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에티카>. 1부 및 2부.

Reading 2014. 6. 13. 03:32

B. 스피노자. <에티카>. 황태연 역. 비홍출판사, 2014. [영어 중역본이며 <지성교정론>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이하 직접 인용은 이 판본에서 취한다]


<에티카> 막 3부로 들어섰다. 빨리 읽고 기말페이퍼의 본격적인 작성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과 너무 빨리 읽지 말아야 한다는 절제의 마음이 교차한다. 본래 페이퍼에 활용할 가능성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었지만 두 개의 페이퍼 모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을 것 같다(항상 기말페이퍼 기간이 되면 다른 책들이 눈에 들어오고, 나는 그러한 유혹에 취약하다...그게 맘에 드는 페이퍼가 나오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빨리 읽어도 되는 책이 있는 반면 천천히 읽어야만 되는 책이 있다. 혹은 어느 정도 가속도가 붙는 것을 허락하는 텍스트(대표적으로 칸트)와 그 정도가 적은 텍스트가 있다. <신학정치론>이나 <정치학논고>에 비할 때 <에티카>는 분명히 천천히 읽어야 하는 텍스트다. 스피노자는 하나의 체계를 세운다. 문제는 그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틀과는 꽤나 다른 각도에서 사물들을 바라보고 구축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사고 자체를 변용시켜야 한다. 예컨대 (상식적인 개념틀 위에서 읽어도 개요를 파악하기 어렵지 않은) 데카르트를 읽을 때의 연장선으로 스피노자를 읽는 것은 오로지 사상사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허용될 뿐이며, 그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을 때 후자를 제대로 독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프로이트나 헤겔, 맑스를 염두에 두면서--그러나 이들을 통속적으로 이해하고픈 유혹에 빠지지 않기란 또 쉽지 않은 일이다--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최대한 스피노자에 딴지를 걸지 않고 그의 흐름을 따라가고자 한다. 나는 철학자라기보다는 독서가reader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고 싶다.

 1부는 "신에 관하여"이다. 자신의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기본적인 논증들을 구성하는 파트이기도 하기에 천천히 읽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최초에 그가 내놓는 정의들과 논변들은 상투적으로 보이거나 당대의 (종교적 맥락 하에서) 관습에 따르는 것처럼 읽기 쉽지만, 그가 그 시대의 네덜란드에서조차도 가장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킨 저자들 중 하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주 작아보이는 차이가, 그저 조금 특이하게 쓴 것 같아 보이는 부분이 뒷부분에 이르러 결정적인 차이로 커진다. 유일한 실체=신=자연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피노자가 기독교인임을 생각할 게 아니라 우리가 실체라는 개념어에 부과하는 의미 자체를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히려 오늘날로 치면 지구라든가 생태계, 만물이 상호작용하는 세계로서의 우주 같은 개념이 스피노자의 신=자연을 이해하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이해했을 때 조금 더 편했다...내들러의 입문서나 다른 주석서들을 읽어보면서 수정을 가하면 되겠지). 그러나 거기에 기계론적 관점이 섞여들어가면서, 우리는 스피노자에 함축된 이질적인 계기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결국 가장 존중해야 할 사실은 그에게 이질적인 계기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오늘날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계기들을 자신의 체계 안에서 하나의 구축물로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자연을 (산출하는, 만들어내는=)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산출된, 만들어진)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의 계기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대목(1부 정리29 주석)은 만물을 (기계적인) 인과관계에 의한 결정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와 무한히 늘어지는 인과의 사슬을 신=자연을 분할함으로써 끊어내려는, 그리하여 유일한 실체를 유일하게 "자유로운 원인"으로 정립하려는 의도가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복잡한 텍스트를 단 한 번의 읽기로 정리한다는 것은 애초에 내 의도가 아니기에 나는 1부에서 두 가지 모티프만을 짚고 싶다. 하나, 만물은 신=자연 안에 있는 필연의 소산이며 필연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생태계 안에서 사실상의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속적인 표현이 대략의 도움은 될까?). 현재의 세계가 존재해온, 존재하는, 존재할 방식과 다른 세계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 우리가 그럼에도 자유의지와 우연성 등을 떠올리는 이유는 우리의 인식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신의 본성 또는 본질을...만물의 원인인 신의 능력을 일정하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정리36 증명).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이 충분히 알지 못하는 대상을 자신의 관점에 따라 이해하도록 이끌림으로써 오류를 범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욕과 욕망을 의식하고는 있으나, 자신들로 하여금 원하고 욕구하도록 결정한 원인들을 알지 못하기에, 꿈에서조차, 그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들을 자유롭다고 생각한다....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정신에 의하여 다른 사람의 정신을 판단한다....사물의 완전성은 전적으로 그 사물의 본성과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하고, 따라서 사물은 인간의 감각을 즐겁게 해주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이유로, 혹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거나 거슬린다는 이유로 더 완전하거나 덜 완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1부 부록).

