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8일. 테일러의 <헤겔>(~11장), 아도르노, 변증법적 이해, 공부의 감옥.

Comment 2014. 9. 28. 23:41

오늘 반드시 읽어야 하는 모비딕과 <초상>을 때려치고 테일러나 좀 읽었다. 이제 11장까지 읽었으니 조금만 더 읽으면 절반을 넘긴다. 그래봐야 <논리학>(<대논리학>과 <엔치클로페디> 1권을 포함한) 파트는 아직 200쪽이나 남았지만. 거의 10여일 간 손도 못대다가--손을 놓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시 이 책을 붙들 때 요구되는 의지력이 증가한다...특히 파트가 <논리학>이다보니--오랜만에 붙잡았는데 역시 재밌다. 민쌤이 헤겔은 어렵지만 마치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재밌다고 말씀하신 걸 테일러를 읽으면서 이해한다. 아니, 재밌다는 표현만으로는 모자라고, 계속 읽으면서 테일러가 풀어주는 헤겔을 차근차근 이해하다보면 감동한다. 헤겔이나 테일러가 대단하구나, 이런 차원이 아니다. 내가 지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 사유 자체가, 이 사유와의 접촉과, 이 사유를 통해 내가 변모하는 과정 자체가 감동적인 것이다; 사유가 지금까지의 자신을 향해 이제 허물을 벗고 새로운 개체로 나아가라고 이끄는 손길을 뻗을 때, 그리고 그 말을 따라 조금씩 자신의 사고패턴 자체를 변화시키고, 지금까지 축적해왔던 경험적 지식을, 세계를 이해하는 논리 자체가 조금씩 낡은 먼지를 떨어내면서 움직이며 바뀌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 과정 자체를 자각할 때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엇에 감동할 수 있는가? 1부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이제 헤겔의 기초적인 모티프를 이해했노라고 생각했고, 2부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이제 <정신현상학>의 논리를 대략적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테일러의 텍스트는 여전히 사고를 확장시킬 계기들을 아직도 많이 남겨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어느 부분만 뽑아 읽힐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며 읽도록 권해야 하는, 그 자체가 헤겔적인 텍스트다. 요즘은 한 주의 고된 시간들을 오직 테일러의 텍스트를 다시 접하는 시간을 기다리며 버티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철학 안내서를 읽기 위해 소설읽기를 버텨내야 한다고 말하다니, 많은 사람들은 좀 미친 게 아닌가 생각할지 모를텐데, 어쨌든 지금 나는 그렇다).


특히 <논리학> 파트를 읽으면서 아도르노 생각이 많이 든다. 아마 아도르노가 아니었으면 칸트와 헤겔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아도르노를 3년 전 석사논문을 쓰면서 짬짬이 읽기 시작했고(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논문은 그 근본적인 전개에서 그때 막 읽던 아도르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부정변증법>을 읽으면서 칸트와 헤겔을 읽지 않으면 아도르노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대에서 꾸역꾸역 칸트랑 헤겔을 읽었다(군 생활이 힘들었지만 후회하지 않는 시간이 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 테일러를 읽으면서 다시금 아도르노를 생각한다. 우리는 아도르노가 헤겔에 대해 내린 수많은 가혹한 코멘트들 때문에 그가 다른 한편으로 진정으로 헤겔을 인정했다는 것, 나아가 아주 많은 대목에서, 그리고 그 자신이 전개하는 논리와 수사에서 헤겔처럼 사유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잊곤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헤겔의 변증법과 부정변증법을 단순한 대립관계로 놓는 진부한 해석들이다...부정변증법은 아도르노 자신이 표면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헤겔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면에서 헤겔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차라리 비판적인 변용에 가깝다(물론 나 자신이 헤겔을 거쳐 다시 아도르노를 읽을 때 지금의 판단에 대한 보다 명확한 진술을 할 수 있겠지만). 아도르노 전공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헤겔의 사유를 따라가면서 아도르노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헤겔을 거치지 않을 수는 없다고까지 생각한다. 아도르노를 읽으면서 탄복했던 몇몇 대목들이 본래 헤겔로부터 왔음을 늦게나마 발견하면서 더욱 그렇게 느낀다(이는 맑스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는 마찬가지다; 나는 심지어 가장 비 헤겔적으로 서술된 것처럼 보이는 <자본>에서조차도 헤겔의 방법에 대한 이해가, 그 방법을 그토록 손에 잘 익혔기 때문에 티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이해가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모순은 중요하다. 그러나 모순들로부터,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각각의 계기들, 사물들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관계를 파악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어떤 면에서 변증법은 사물들에 대한, 사물들이 맺고 있는 전체적인 구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각각의 부분들이 완벽하게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는 대목은 해당 부분 자체에 대한 고찰만이 아니라 그것을 연결하고 설명하는 논리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로 이어져야 한다. 최종적으로 최초에 모순이라고 간주되었던 것을 배제하는 대신 _포괄하는_ 새로운 연관관계=필연성=총체성을 사고하는 것이 변증법적 인식의 핵심이다. 따라서 변증법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 동력이 필요하다. 1) 사물의 모순을 모순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민감함. 2) 모순이 발생하는 이유를 내적에서만이 아니라 외적인 요소, 곧 다른 사물과의 관계와 연결시킬 수 있는 너른 시야. 3) 최종적으로 기존에 사물들을 연결짓던 연관관계=전체적인 상 자체를 혁신시키고 새로운 연관관계를 제출할 수 있는 종합적이고도 엄밀한 사고능력. 아마도 다른 무엇보다 이 세 번째 항에서, 그리고 세 번째 항을 활용하는 능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사고의 전통은 내게 다른 철학적/이론적 사유의 전통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특별함을 갖는다.


솔직히 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또 읽히고 싶다. 되도록 이 책이 직업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극소수에 한해서 읽히는 대신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헤겔과 테일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유를 이해하고 또 그만큼의 사고능력을 갖게 되었을 때의 사회는 지금보다 결코 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기쁘게, 부담없이 추천할 수 있는 사람이 이토록 적다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 바로 이런 순간에 나는 내 공부가 나를 점점 더 고독하고 폐쇄적인 지점으로 몰고 간다는 것,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사유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간다는 것, 그래서 자폐적인 삶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사고의 여정이 단순히 즐거울 뿐만 아니라 삶과 인식 자체를 그 자신과 모두에게 보다 나은 것으로 개선시킬 가능성을 제공함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공부는 나를 폐쇄적인 삶으로 몰아넣기 때문에, 나는 공부가 내게 강요하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통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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