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Reading 2014. 5. 25. 20:21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1981-1982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L'hermeneutique de sujet / The Hermeneutics of Subject). 심세광 역. 동문선, 2007. 


번역은 나쁘지 않다. 동문선에서 책 교정과 편집을 제대로 안 한 것 같다고 생각이 들긴 하는데, 어쨌거나 읽는데는 지장이 없다. 워낙 책이 빡빡하게 만들어져서 단지 인내심이 필요할 뿐이다. 기본적으로 푸코가 강의를 하면서 내용을 만들어가는 측면이 좀 있는데 이번 강의는 내가 앞서 읽었던 다른 강의록들보다 그러한 비체계성이 크다. 바꿔 말하면 어느 정도 후반부까지 읽어야 푸코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 특히 아직 한국어로 그 전 해 및 다음 해 강의록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런 난점이 심하다. 특히 푸코가 여기서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주체성의 장치, 혹은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의 형식에 대한 논의를 자신의 이전 체계 안으로 어떻게 끌어들였을지 단지 약간의 가늠만을 해볼 수 있는 상태에서는(프레데릭 그로의 "강의정황"을 보면 <성의 역사> 3권과 함께 그나마 이 텍스트가 푸코가 죽기 직전까지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가장 많이 드러내는 자료인 듯 싶다). 이것은 사토 요시유키가 주장하는 것처럼 통치성에 관한 거대한 작업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혹은 거대한 권력의 선을 그린 푸코가 윤리적 주체의 문제로 (비록 영웅적으로 저항하기는 하지만) 후퇴하는 것으로 읽혀야 하는가? 현재 나의 입장은, 어차피 우리가 푸코를 단순히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를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면, 여기서부터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끌어낼 여지가 있다는 믿음을 고수하는 쪽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버틀러가 <윤리적 폭력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Giving an Account of Oneself)에서 이 텍스트를 포함한 말년의 푸코를 독해하며 시도한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래의 코멘트에서도 언급되듯, 푸코는 자기 배려의 형식, 직접적으로 인간이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형식(당연히 '실천들' '기술들' '장치들'이 중요하다...방법론이라는 점에서 푸코는 초기부터 말년까지 일관된 원칙을 견지했다)에 초점을 두고 그것들을 역사화한다. 그는 데카르트적인 관점, 곧 주어진 주체에 대한 참된 앎에 집중하는 관점과 대비하여 고대에 주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방법, 곧 그가 영성(spirituality)이라고 부르는 관점이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근대에는 '영성'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맑시즘과 정신분석을 (명확한 형태로는 아니더라도) 영성의 요소를 포함한 대표적인 사유체계로 간주한다; 아주 흥미로운 구도 중 하나는, 그가 '인식'에 초점을 맞춘 17세기 철학과 다시금 영성을 도입하려는 19세기 철학을 대립적인 관계로 본다는 점이다--푸코는 이 텍스트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인식의 문제틀 자체를 넘어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로 짧게나마 언급한다. 그가 제시하는 고대의 대표적인 주체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하듯 자기인식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소크라테스-플라톤적 방식(이러한 관점이 이후 데카르트적 관점-선험적 현상학에까지 이어진다), 기원 후 1-2세기에 성행했던 견유주의/에피쿠로스학파/스토아학파적인 방식, 주체의 자기포기 및 복종을 요구하는 (특히 수도원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적인 방식. 푸코는 역사적으로 주요했던 처음과 마지막의 두 방식으로부터 가운데의 방식, "이교도들"의 주체화 과정 및 그 구체적인 실천/규칙/규범/기술들을 살피고 그로부터 바람직한 주체화,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주어진 '법'을 그대로 내면화하지 않는 주체화 과정의 가능성을 이끌어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방대한 양의 텍스트들을 참고하면서 그려지는 푸코의 스케치를 쉽게 요약하긴 어렵겠지만, 나는 특히 다음과 같은 사항들에 주목한다. 먼저 그가 (그리스인들의 명백한 엘리트주의적 경향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플라톤적인 것에 대비시켜 헬레니즘적 주체화의 (신분 및 출신에서 자유로운) 보편성을 강조한다는 것, 주어진 주체 및 고정된 것에 대한 앎이 아닌 주체와 진실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강조한다는 것, 주체가 외부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입장을 추구하되 동시에 내면으로 폐쇄적으로 침잠하지 않는다는 것, 스승-제자 관계에서도 드러나듯 타자의 문제가 항상 중요하다는 것,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서 주체가 가다듬어지고 만들어진다는 것. 즉 그가 주어진 질서와 규범들에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세계 및 타자에 대한 관계를 유지하고 끊임없지 자기를 비판하고 형성해가며 진실을 추구하는 주체화의 가능성을 고대로부터 발굴한다는 점은 의심이 없다. 애초에 대표적인 두 가지 유형(플라톤, 기독교)에 의해 가려진 영역을 굳이 들춰낸다는 행위 자체가 푸코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고전주의 시기 이후에서 작업하던 그가 갑작스럽게 고대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은 기독교적인 영향 하에서 만들어진 서구 근대 자체, 정확히 말해 서구 근대의 주체화 방식 자체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텍스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푸코가 그리는 스케치가 매우 야심차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나 근대 서구와 꽤나 이질적인 영향력이 잔존하고 있는 현대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와 같은 독자는 근본적인 주체화의 방식 자체가 복수로 존재할 수 있으며 역사적이라는 푸코의 전제에 동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마찬가지로 해야한다; 과연 그가 발굴하는 주체화의 형식은 그가 바란 것처럼 사회의 규범을 넘어선 윤리적 주체로 스스로를 형성할 수 있는가? 특히나 신자유주의-포스트모던-소비주의-자유주의적 규범들의 가치체계가 "~을 하지 마라"가 아닌 "~을 하라"(특히 지젝이 이야기하듯 "즐겨라"라는 명령! "소비하라" "탐닉하라" "너의 즐거움을 가능한한 추구하라"라는 정언들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이다)는 형태를 띠고 있는 사회에서 푸코가 발굴해낸 주체가 "자기-경영적 주체"(사토 요시유키)와 어떻게 스스로를 차이화할 수 있는가? 나는 세 가지 항목에 초점을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주체 형성의 실천 자체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침투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는가? 2) 주체 형성의 실천이 최소한의 독립성의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데올로기가 은밀하게, 다시 말해 사회-무의식의 차원에서 다시 침투하는 걸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3) 앞서의 모든 침투로부터 자유롭게 형성된 주체가 자신의 폐쇄적인 내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길, 즉 올바르게 윤리적/정치적인 실천을 수행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곧 독립성이 어떻게 선을 보장하는 것인가? (나는 예컨대 헤겔의 스토아학파 독해로부터 따라나오는 질문, 곧 푸코가 제시하는 '가능성'이 단지 특정한 역사적 상황의 조건에 불과할 뿐이지 않은가라는 질의는 생략하고 있다)


