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의『미국인』: 구세계의 뉴먼

Critique 2015. 1. 23. 23:08

마찬가지로 2014년 2학기 기말과제. 대학원 과정에서 썼던 글 중 가장 힘들게 썼고, 제출 직전까지도 악전고투했다. 페이퍼 첨삭을 받아들고 다른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한국어를 이렇게 조악하게 썼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적받은 사항 중 당장 손 볼 수 있는 지점만을 수정하여 올린다. 나름의 완결된 논리를 만들긴 했지만 아쉬운 점이 많은 글. 19세기 미국소설은 정말로 낯선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구세계인들이 신세계를 다녀오면 어떤 형태로든 놀라움/경악스러움을 표시하는 글을 쓰곤 했다는 게 새삼 생각이 난다. 두 세계에 단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이 없는 나조차 이런 차이를 느낀다면, 그들에게는 도대체 얼마나 큰 차이였을까. 여기에서 말하지 못한 내용들도 있고, 마치 정글에서의 시간처럼 험하고 생산적인 한 학기 수업이었다...






헨리 제임스의『미국인』: 구세계의 뉴먼(Newman in the old World)


1.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미국인』(The American)을 이해하는 가장 일반적인 도식 중 하나는 미국인 주인공 크리스토퍼 뉴먼(Christopher Newman)과 그와 마주한 구세계--19세기 후반의 유럽, 보다 구체적으로 제2제정의 몰락을 앞둔 프랑스--귀족 간의 대립구도 하에서 소설을 읽는 것이다. 앵거스 렌(Angus Wrenn)의 정리에 따르면, “『미국인』에서 구체제를 상징하는 벨가르드 가문은 구세계의 타락상의 결정판으로, 크리스토퍼 뉴먼의 때 묻지 않은, 민주적인 자수성가의 순수함과 대조되는 위치에 있다”("In The American, the ancien régime Bellegardes had represented the last word in the corruption of the Old World, contrasted with the unsullied, democratic self-made purity of Christopher Newman." 51). 그러나 순수함과 타락함의 대비를 강조하는 구도는 종종 전자를 상징하는 뉴먼 또한 텍스트에서 특정한 형태로 주조된 인물형임을 망각하게 한다. 이를 에릭 해럴슨(Eric Haralson)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미국적 순수함과 유럽의 부패 사이의 대결구도에 집중하면서 뉴먼의 남성성이 보여주는 독특한 양식을 무시해오곤 했다”("Most readers have slighted Newman's distinctive style of masculinity, focusing instead on [...] the contest between American innocence and European corruption [....]" 475). 해럴슨의 지적은 『미국인』이 제임스의 소설들 중 비교적 드물게 미국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과 함께 다른 무엇보다도 그 표제에서부터 (민족에 기원한) 특정한 인물의 형상을 강조하고 있는 텍스트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타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예컨대 루이스 O. 사움(Lewis O. Saum)의 비평이 보여주듯, 뉴먼의 미국적 성격만을 독립적으로 해명하는 시도는 이 텍스트가 ‘구세계 유럽에 온’ 미국인을 다룬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릴 위험이 있다. 『미국인』은 상이한 역사적 조건에서 배태된 인물들의 대면을 다룬 소설인 동시에 피터 브룩스(Peter Brooks)를 위시한 여러 평자들이 지적하듯 세부 장치 및 인물들의 배치 자체에서도 선명한 멜로드라마적 성격을 지닌다(Brooks[1987] 62).1)

