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근대성: 국가권력과 시민사회의 관계

Critique 2015. 5. 17. 18:41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기사에 이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댓글들이 어김없이 등장하며 그것도 꽤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 관련설문조사에서는 10% 정도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응답했는데, 일베와 같은 사이트가 10대-20대에 끼치는 영향을 감안한다면--나는 이 사이트를 폐쇄하는 대신 청소년 유해/불건전 사이트로 지정하는 게 제일 빠르게 '실천적'이겠다고까지 생각이 든다--실제로는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댓글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관된 논리는 "군대에게 총을 쏘았다면 폭동이 아니고 뭐냐"는 것이다. 이 논리는 그 형식상 단순히 반-윤리적 충동에 의하기보다는 조금 뒤틀린 형태의 '윤리적' 입장에 기인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군대는 국가권력이며, 국가권력은 그 안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절대선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믿음이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5.18을 폄하하는 우파의 새로운 목소리에는 아주 강력한 형태의 국가주의가 깃들어 있다. 이들은 바로 그 군대가 광주의 저항적인 시민들을 폭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투입되었다는 맥락을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단지 국가가 보낸 군인들이라는 역할에 맹목적인 숭배를 기울인다. 군대의 공격을 받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생명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싸운다는 최소한의 저항권은 이러한 국가 숭배자들의 눈에는 띄지 않는다; 얼마 전 4.18 세월호 집회의 충돌을 둘러싸고 <이대학보>에서 나온 칼럼은 이러한 순진한 형태의 우파적 인식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5.18 폭동론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17세기 이래 서구근대사회의 이념을 형성해온 텍스트들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저항권을 인정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그러나 낡은) 우파적 사고는 근대사회의 자연권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합의조차도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전근대 혹은 탈근대적이다. 한국의 새로운 국가주의는 2008년 남북관계가 경직된 이후 점차 가시화되었는데, 외부의 적에 대항하는 주체로서의 국가를 인정하고 그에 동일시되는 논리는 오늘날 가장 명백한 종류의 국가폭력/범죄에도 면죄부를 주기에 이르렀다.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또 그에 대립하는 시민의 권리가 잊혀지는 것은 같은 사태의 동전의 양면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등장 배경을 추적하는 과정의 중요성과 별개로, 이러한 사태가 오늘날 우리에게 환기하는 것은 우리가 근대사회의 가장 자명한 물음들, 즉 국가권력의 작용과 시민권에 대한 사고를 거의 떠올리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고전적인 경제학적 사유--고전파 경제학은 문자 그대로 시민사회의 학문이다--에서 국가권력은 시장이라는 자연현상 앞에서 멈추어서야 했다면, 따라서 (푸코가 지적하듯) 시장경제는 국가권력을 제약하는 영역이기도 했다면, 한국에서 시장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계획하고, 만들어내고, 조정하고, 재생산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고전적인 시민사회=시장 대 국가권력이라는 구도가 성립하지 않는다(시민사회와 시장의 분리를 첨예하게 지적한 것은 맑스에 와서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로부터 한국 현대사의 독특함을 볼 수 있다--바로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일방적인 권력관계 말이다. 뉴라이트적 역사에서 한국은 식민지기와 이승만-박정희를 거치면서 법적인 소유권, 계약의 권리를 확보하고 대량생산-소비에 도달하며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룩했다면, 이와 같은 근대화의 서사는 한국사회의 독특함, 다른 무엇보다도 독자적인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고 국가와 시장권력을 견제하며 개입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영역이 자리잡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망각한다(정확히는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와 준법의 문제만이 중요해지는데, 이것들은 담론과 실천 양자의 영역에서 아주 제한적인 역할만을 갖는다). 다시 말해 근대국가의 주요한 요건이 단지 법적/경제적 성취만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폭주 혹은 자의적 행사를 견제하는 힘의 등장에 있고, 시민사회의 영역이 이러한 힘이 창출되는 근원 중 하나라면, 뉴라이트적 서사는 이러한 사실을 지워버림으로써 오늘날 행정력의 과도한 활용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제어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 자체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국가, 혹은 국가와 결합한 자본의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시민권력의 문제, 다른 한편으로는 행정권력이 시민권력을 염두에 두면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함께 인식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근대화의 기준이,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당성의 요건이 국가=법과 경제=물질적 풍요로만 간주될 때, 국가폭력과 대항하는 시민적 저항은 폭동과 범죄로만 인식될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5.18을 폭동으로 부르는 이들과 세월호 집회를 불법폭동으로 규정하는 이들은 오늘날의 도덕감정 혹은 윤리의 타락을 보여주는 별개의 사례들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근대사회를 규정하는 특정한 논리의 일관된 산물이다. 실제로 세월호 집회를, 나아가 데모를 폭력으로 규정하는 모든 이들이 5.18을 폭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양자는 동일한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새로운 우파들에 맞서 팩트싸움을 벌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비판은 그 심장을, 그 근본적인 논리를 겨냥하고 행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팩트싸움은 충분하지 않다. 뉴라이트들이, 그리고 한국의 우파들이 공유하는 국가-사회관이 얼마나 단순하고, 조잡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위험한가를 꺼내어 보여주어야 한다. 바로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근대의 합리성이라는 기준 자체를 통해서 말이다. 그들의 입장은 지나치게 근대적이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근대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들을 꾸짖고 욕하는 걸 넘어 국가행정과 시민사회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실천에 가깝다--역사는 단순히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 기초해서 오늘날을 규정할 수 있기에 주의깊게 숙고해야 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정한 경의는 그들의 죽음을 기리는 것을 넘어 그들이 삶과 죽음으로 목표했던 바를 현실화시키는 순간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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