 나는 위의 질문들을 푸코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그가 확실히 해결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서 앞서 언급한 버틀러의 텍스트는 나름대로의 일관성있는 답변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는 한다...아직 주체-윤리-정치의 문제는 분명히 현재진행형이다). 주체화/복종화subjection가 고정되지 않고 유동한다고 논증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떤 행위규범을 '긍정적'으로positively 재부과하는 것은 여전히 난점으로 남는다. 사토가 푸코를 "장소론적 접근"이라고 언급하면서 구조와 "경제론"의 필요를 강조하는 까닭은 이런 맥락이다(<권력과 저항>). 그러나 주체가 단순히 구조를 받아쓰기 하는데 머무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며, 역으로 구조의 개혁만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나이브한 생각이다. 푸코가 수행한 작업의 의의는 그것이 구조에 대한 망각으로 무시받기 쉬운만큼 (그러나 그처럼 권력과 주체의 문제에 천착한 사람이 누가 있었는가?) 제대로 읽고 그 가능성을 끌어낼 필요가 있다. 특히나 윤리와 도덕의 문제와 결별할 수 없는 좌파들에게 주체의 자기형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도 사실이고. 오늘날 특히 무한정의 긍정을 부과하면서 주체의 (저항적인) 역량을 소진시키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는 지배체제에서 살아남고 저항하고 무언가 '모두'를 위한 가능성을 찾는 방안이 필수적이 되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고전적인 의미에서 virtu가 다시 요구되는 시점이지 않은가? 가장 의미심장한 푸코의 진술 중 하나가 주체와 개인을 구별하는 것인데, 이는 (푸코 자신은 끔찍하게 싫어했겠지만) "집단적 주체" 혹은 주체들의 집단을 위해 사고할 여지가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특히나 주체화의 과정에서부터.



==== 이하 5월 23일의 코멘트


앞부분에는 (어쨌든 내 관심사가 아닌) 그리스-로마의 텍스트들로부터 집요하게 자기-배려의 모티프들을 꺼내드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납득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조금 지루하게 대충 읽었다. 중반을 넘기면서 푸코가 이 작업으로부터 무엇을 추구하는지, 플라톤적인 것도, 기독교적인 것도 아닌 다른 형태의 주체형성과정을 이끌고 그것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림이 나오면서 재미있어졌다(더불어 MoF를 갖고 쓸 기말페이퍼에 써먹을 부분들이 나타나면서... <주체의 해석학>을 읽으면서 확신하게 된 것은, 푸코 말년의 중요한 강의로 간주되는 "계몽이란 무엇인가" "What is Enlightenment?"가 사실은 매우 불완전한 내용만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토스에 대한 설명이 무슨 의미가 갖는지 납득하려면 결국 <주체의 해석학>을 읽어야한다). 아주 군데군데 푸코가 언뜻 자기가 그리는 큰 그림을 슬쩍 보여줄 때, 자신의 야심이 단순히 고대부터 4-5세기까지(즉 플라톤 / 헬레니즘 / 기독교 로 불연속적이 단절이 이어지는)만을 그리려는 게 아니며 근대까지 이어지는 총괄적인 주체형성, 혹은 "주체라는 장치"의 역사를 재검토하려는 것임을 암시할 때는 정말 짜릿한 맛이 있다. 꽤나 일찍부터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해석학>과 그 이후의 텍스트들이 본격적으로 논의/활용되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이 점은 영미권도 아주 예외는 아닌 것 같다...Sarah Mills가 쓴 Routledge의 입문서를 보라). 권력분석의 시작-통치성 분석으로부터 주체형성까지 논의의 공백을 메꿀 강의록들이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어쨌든 그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후기의 텍스트를 고립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있다. 계속 읽어나가고 볼 일이다.