이 글에서 의도하는 바는 이처럼 상이한 성격들을 동시에 드러내는 제임스의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 신세계의 인물과 구세계의 대면이라는 (그 자체로 멜로드라마적인) 대립구도와 뉴먼이 보여주는 인물형을 연결시키는 데 있다. 『미국인』은 플롯과 인물 중 어느 하나가 우위를 점하는 텍스트가 아니며, 오히려 인물에게 좌절을 강요하는 플롯의 전개는 그 자체로 인물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면서 동시에 인물의 본질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2) 주지하다시피 제임스의 소설은 구세계에 도착한 뉴먼이 자신을 거부하는 구세계의 (잔존하는) 거대한 힘과 부딪혀 결혼이라는 최초의 목표에 결국 도달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를 순수한 인물이 타락한 세계에서 어떠한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축소시키지 않으려면 좌절을 겪는 인물에 내재한 독특함을 해명하기 위한 구체적인 분석이 요구된다. 소설의 제목이 그 자체로 가리키는 바를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크리스토퍼 뉴먼은 그 이름에서부터 한편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new) 남성(man)으로서 그 이름에 전형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부여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구세계에 온 ‘새로운 남성’(new man)이 겪는 일을 다루는 소설의 줄거리는 이러한 전형이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을 갖는지, 그리고 그러한 특징이 어떤 순간에 문제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글은 텍스트의 중심에 있는 갈등구도를 따라가면서 그 갈등구도의 전개가 뉴먼에 응축되어 있는 특정한 인물형을 어떻게 드러내는가를 다루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드러난 성격 자체가 어떻게 뉴먼 자신의 목표를 좌절시킬 수밖에 없는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소설의 첫 대목을 보자. “1868년 5월의 화창한 날, 한 신사가 그때 루브르 박물관 살롱 까레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커다랗고 둥근 장의자 위에 편하게 몸을 늘어트리고 있었다”("On a brilliant day in May, in the year 1868, a gentleman was reclining at his ease on the great circular divan which at that period occupied the centre of the Salon Carre, in the Museum of the Louvre." 33). 한편에는 공간적 배경이자 문자 그대로 지금까지의 유럽문화가 축적된 루브르 박물관이, 다른 한편에는 갓 미국에서 건너온 크리스토퍼 뉴먼이 있다. 뉴먼이 취한 자세, 곧 감상자가 편하게 몸을 눕힌 상황은 이 장면에 비대칭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미술품”("fine arts"), 그것도 루브르에 전시된 예술품 앞에서 감상자가 취할 수 있는 자세가 어느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누운 자세가 ‘적절한’ 자세에 속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제임스는 이 기묘하고 다소 유머러스한 상황을 보다 자세히 묘사한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쭉 편 [...] 신사는 자신의 자세를 무척이나 즐기면서 무리요의 아름다운 달에서 태어난 마돈나를 쳐다보고 있었다”("the gentleman [...] with his head thrown back and his legs outstretched, was staring at Murillo's beautiful moon-borne Madonna in profound enjoyment of his posture."). 무리요의 「동정 수태」("Immaculate Conception") 앞에서 강조되는 영역은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그림을 바라보는 이가 내면에서 느끼는 미적 체험이 아니다. 이 인용문에서 서술자의 시선은 뉴먼의 신체 자세를 먼저 짚고 그 뒤에 미술품을 잠시 경유한 뒤 다시금 뉴먼이 자신의 자세에서 무엇을 느끼는지를 향한다. 뉴먼이 “즐거움”("enjoyment")을 느끼는 원인은 텍스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체적 상태("his posture")이다. 모자를 벗고 땀을 닦게 만드는 더위가("The day was warm"), 뉴먼의 신체에 충만한 원기와 정력("the sort of vigour that is commonly known as 'toughness'")이 상황을 구성하는 보다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미술품이 가져다주는 예술적 경험은 “미학적 두통”("aesthetic headache")으로 대체된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과의 대면이 가져다주는 난해함은 “두통”이라는 신체적 감각의 용어로 표현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뉴먼의 ‘미감없는’ 감각적 신체가 『미국인』의 첫 대목을 채우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그의 신체적 감각이 예술적 경험 자체를 대체하듯 그의 신체, 곧 (신체적) 감각이 존재하는 장소가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예술적/문화적 전통이 축적된 장소를 대신한다.

