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G. A. 포칵.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Reading 2014. 5. 28. 02:57

J. G. A. 포칵.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피렌체 정치사상과 대서양의 공화주의 전통>. 곽차섭 역. 전2권. 나남, 2011. Trans. of The Machiavellian Moment: Florentine Political Thought and the Atlantic Republican Tradition, by J[ohn]. G[reville]. A[gard]. Pocock, Rev. ed., Princeton: Princeton UP, 2003.


오늘은 J.G.A. 포칵Pocock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_The Machiavellian Moment_ 국역본을 읽었다. 번역은 오타가 가끔 눈에 띄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어딘가 싶다. 솔직히 두께도, 난이도도, 낯설음도 모두 며칠 만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음에도 약간은 급하게 억지로 읽었다. 대략의 큰 테제는 정리했지만,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기대했던 것을 넘어서는 엄청난 소득이었지만 세목까지 살펴 읽으려면 다음에 어떤 형태로든 한번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르네상스 전공자(당연히 마키아벨리 텍스트는 웬만큼 읽은! <군주론>은 중고딩 때쯤 읽은 기억이 있는데 <로마사 논고> 같은 다른 텍스트를 안 읽으면 좀 그렇다...), 17-18세기 영국 전공자, 미국 독립시기 전공자 셋이 달라붙어서 한 두어 달 정도 세미나 하면서 꼼꼼히 읽어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책이다. 아마 비슷한 레벨에 있는 사람으로 당장 떠오르는 건 (둘 다 일종의 관념사the history of ideas 를 한다는 점에서) 퀜틴 스키너 정도인데, 물론 스키너는 내가 방법론 책밖에 읽은 게 없지만 포칵이 훨씬 빡빡할 것 같다. 이 사람은 정말 역사가 냄새가 엄청나게 풀풀 풍기는 사람이라...나름대로 스스로를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사상사에 대한 "비평가적 역사가"를 지향하는 포지션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포칵의 책을 읽으니까 기가 죽어서 어디 가서 역사가 흉내낸다는 소리도 못 내겠다-_-;;; 괴물같은 할아범...관련 분야는 사료든 연구서든 어지간한 건 다 읽고 이야기하는 데다가 자기 범위 내의 논의는 무슨 무림 고수인양 나름대로 툭툭 정리한다. 기본적으로 15-16세기 이탈리아 - 17-18세기(초) 영국 - 18세기 중반 미국이라는 세 개의 시공간을 연결하면서 이야기를 짜는데, 기본적으로 이 책은 전문 지성사/사상사에 속하기 때문에 유명한 인간들만 나오는 게 아니라 별별 마이너한 사람들이 다 나온다(단지 내가 저 세 필드 전부에 무지하기 때문에 마이너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겠다만). 대충 유명한 사람 다루는 거라면 그럭저럭 따라가겠는데 처음 들어본 사람을 중요하다고 썰을 줄줄줄 풀어나가면 닥치고 머리를 짜내서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문제는 그런 대목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게다가 정말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적 개념을 이후의 영국/미국의 전개에 적용하는 거라 도식 자체가 꽤 낯선 것도 있고. 보통 나는 홉스/로크 이전으로 어지간해서 올라가지 않고 그래서 공화주의적 전통과 만날 일도 별로 없었는데 포칵 읽으면서 공화주의는 진짜 신물나게 접한 것 같다. 내가 진짜 더러워서 아렌트를 읽는다 제기랄...