==== 이하 5월 24일 새벽의 코멘트.


방금 <주체의 해석학>을 일독했다. 푸코를 좋아하긴 하지만 항상 어떤 거리감이 느껴지곤 했는데, 지금까지 읽은 그의 텍스트들 중 가장 친연성을 느끼게 되는 책이다(부분적으로 푸코가 격투기를 자기 수양의 일부로 설명하는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D. H. Lawrence의 _Women in Love_가 떠올랐다). 푸코가 이야기하는 자기-배려는 스스로의 수양, 단련, 수련, 형성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적어도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나의 삶은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형성하고 변화해가는 실천들의 연속, 다시 말해 자기 수양과 같았다. 나와 가까운 사람은 나에게 스스로의 통제가 얼마나 중요한 동기인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 내가 단순한 금욕주의자, 단지 스스로의 욕구를 단념시키는 사람과 다른 면이 있다면 나에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힘이 있고 그것이 곧 내 삶의 실천들의 원동력으로 작동해왔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의 원천은 절대로 자연적이지 않다. 어릴 적의 태권도 도장을 비롯해서, 나는 지금까지 스스로를 (어떤 면에서건)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계기들을 너무나 많이 겪어왔다--어쩌면 가까운 타인에게 있어 내가 견딜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은 이러한 자기 형성의 과정을 너무나도 당연한 해결책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점에서 운이 좋았다면, 나는 너무나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향상시켜야 하는 면모들이 너무나 많았고, 따라서 그것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가치체계들 사이에서 향상 자체에 붙들리는 대신 계속해서 진동하면서 주체가 여력을 쏟아야 할 영역 자체를 질문할 수 있는 심급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나의 가정에는 단일한 가부장적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 또한 내가 복종해야 할 더 큰 힘으로 존재했고 양자의 충돌이 양자 모두의 권위에 거리를 둘 수 있는 인식을 제공했다는 사실도 덧붙일 수 있다... 속도가 붙은 김에 <성의 역사> 2,3권을 늦지 않게 읽어야겠다.

주체화의 여러 가지 형식들을 이야기하면서 푸코는 기독교의 "자기 포기"적 요소를 강조한다(아마 <주체성과 진실>이 출간된다면 더 명확해질 것이다). 이 부분을 읽고서 나는 비로소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이 어떻게 단순히 장치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성이라는 차원에서 네이션의 성립에 일조하는지를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자기를 포기하면서만이 만들어질 수 있는 주체가 있고(가라타니는 근대문학적 주체를 이야기하면서 일본 기독교의 주요 인물이었던 우치무라 간조를 강조한다), 그 주체는 자기를 포기하면서 더 큰 무언가=진실에 복종한다. 그것이 바로 표피적으로는 국가와 자본을 부정하지만 실제로는 그것들과 결합하여 진정한 근대국가체제(자본=네이션=국가)를 성립하는 네이션이다. 즉 가라타니가 말하는 근대문학적 주체는 푸코가 바라보는 기독교적 주체를 이해한다면 조금 더 분명하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 가라타니가 <기원>에서 끊임없이 주체의 형식들을 언급하며 그것들 중의 한 형식으로서 근대적 주체를 설명하려 한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근대적 주체로부터 보편성을 박탈하고 그것을 우연적이 형성물 중 하나로 보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집필 시기 상 푸코의 영향을 아주 제한적으로밖에 받지 않았을 <기원>에서 가라타니의 시선은 아주 날카롭지만 사실 친절하게 자신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해명해놓은 텍스트는 아니다...정확히 말해 그 역시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무엇을 말하게 되었는지를 당시에는 아주 분명한 형태로 깨닫지는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가라타니의 매력이자 난점은 그의 텍스트 자체가 (상대적으로) 평이한 언어 이면의 논리구조/모티프들을 추적해야 하는, 곧 해석을 요구하는 텍스트라는데 있다. 아주 공들여 읽지 않으면 결국 평이한 것만을 보게 된다. 나는 내가 그의 텍스트를 거의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주체의 해석학>을 읽으면서 아직도 더 그에게서 읽어낼 여지가 남아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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