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정치와 그 위기

Critique 2015. 6. 12. 03:18

사회비평 및 인문교육 관련자들은 한번쯤 숙고해 볼 만한 문제를 다루는 글이라 링크한다(http://www.vox.com/2015/6/3/8706323/college-professor-afraid). 아래는 이 글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다.



 온라인에서 읽기에 조금 길게 느껴질 수 있는 본문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필자는 최근 대학생들이 스스로의 '불편함'을 근거삼아 곧바로 교수자에게 제도적 압력을 가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으며 이는 특히 고용보장을 받지 못한 계약직 교수자들이 논쟁적인 주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상황을 낳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오늘날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를 다룰 때 사람들은 이제 합리성에 기초한 의견교환을 수행하는 대신 주관적인 감정, 예컨대 '불편함'과 같은 요소에 의지하는 데서 기인한다. 정념이 그 자체로 하나의 주요한 판단근거로 간주될 때 사람들은 토론을 바탕으로 서로의 의견을 시도하는 대신 곧바로 서로에 대해 배타적인 결정을 하도록 유도된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지목하며, 서로의 주관성을 넘어서는 객관성과 합리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필자의 논지에 동의하느냐를 떠나 이 글에서 문제삼고 있는 특정한 경향성은 비판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필자는 문제의 최종적인 비판을 정체성 정치에 돌리고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오늘날 개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치에 좀 더 주목하고 싶다. 정체성 정치가 감정의 정치가 등장하는 이론적 토대를 부분적으로 제공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 후자는 단순히 전자의 산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오늘날 감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판단근거로 인정받아가는 중이며--다만 한국에선 권위주의 및 반-감성주의 담론이 그에 못지 않게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짚어두자--최근의 맑스 코뮤날레에서 볼 수 있듯 감정(정동affect)은 일상, 문화 등과 함께 새로운 비판이론적 조류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그 자체로 (서구) 근대사회 및 현대 민주주의체제의 본질적인 특성과 결부되어 있다.


 감정이 단순히 억누르고 잊어버릴 수 없는 실체적인 요소로 등장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부터의 긴 시간을 잘라낸다고 하더라도 17-18세기 서유럽 사상사를 어느 정도 훑어야 한다. 지금 그 작업을 할 것은 아니므로, 일단은 대표적으로 루소에게서 볼 수 있듯 '자연스러운 감정'이 인간학과 사회이론 모두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갖는다는 믿음이 생겨났고 오늘날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사실만 짚어두자. 즉 18세기를 거치면서 인간학에서는 사회적 제약과 대결하는 자연스러운 애정--니클라스 루만의 용어를 빌리면 "열정으로서의 사랑"liebe als passion--을 칭송하는 담론이, 사회이론에서는 정치경제학의 사치논쟁에서 볼 수 있듯 부와 이윤,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성향을 억압하기보다는 그것을 활용해 국부(國富)를 증진시키는 쪽이 현명하다는 담론이--여기서 한 발자국 나아가면 중농주의 이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장의 자연적 성격'이 있다--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나는 여기에서 근대의 시민성과 통치성에 고유한 특징을 발견한다. 즉 시민성의 측면에서 주관에 기초한 '자생적인'spontaneous 정념을 절대적인 판단근거로 삼는 태도가, 통치성의 측면에서는 그러한 정념을, 그리고 정념이 창출되는 시민사회를 어떻게 관리하고 조절하고 통치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 출현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한국은 아직 근대적 시민성 및 통치성에 도달하지 못한 셈이다.


