성을 사용하는 게 공적 주체에게도 이득이 되기 때문에 용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의 자기표현을 옹호하는 입장은 사적 주체의 표현 자체가 공적 권력이 개입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거칠게 정리한다면, 서구 근대의 "표현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공적인 국가권력의 개입으로부터 사적 주체/시민사회의 표현권을 보호하는 데 그 핵심이 있었던 셈이다.


4. 3번의 맥락을 감안한다면, 최근 한국사회가 맞이한 혐오 표현의 문제는 그것이 사적 개인들 간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근대적 개념의 기본구도에 곧바로 들어맞지는 않는다. 즉 이전에는 근본적으로 표현의 자유 개념이 사적 개인에 대한 공적 권력(혹은 사회적 강자)의 "관용"을 요구한 것이었다면, 혐오 표현은 사적 개인(들)이 다른 사적 개인(들)에 대한 공격성을 표출하는 구도를 취한다--이제 공적 권력은 스스로에 대한 비판을 감내해야 하는 입장에서 사인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입장에 선다. 앞서 설명한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세 가지 논리는 여론탄압이나 (권력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작품에 대한 검열에 대해서는 일치된 결론을 내놓을 수 있지만, 사적 개인들 간의 혐오 표현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충하는 해석에 도달한다(따라서 이 두 문제는 상이하게 취급되는 편이 낫다). 이런 점에서 혐오 표현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근대적 합의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난제이기도 하다.


 로크적 관용론의 관점에서 쟁점은 개인의 혐오 표현이 다른 개인/집단의 시민권을 침해하느냐의 여부에 있다. 우리가 시민권에 대한 침해를 신체 및 재산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로 좁게 해석할 경우 혐오 표현은 철저히 사적 개인들 혹은 시민사회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법적 판단을 포함해) 공적 권력의 개입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명예훼손 및 모욕죄 등에서 함축하듯, 개인의 명예 및 그에 수반하는 감정 자체가 개인의 삶에 본질적인 부분으로 간주되는 경우, 혹은 특히나 사회적 약자/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이 물리적 공격(혐오 범죄) 혹은 혐오의 정서에 기반한 정치권력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고--반유대주의가 나치 독일에 작용한 것처럼--간주될 경우 혐오 표현은 더 이상 공적 권력의 개입을 거부할 수 없게 된다(최근 '악플 판사'에 대한 경계가 유난히 강렬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로크적 관점에서는 어디까지가 시민권이고 또 시민권을 침해하는 행위인가에 대한 판단에 따라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한다면 혐오 표현 혹은 표현의 자유 논쟁은 오늘날 시민권 및 시민권의 보호 범위에 대한 합의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칸트적 관용론의 경우 사적 주체들 간의 혐오 표현은 공적 권력/사회적 강자에 대한 (견제와 비판을 포함한) 이성적 논의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결여하며, 만약 공적 권력이 이를 처벌하기로 결정할 경우 스스로에 대한 관용을 요구할 수 없다; 대신 이 입장은 혐오감의 표출을 합리적 논의로 대체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대로 개인의 무제약적 자기표현을 옹호하는 입장은 혐오 표현 또한 개인의 표현권으로서 어떠한 공적 제재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대신 이 입장은 혐오 표현에 대한 비판 및 언어적 공격 또한 무제약적으로 허용된다는 이야기를 덧붙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입장에서 우리는 사적 주체들 사이의 적대감을 표출하는 혐오 표현을 시민 사회 내부의 갈등해결을 위한 합리적 대화로 바꾸라는 암묵적인 요구를 떠올린다.


5. 뒤집어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혐오 표현의 범람이 시민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의 합리적 의사소통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의 결과물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공적 권력은 사회구성들이 서로 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갈등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서 문제의 해결사로서 호출된다. 그렇다면, 예컨대 지방정부/법무부/인권위가 일제히 성소수자 재단설립 승인을 거부한 것처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100600035) 공적 권력이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문제를 외면하는 한국의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공적 권력이 혐오 표현에 대한 제재를 하지 않을 때 곧바로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 중 하나는 점차적으로 더욱 강력하고 광범위한 혐오 표현 및 공격성 표출이--그 대부분은 '불법의 경계선을 넘지 않으면서--등장하리라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시민사회 내부의 갈등 및 분할을 촉진하고 확대시킬 것이다; 우리는 "서북청년단"처럼 자신의 증오심을 표출하기 위해 물리적 충돌을 감수하는 집단 및 혐오 표현에 대한 더욱 잦은 고소/고발 및 경멸적 언사의 출현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현재의 시점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나은 방안 중 하나는, 혐오 표현을 합리적 논쟁/대화로 바꾸기 위해서라도, 혐오 혹은 공격성의 표현이 어떠한 사회심리적 메커니즘에 따라 출현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름의 이유 없이, 이 이유를 때로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타인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을 표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혐오 표현은 사회의 내부를 관통하는 사회적 적대 및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함과 분리될 수 없으며, 후자를 해결하지 않고 전자를 제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세월호 희생자 및 유가족들에 대한 일베 구성원 일부의 혐오 표현은 (세월호 사태에 대한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하며 또한 유가족들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한) 정부 및 집권여당에 대한 후자의 자기동일시를 사고하지 않고는, 그리고 일베 구성원들을 그러한 동일시로 이끈 사회적 조건에 대한 물음이 해명되지 않고서는 온전한 형태로 이해될 수는 없다. 바로 이러한 질문 및 그에 대한 답변 위에서만 시민사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한발짝 더 다가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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