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로운 문돌이" 대 "해로운 공돌이": 과학과 과학보다 복잡한 세계

Critique 2017.08.26 05:33
박성진 중소벤처부 장관 후보를 명백하게 당혹스러운 방식으로 옹호하는 서울경제 기사(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11&aid=0003098513&sid1=001)를 비판적으로 소개하는 지인의 포스팅에 "해로운 문돌이가 또..." 류의 댓글이 달렸고, 그러한 인식을 옹호하는 아마도 이공계열 종사자일 것으로 추측되는 분들의 동감이 이어졌다. 오늘날 곳곳에서 지탄을 받고 있는 인문계열, 그중에서도 "문돌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전공자로서 나는 약간의 냉소와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들 중 아무도 자신들이 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목하는 박 후보를 "해로운 공돌이"라고 부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광경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황우석을 스타덤에 띄워준 사람들, 박기영을 연구재정관리의 요직에 앉히려고 했던 이들, 박 후보를 그릇되게 옹호하는 기자는 "해로운 문돌이"들이지만, 황우석은, 박기영은, 박성진 후보는, 그리고 그들이 명예, 재정, 권력을 배분하는 자리에 비교적 수월하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과학계에는 해로움이 없는가? 창조과학회의 대표적 인사들은 주로 이공계 교수들인데(문학전공자가 창조과학회의 학회장을 하는 광경은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왜 그토록 쉽게 "해로운 문돌이"를 부르짖는 이들의 손가락에서는 "해로운 공돌이"라는 표현이 그만큼 쉽게 나타나지 않을까?

"흔한_문돌이의_말놀이.txt"로 끝맺음하는 위험을 피해 이 글을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방향으로 돌려본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독특한 편견 혹은 전제를 찾을 수 있다. 과학은 (개별 실험이나 가설의 성패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틀릴 수 없는 옳고 합리적인, 적어도 그러한 방향으로 지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며,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과학적" 면모는 모두 과학 바깥에 있다는 오래된 믿음, 오늘날에서까지도 적잖은 과학도들 및 심지어 인문사회과학도들까지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전제가 그것이다. 학문들의 역사를 얕은 수준에서라도 오가본다면 물론 이러한 전제가 학문·지식장의 복잡함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순진한 오류이며, 이러한 믿음이 그대로 유지될 때 전국의 수많은 "공돌이"들이 의도치않게 "해로운" 존재가 될 가능성이 아주 약간 높아진다는 예측을 어렵지 않게 도출할 수 있다. 거시적인 차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개별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전제가 갖는 난점을 찔러보자. 이공계인들은 그들 중 일부가 믿고 소망하듯 완벽히 "과학적"일 수 있는가?

몇몇 이공계인들이 믿는 바와 같이 철저한 합리성으로 무장한 과학의 신성한 영역이 있고 그들의 정체성이 그 영역과 분리불가능하다고 가정해보자. 안타깝게도 이러한 가정은 필연적으로 불행한 결론을 도출하는데, 이때 과학자는 철저히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으로 완벽하게 수렴될 수 없는 여러 영역--미적인 것,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역사적인 것, 타인과의 관계맺음, 때로는 자기 자신의 불합리한 욕망의 통제 등등--을 철저히 거세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영원히 비과학적인 것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본질 또한 그와 같이 비과학적인 영역으로 '오염되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 과학자는 (우리가 '가치'를 부여하는 개념으로서의) "인간" 혹은 "시민"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거나--물론 이게 의지로 포기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스스로가 이것과 완벽히 절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통 "중2병"으로 지칭된다--혹은 자신의 어떤 부분들이 "해로운 문돌이"의 열등한 비합리성과 특별히 구별된다는 보장이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과학과 비과학의 구별을 엄격하게 밀어붙인다면, 한 창조과학자가 이공계인 혹은 과학도로서 축적한 재능·수련·지식은 그의 종교적 신념을 평가할수도, 이해할수도 없다. 전자가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후자가 전자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저한 무신론과 세속주의가 종교를 극복하는 경로라고 반론하고 싶은 이들이 있겠지만, 내게는 세속주의 또한 근대에 출현한 하나의 특수한 종교적 태도라는 찰스 테일러의 지적이 좀 더 설득력있는 것처럼 보인다. 맹목적일 정도의 비정치적 태도가 그 자체로 하나의 (보통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은) 정치적 태도이듯이 말이다.