더위와 같은 외적 자극으로 인한 감각과 신체 ‘내부’를 채운 에너지에 대한 묘사가 끝난 뒤 첫 문단의 나머지 반은 뉴먼이라는 독립된 주체=공간이 자신의 외부에 위치한 미술품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갖는가를 서술하는데 할애된다. 그는 카를 베데커(Karl Bädeker)의 여행자 가이드를 통해서 루브르의 예술작품을 선별하며, 복사본과 원본을 구별할 안목이 없다("he had often admired the copy much more than the original." 34). 그러나 이러한 대목에서 드러나는 미적 취향 및 감식안의 부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술품을 대하는 방식 그 자체다. “약삭빠르고 유능한 친구”("a shrewd and capable fellow")인 뉴먼에게 “라파엘과 티치아노 그리고 루벤스는 새로운 방식의 산술법이었다”("Raphael and Titian and Rubens were a new kind of arithmetic"). 예술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과정은 그에게 “산술법”이란 용어로 표현된다. 이 단어는 이윽고 밝혀지듯 화폐를 단위로 하는 계산을 의미한다. 그가 처음으로 만난 프랑스인 노에미 니오쉬(Noémie Nioche)에게 꺼내는 첫 마디는 그녀가 그린 그림의 가격이 “얼마인지”("How much" 37)를 묻는 것이다. 마돈나를 그린 그림 앞에서 그는 곧바로 “나는 가톨릭이 아니지만, 그 그림을 사고 싶소. 얼마요?”("I am not a Catholic, but I want to buy it. Combien?")라고 덧붙인다. 뉴먼의 말은 그가 가톨릭교도든 아니든--우리는 클레르를 포함한 벨가르드 가문의 종교가 매우 보수적인 가톨릭임을, 그리고 그들 앞에서도 뉴먼은 종교 따위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것임을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가 화폐와 상품의 교환관계에 참여하는 주체, 화폐를 가진 구매자라는 사실만이 중요함을 함축한다. 그리고 뉴먼의 질문은 비록 조잡한 수준으로나마 무언가 그림을 그리던 노에미의 손이 스케치를 그리는 도구가 아닌 수표에 물품대금액수를 적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연필”("pencil")을 붙잡도록 한다.

루브르에 누워 있던 뉴먼이 노에미를 만나는 순간까지의 장면에서 우리는 뉴먼의 두 가지 특성을 본다. 백만장자 사업가("an American millionaire interloper" Wrenn 25)로서 자신의 앞에 놓인 무언가를 구매와 투자의 대상으로 보는 면이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측면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그의 지각의 중심에 바로 그 자신의 신체가 하나의 완결되어 닫힌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루브르의 그림들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어떠한 중요성도 없는 것처럼, 뉴먼에게는 신체를 통한 자극과 내면에서 발생한 감각만이 유효하며 이는 그 자신에게 자기 앞의 대상과 어떠한 실질적인 교류도 하지 않는 일종의 자기 충족적 성격을 부여한다. 루브르와 그곳에 있는 구세계의 축적물은 뉴먼에게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도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예술적 체험에 감응하는 대신 앞으로도 날씨가 얼마나 덥고 추운가를, 자신의 자세가 얼마나 편안하고 불편한가를 먼저 생각하고 느낄 것이다. 구세계에서 무엇을 마주하든 뉴먼은 (신체적 감각의 차원에서) 자기 자신이 지금껏 생각해오고 판단하던 방식으로 그것을 대하며 이는 당연히 사업가 또는 자본가의 사고방식으로 구성될 것이다--진정한 사업가란 자신이 거래하는 상품이 무엇이든 오로지 거래에서 얼마만큼의 이윤과 손실이 발생하는지 만을 생각하는 법이니까. 우리는 이 짧은 대목에서 추출해낸 뉴먼의 성격이 어떻게 텍스트의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지를 그리고 필연적으로 구세계에서 그 자신이 겪는 실패에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상황을 보게 된다.