 2부 "정신의 본성 및 기원에 대하여"는 좀 더 까다롭게 읽힌다. 스피노자는 여기에서 "인간의 정신과 그것의 최고의 행복을 인식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것들"(2부 서두)만을 다루겠다고 한다. 실제로 2부의 주된 전개는 관념, 사유, 지성, 의지 등 정신의 움직임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데 할애된다. 일단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관념들의 질서 및 연결은 사물들의 질서 및 연결과 동일하다"(정리 7)는 것, 결과적으로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대로 존재한다"(정리13 증명)는 것을 짚자.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극히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으며, 이러한 능력은 인간 신체의 능력이 커짐에 따라 그만큼 커진다"(정리 14 증명). 여기에서 내가 제일 주목하고 싶은 것은, 특히나 데카르트의 논증들과 비교할 때, 스피노자가 "능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신도 그렇지만)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설명한다는 사실이다(그의 정치철학에서 "덕"virtue이 등장하는 것과 이것이 아주 무관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곧 데카르트에게 정신은 그 자체로 분명한 사실들을 지각하는 되는 것 뿐이며 그러한 과정에서 오류를 범할지언정 그러한 정신 자체의 존재는 보편적이었다면, 스피노자가 차별적인 능력을 도입할 때 그러한 능력을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는가(당연히 <지성교정론>이 떠오른다; <신학정치론>에서 이성을 가진 자와 정념에 이끌리는 대중을 구별하는 것도 상기하자)와 같은 질문들이 추가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어서 그는 (유일한 실체와는 구별되는) 개체들과 복합개체를 다룬다. 그는 물체를 운동을 통해 정의하며, 운동을(홉스와 마찬가지로) 관성에 따라 설명한다. 그리고 외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물체들의 운동이 우리의 신체에 주는 영향에 따라 생성된다; 그러나 기억(즉 동시에 일어난 사건들/동시에 존재한 물체들을 주관적으로 연결시켜 떠올리는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스피노자는 우리가 물체들에 대한 지각으로부터 올바른 인식을 도출할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한 인식에는 물체 자체만이 아니라 물체를 인식하는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인식이 뒤섞여 있다.
 2부에서 주목할 지점 중 하나는 허위에 대한 스피노자의 인식이다. 스피노자는 허위를 올바른 인식의 결핍으로 정의한다(정리35).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허위를 배격하는 것은 아닌 게, 이어지는 정리 36에서 그는 "타당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관념은 타당하거나 뚜렷하고도 명확한 관념과 동일한 필연성을 가지고 생긴다"고 덧붙인다.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2종 혹은 3종의 인식이 필요하다. 감각을 통하여 생겨나는 "닥치는 대로의 경험에 의한 인식"(정리40 주석2 1항)이나 기호=언어로부터 떠올린 사물의 표상인 "1종 인식"(=의견, 표상)과 달리 공통개념, 타당한 관념, 이성=2종 인식 및 "사물의 형상적 본질에 대한 타당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직관적 인식=3종 인식만이 참과 거짓을 구별하도록 허용한다. 이성의 본성은 "사물을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고찰하는 것"(정리44)이다. "인간의 정신은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에 대한 타당한 인식"(정리47)을 갖는데,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에 의하여 파악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인식으로부터 대단히 많은 것을 이끌어내어 그것들을 타당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이런 식으로 제3종의 인식을 형성할 수 있다"(정리47 주석). 
 이어 의지와 지성에 대한 다소 복잡한 설명이 이어진 후 2부의 결론부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의 최고의 행복 또는 지복은 신에 대한 인식에만 있으며, 이 인식에 의해서 우리는 사랑과 도의심이 권고하는 것들만을 행하도록 인도된다. 이것으로부터 덕 그 자체와 신에 대한 봉사가 행복 그 자체이자 최고의 자유"(정리49 계 주석 1항)임을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운명의 양면을 태연한 자세로 기다리고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된다"(2항). 스피노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회생활(3항)과 국가공동체에 대한 코멘트("시민들이 노예처럼 일하지 않고 자유롭게 최선의 것을 행하도록 통치하고 지도해야 한다", 4항)까지 나아가면서 자신의 이론이 결코 자연철학이나 심리학에 머무르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나는 여기에서 공화주의적 덕성의 개념 및 (푸코가 말한) 자기-배려의 모티프들이 얽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제 막 읽기 시작할 3부는 "감정의 기원과 본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자신이 수행하고자 한다고 밝히는 작업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서두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 "내가 인간의 결험이나 우행을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루려고 시도하는 것과, 그들이 이성에 반대되며 공허하고 부조리하고 혐오스럽다고 선언한 것들을 논리적 추론으로서 증명하고자 하는 일은 확실히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 그러나 나의 논거는 이러하다. 자연 안에서는 자연의 결함 탓으로 여길 수 있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은 항상 한결같으며, 자연의 힘과 활동능력은 어디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어떤 종류의 사물이든 그것의 본성을 인식하는 방법도 역시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것은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과 규칙에 의한 인식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증오, 분노, 질투 등의 감정도, 그 자체로 고찰한다면, 다른 개개의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과 힘에서 생겨난다. / 그러므로 이러한 감정들은 일정한 원인이 있거니와 그 원인을 통하여 인식될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단지 고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다른 사물의 특성들과 같이 우리가 인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정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프로이트와 맑스를 선조로 하는 이데올로기 분석의 모티프를 보지 않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스피노자가 내가 기대하는 바와 같은 태도를 취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후의 읽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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