내가 좀 더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정치와 제도의 차원에 있다. 이 글의 소재를 마련해준 박기영, 박성진이 왜 과학인들에게 엄청난 근심거리가 되었는가? 바로 그들이 과학계의 자원배분 권한을 관장하는 권한을 보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말해 오늘날 한국의 많은 과학인들이 무의식적으로라도 깨닫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거칠게 말해 현대과학이 절대로 정치와 제도, 올바른 통치의 문제(여기서는 이를 단지 국가와 정부의 기능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정치와 제도는 그저 필요악이 아니라 특정한 과학분야가 발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오로지 그것들이 있을 때에만 과학발전이 가능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했다. 막대한 공적자금의 투입없이 실험실이, 다수의 연구원들이 존속하고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는 재정을 끌어오고 배분하고 투입하고 관리하고 평가하는 제도적 환경이, 그것들을 구축하고 운영하고 보수하고 개선시키는 관리자·관료그룹의 존재가 이공계인들의 삶에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달리 말해 과학자들은, 오늘날 공식적인 학계에 속한 거의 모든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통치(governing, governance)를 통해서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의 진술을 함축한다. 과학자들은 그들이 특별히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영역들이 있고 또 제대로 기능할 때에만 유의미하게 기능할 수 있다. 한 사회가 과학기술에 의존적인 것만큼이나 과학기술자들은 그들의 엄격한 학문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에 의존적이다. 뒤집어 말해, 한 과학자가 자신이 "해로운 문돌이"의 영역이라고 부르는 분야에 철저하게 무지하다고 할 때, 그는 다른 사회구성원에게, 그리고 다른 과학자들에게 "해로운 공돌이"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전문영역에는 매우 뛰어나지만 행정기구를 전혀 컨트롤할 줄 모르는 존경받는 과학자가 막대한 연구비배분기구의 주요결정권자가 되었을 때 어떤 일들이 생길지 상상할 수 있다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일부 과학도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합리성은 특정 학문의 전유물이 아니며, 여러 영역이 고유하게 구축한 합리성의 기준들은 쉽게 무시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기술 관련 종사자들이 습관적으로 이야기하는 믿음 중 세 가지만 검토해보자. 첫째, 대통령선거 당시 문재인 후보의 공약집에도 반영되어 있듯, 한국 과학기술계는 거의 일치된 목소리로 "이공계인의 정책 참여"를 목표로 해왔다. 나는 이 주장에 원론적으로 반대할 생각이 없지만, 만약 이것이 이공계 연구자가 단지 정책 자문단이나 심의기구 참여를 넘어 직접 정책을 설정하고 행정기구를 운용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조건이 까다로워진다는 걸 지적할 수밖에 없다. 즉 이러한 주장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행정과 정책을 높은 수준으로 이해하는 이공계 종사자가 존재하거나 적어도 근시일 내에 육성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당연하지만 행정적 통치의 관점에서는 과학에 무지한 행정가와 행정에 무지한 과학자 중 당연히 전자에게 더 높은 신뢰성이 주어지며, 과학자가 높은 수준에서 정책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높은 수준에서의 정책·통치의 이해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좁은 의미의) 과학적 전문성·합리성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둘째, 그런 점에서 몇몇 과학기술 전공자들이 (내 생각에는 다소 과도할 정도로) 신봉하는 "참여"의 개념은 좀 더 신중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참여민주주의"가 만능의 해결책처럼 다뤄지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모두의 더 많은 참여가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선의 선택을 보장한다는 결론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참여와 결부된 "시민"의 개념, 그리고 그 개념과 결부된 고전적 공화주의 전통이 근대국가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시대착오적인) 소수파로 밀려난 까닭은 직업적 정치인·행정기구의 등장을 포함한 정치적 분업과 각자가 자신의 생업에 우선적으로 매이는 "상업사회"의 대두라는 맥락이 있었기 때문이며, 아직 우리의 근대국가가 이러한 조건에서 벗어났다고 볼 이유는 없다. 그런 점에서 참여민주주의는 냉정히 말해 일종의 보조장치 이상의 역할을 유의미하게 인정받았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없이 "참여" "시민" "민주주의"란 개념을 곧바로 과학기술 혹은 과학기술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은 정치적·사상사적으로 조잡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시민으로서의 과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정도 이상의 노력을 요구한다.