한풀이는 이쯤 하고, 포칵은 비르투virtu/덕성virtue 개념을 따라가면서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적 논리(사회 내에서 무장한 시민이 곧 스스로의 덕성을 배양할 수 있게 된다는)가 어떻게 이후의 다른 맥락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정치적 논쟁의 컨텍스트로서 작용하게 되는지를 추적하고 또 드러낸다. 1-2부에서 15-16세기 이탈리아 정치사상(특히 피렌체의)을 소개하는 부분이야 그냥 모르는 내용 공부한다고 생각하면서 읽으면 그만인데, 3부부터 이야기가 흥미있어지면서 동시에 골치아파진다. 다른 무엇보다도 포칵이 기존의 영국/미국혁명을 이해하는 가장 큰 틀인 로크적 계기Lockean moment를 비판하면서 비르투/비르투스/덕성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마키아벨리적 계기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영국 르네상스/18세기 전공자는 1-2부는 대략 무슨 이야기하는지 알아두고(물론 마키아벨리를 다루는 두 장은 정말 읽을 가치가 있다), 3부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포칵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뭐 사료나 논지 다루는 거야 일급의 역사가니까 그렇다치고...우리가 유명한 텍스트만 선별적으로 골라읽는 대신 이쪽 일차문헌들을 일정 이상 읽어야 포칵의 논의가 어느 정도 실감이 날 것 같다. (적어도 <스펙테이터>Spectator는 어느 정도 봐 놓는 게 편하다...언제 한번 스펙테이터 몰아읽는 시간이나 가질까 예전부터 생각은 했는데 포칵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했다) 여튼 나는 크게 포칵의 테제 자체를 반박할 생각은 없고, 대신 그가 격퇴시켰다기보다는 잠시 괄호 안에 넣은 로크적 계기와 마키아벨리적 계기, 곧 자본주의-민주주의와 공화주의적 덕성 간의 대립과 공존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내가 박사과정에서 그리는 큰 그림이 로크부터 벤담/밀까지 내려오는 영국 자유주의의 사상적 계보라면, 포칵이 제시하는 마키아벨리적 계기는 분명 그것에 제대로 포섭되지 않고 충돌하는, 때로는 적대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나는 로크적 계기에만 주목해왔고 이러한 흐름에 '저항' '반발'하는 요소들이 일부 있다고만 생각해왔는데, 포칵을 읽으면서 그러한 반발에 어느 정도 역사적 개념화를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지인이 예컨대 _Little Dorrit_과 같은 텍스트에서 왜 미덕/덕성virtue이 의인화된 여성으로 등장하는지 이야기한 것이 나름의 힌트가 된다). 실제로 디킨즈의 텍스트들은, BH나 HT도 그런 면모가 꽤 있고(GE의 Biddy도 있고 등등). 어쩌면 최초에 개별 시민이 '공적인' 영역에서 무언가 유의미한 존재가 될 수 있냐는 질문이 공화주의=마키아벨리적 계기의 기본정신이라면, 이것이 법과 경제의 언어(로크)에 의해 사적인 영역(단적으로 가정, 여성, 아이...)으로 밀려나고 때때로 후자에 저항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게 19세기 영문학에 발견되는 하나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확실히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했듯 근대문학은 어떠한 개인의 형상을 창조해나가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개인은 법과 권리의 개인과 겹쳐지면서도 동시에 후자로 환원되지만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때로는 감각의 주체일수도, 아니면 내셔널리즘의 주체일수도 있겠지만, 특히나 디킨즈를 필두로 하는 19세기 중반 이후의 리얼리즘 소설들은 '리얼한 현실'에만 국한되지 않는 어떤 미덕을 갖춘 인물을 제시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 꽤 고민해볼 주제고, 포칵이 나에게 던진 엄청난 바위덩어리인 셈이다...그러나 이런 형태로 사고를 전진시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 아닌가. 정리해서 머릿속에 어느 정도 도식을 완성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포칵의 후속연구를 포함해서--<마키아벨리언 모멘트>는 75년 작이다-_-; 40년이 흘렀다...) 지금부터 고민하련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특히 비르투. 최근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을 읽으면서 주체의 영성, 역량, 덕성과 같은 개념을 푸코가 재도입하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포칵이 여기서 제시하는 개념 자체가 푸코의 틀과 어느 정도 맞닿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론 포칵이 자기 배려의 기술이라든가 주체화와 같은 주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그가 제시하는 공화주의적 포맷 자체가 시민들, 구성원들, 개개인의 역량-덕성의 고취를 요구하는 논리라고 한다면 이는 푸코가 생각하는 저항의 한 가지 방식과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한 가지 연결점만 지적하자.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는 영성(그러니까 주체가 스스로를 형성하고 개선시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정신분석과 맑시즘에 이러한 영성의 계기가 (명시적으로는 부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즉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체가 더 나은 무언가가 되는 계기를 요구하는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포칵은 자신의 논의 끝부분에서 사회주의적 전통을 이야기하면서 이와 같은 덕성을 강조한다는 것이 사회주의의 특색이자 (많은 사람을 끌고 가지 못하는) 약점이라고 지적한다.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이 공통된 대상으로부터 보고 있는 요소, 자신의 체계 내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무언가가 실제로는 꽤나 공통점을 갖춘 게 아닐까 하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어쨌든 아렌트를 너무 멀지 않은 시간 내에 후딱 읽고 포칵을 재검토해야겠다. 나의 역사적 퍼스펙티브가 조금 더 확장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쁘고 설레는 일이다-!(그러나 그런 시간적 여유가 내게 주어질까는 잘 모르겠다...) 더 꼼꼼히 이해하며 읽을 여지가 매우 많은 책이었기에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독서는 아니지만 얻을 수 있는 건 많았기에 이렇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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