 일단은 이러한 입장이 출현한다는 사실만을 지적하고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를 건너뛰자. 선진자본주의 국가를 기준으로 20세기 후반은 감정의 정치가 본격화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통상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역사서사를 참고한다면, 그때까지 대학의 지식인들을 포함해 사회 주도집단--소위 "서구-백인-이성애자 남성-부르주아"--이 독점하던 '보편적 합리성'은 대대적인 비판에 직면한다. 즉 그것이 스스로가 주장하는 바처럼 보편적인 타당성을 갖는 대신 특정한 집단의 관점과 이해관계를 반영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이 끼친 영향은 각 영역마다 적지 않은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대중문화 및 대중정치 담론에서 보편성과 합리성, 객관성은 손쉽게 쓰기 어려운 단어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와 함께 그때까지 "정치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영역들, 대표적으로 국가, 계급의 이해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문화'와 정체성 같은 영역이 새로운 정치적 의제로 떠올랐다. 피해자중심주의와 같은 키워드가 대변하는 (남성의 언어 및 경험이 포착하지 못하는) 여성적 경험, 이성애적 관점에서는 사고되지 못하는 퀴어 주체의 경험, 인종적 정체성, 피식민 경험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해방이 요구되었을 때 문화-정체성-경험을 떠받치는 주요한 개념적 도구로 감정의 위상이 다시금 상승한다.


 감정은 한편으로 주관적 경험이되 사회의 객관적 모순이 각인되는 영역으로서 새로운 객관성을 부여받게 되며,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불편함' '혐오'와 같은 감정은 여론의 형성에서 그 자체의 시민권을 획득했다; 비밀투표가 타인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합리화할 필요조차 없는 밀폐된 내면을 창출했다면,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그 자체로 중요한 권리로 존중받는 사회에서 감정은 개인의 쾌락/고통과 결부되어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판단근거로 등장한다. 불쾌감은 고통으로서 실체적인 손해로 간주된다. 따라서, 링크한 글에서 이야기하듯, 우리는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도 타인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처음에는 전통적인 '합리성' '객관성'이 보지 못하는 지점을 겨냥하는 비판적/좌파적 도구로 도입되었으나, 그 필연적 귀결로 오늘날에는 심지어 극단적으로 보수파들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이르렀다. 다시 말해, 최초에 감정의 정치가 합리성의 무력함을 비판하며 등장했다면, 보편성/객관성의 측정기준이 실증데이터를 다루는 전문가들에게만 허락된 오늘날 감정의 정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전가의 보도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신좌파나 정체성 정치의 입지가 아직도 크다고 할 수 없는 한국의 경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감정의 정치 자체에 대립각을 세우는 입장이 강력하게 공존함을 지적해야 한다. 한편으로 보수적인 권위주의는 여전히 큰 점유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감정의 정치가 갖는 주관성을 비판하는 반-감상주의적 입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감정의 정치가 야기된 상황, 즉 보편성/객관성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현실적인 권력관계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권위주의적 보수 역시 담론의 차원에서 더 이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권위주의자들은 벌써 감정의 정치에 합류했다--단지 우파적 방향으로 휘두를 뿐이지만 말이다. 이미 감정을 판단근거로 삼는 상이한 입장들 간의 충돌은 곳곳에서 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반동으로 애초에 감정을 정치적 영역으로부터 추방하려는 반-감상주의자들 역시 득세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감정이 문제적 개념으로 자리잡은 사회에 속해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보편적 설득력을 갖는, 적어도 그렇다고 합의된 영역의 발명의 필요와 맞닥트리고 있다. 단적으로, "나는 김치년/호모새끼/라도/동남아/깜둥이/거지새끼...등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상대방과 어떻게 대화할 것이며, 그러한 입장에 내재한 폭력성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본문에 언급된 대학의 사례에서처럼, (질적 판단능력을 상실한) 고용자가 고객의 '불편함'을 이유삼아 피고용자를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구조와 어떻게 각을 세울 것인가? 노골적으로 감정을 통치하고 조종하려는 지배적 권력의 시도를 어떠한 논리로 거부할 수 있는가?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처럼 '개인의 감정'에 절대적인 위상을 부여하려는 것으로는 더 이상 사회정의의 기획이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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