셋째, 앞의 두 가지 믿음을 뒷받침하는 전제로, 많은 과학자들은 한국과학기술발전에 있어 국가의 무능·무책임·방치를 비난하고는 한다. 여러 학문들의 역사를 비교해 본다면 이 클리셰는 엄밀히 말해 사실이 아니다. 한국의 "국가학문"이라는 말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공학발전의 역사가 보여주듯, 한국의 국가는 과학기술에 다른 학문분과들과 비교할 때 명확히 높은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상대적으로 과학자들, 적어도 과학자들의 대표들에게 비교적 높은 수준의 발언권을 부여했다. "이공계의 위기" 담론에서부터 이공계 지원정책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과, "인문학의 위기" 담론에서부터 유의미한 인문계 지원정책이 등장하기까지의 시간--물론 인문학 전공자들은 "유의미한" 인문계 지원정책이 있었느냐에 먼저 의문을 품겠지만--을 비교해보면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내 생각에 한국 과학기술은, 물론 내부의 여러 영역들 사이에 편차가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박정희 정권 이후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으며 이는 지금도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비록 자신들이 인식하지 못해왔다 할지라도 이공계 학계는 이런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과학분야 정책에 개입해왔으며 인문학계 인사들과 비교할 때 제도적 행위자로서 상대적으로 훨씬 능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걸 볼 수 있다(그것이 현 정부의 공약 및 정책집에서 이공계에는 따로 항목이 부여되지만 인문사회는 애초에 제대로 다뤄지지조차 않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이것이 현재의 행정기구가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지만, 그것이 "국가가 이공계를 버렸다"는 식의 성토를 정당화해주는지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 공정하게 말한다면, 이공계를 포함한 한국의 여러 분과학문은 각 분과에 적합한 좋은 통치모델을 탐색하지도,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인적자원을 충분히 육성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관료와 행정의 무능만을 탓하는 건 이상한 냉소주의만을 낳는 오판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좀 더 폭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세 가지 사례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만약 과학자가 좀 더 좋은 과학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리고 제도와 환경의 개선을 통해 여기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과학 이외의 영역을 진지하게 탐색하고 습득하거나 적어도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물론 나는 이 깨달음이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훨씬 더 간절하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으로서든, 시민으로서든, 제도적·정치적 행위자로서든 우리는 어느 한 분야만의 절대적인 우위 혹은 자족적 충분함을 주장할 수 없다. 우리의 삶과 세계의 복잡성은 몇 개의 영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초과하며, (좁은 의미의) 자연과학을 비롯한 우리의 지식은 오로지 분업과 협업을 통해서만 유의미하게 기능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처음의 소재로 돌아가자면,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고 전자를 완벽하고 순수한, 유일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후자를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고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식의 태도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해로운 공돌이" 식의 발상이다. "해로운" 문돌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그냥 그가 자신이 잘 모르는 영역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지 특별히 문돌이라서가 아니다--이런 실수는 분과학문에 무관하게 어디서든 벌어진다. 그래도 그 말을 굳이 써야겠다면 이공계 전공자가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성평등에 부합하지 않는 발언을 할 때마다 "역시 교양이 떨어지는 해로운 공돌이 ㅉㅉㅉ"하는 반응을 기꺼이 감수할 준비도 하든가. 물론 나는 우리가 이런 한심한 범주화 놀이가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기꺼이 합의할만큼은 성숙했다고 믿고 싶다.


*글을 이해하지 못하고 쓰는 악플은 전혀 환영하지 않는다.

Trackback 0 : Comments 2
  1. 비이상 2017.08.28 02:08 신고 Modify/Delete Reply

    과학을 절대적인 합리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인간들을 '순진하다'고 표현하신 건 정확한 것 같습니다. '대뇌피질이 인간의 자유의지 어쩌고'라거나 '시간이 흐르면 예술도 수치화할 수 있는 도구가 개발될 것이다' 같은 의견을 늘어 놓는 고학력자 양반들 많이 겪은 제 느낌상으론 적어도 그들이야말로 절대자적 신을 기다리는 퇴행적 존재 같아 보였습니다. 세상만사를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언어로 논하는 걸 세속의 감정에 구애 받지 않는 간지 나는 철학자라고 착각하며 행세하는 꼴들이 참 우습더군요. 이런 것도 결국에는 탈이념화의 산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과학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기보다 과학이 인간의 비합리적인 부분마저 합리적으로 논증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그걸로 끝났다고 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 BeGray 2017.09.09 21:01 신고 Modify/Delete

      ㅎㅎㅎ 사실 합리성/비합리성 자체가 그렇게 똑 떨어지는 건 아닌 것도 있고, 같은 현상/대상이라고 해도 접근법에 따라 제각각 내용이 다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시는 일은 과학이 너무 강해서라기보다는 인문학이 너무 제 몫을 못하고 있어서 생기는 문제라고 보고 있어요. :)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