2. 구세계


브룩스는 『미국인』에 여러 플롯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뉴먼과 클레르 드 생트레(Claire de Cintré)의 결혼을 둘러싼 과정이 텍스트의 가장 중요한 기둥을 이룬다면, 발랑탱(Valentin) 및 노에미 니오쉬와의 관계는 전자와는 어느 정도 구별된 반(半) 독립적인 서사로 존재한다("most of all in the drama of Claire de Cintré's possible liberation by the American, and secondarily in the subplot of Valentin de Bellegarde and his adventure with Noemie Nioche" Brooks[1987] 57). 우리는 이 서사들에서 동일한 모티프를 발견할 수 있다. 클레르와의 서사에서 뉴먼과의 결혼이 그녀 자신이 처한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해방으로 제시되는 구도가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그가 발랑탱 및 노에미와 만나며 벌어지는 일들에서도 표현의 선명함이 비교적 덜할지언정 마찬가지의 구도를 볼 수 있다. 구세계에서의 삶은 그 거주자들에게 마치 거대한 속박처럼 덧씌워져 이들 모두의 삶에 어떠한 새로운 가능성도 찾을 수 없는 몰락과 쇠퇴, 무기력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뉴먼이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인간으로서 미국인을 대변한다면, 이들은 이제 명백한 쇠락의 기운을 보여줄 뿐만이 아니라 더 이상의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오래된 세계의 거주민들로서 이들의 삶에 활기가 결여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구세계 유럽의 부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뉴먼이 두 번째로 마주치는 구세계인 무슈 니오쉬(M. Nioche)에 대한 묘사가 최초로 이뤄지는 대목을 보자.

“무슈 니오쉬는 부자연스러운 빛깔의 번들거리는 가발을 쓰고 있었는데, 가발은 그의 온순하고, 하얗고, 텅 빈 작은 얼굴 위로 툭 튀어나와 있었으며 그 꼴은 이발소 창 너머 가발을 전시해놓기 위해 배치해놓는 [머리모양의] 밋밋한 덩어리보다 특별히 볼 것도 없을 정도였다. [...] 그는 몰락한 신사의 정교한 이미지와 같았다. 발악이라도 하듯 열심히 빗질했지만 털이 부족해 보기 흉해진 코트, 구멍이 기워진 장감, 매우 문질러댄 부츠, 녹슨 예쁜 모자들이 “갖고 있던 것들을 다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다른 것들 중에서도 무슈 니오쉬는 용기를 잃어버렸다. 역경이 그의 삶을 망가트리고 겁주었기에, 혹시라도 적의어린 운명을 깨울까 두려운 마음에 그는 자신의 여생을 눈에 띌 정도로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건너가고 있었다.”

"M. Nioche wore a glossy wig, of an unnatural color which overhung his little meek, white, vacant face, and left it hardly more expressive than the unfeatured block upon which these articles are displayed in the barber's window. [...]  He was an exquisite image of shabby gentility. His scant ill-made coat, desperately brushed, his darned gloves, his highly polished boots, his rusty, shapely hat, told the story of a person who had "had losses" [....] Among other things M. Nioche had lost courage. Adversity had not only ruined him, it had frightened him, and he was evidently going through his remnant of life on tiptoe, for fear of waking up the hostile fates." (40)

“부자연스러운 빛깔의 가발”에서부터 닳아빠지게 “문질러댄 부츠”에 이르기까지 서술자의 시선은 니오쉬의 전신을 훑으면서 그 행색의 초라함을 상세하게 열거한다. 낡고 볼품없어진 것은 외적인 행색만이 아니라 내면 또한 마찬가지로, 서술자는 그의 인상을 종합하여 “갖고 있던 것들을 모두 잃어버린” “몰락한 신사”라는 표현으로 정리한다. 니오쉬는 자신의 딸 노에미가 그림에 별다른 재주가 없음을 알면서도 다른 삶의 방도를 제시해줄 길이 없다. 이는 딸이 뉴먼을 상대로 사기에 가까운 행각을 벌이고 마침내 남성들을 유혹하여 살아가는 “요부”("coquette")로서의 길에 접어드는 순간까지 딸에게 끌려 다니는 무력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뉴먼이 (노에미를 제외하고) 최초로 만나는 유럽인이면서 동시에 클레르와의 관계가 실패로 돌아간 소설의 후반부(25장)에 다시 등장하여 뉴먼이 마지막으로 대면하는 유럽인--마지막 26장에서 그가 만나는 인물은 미국인 트리스트럼 부인(Mrs. Tristram)과 영국인 브레드 부인(Mrs. Bread) 뿐이다--이 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뉴먼이 ‘미국인’인 것만큼이나 ‘유럽인’이다. 그러한 ‘유럽인’은 과거 한 때 나름의 성취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가진 것이 없으며 무언가 새로운 사업을 결행할 능력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은 노인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무기력의 모티프는 니오쉬보다 젊은 발랑탱 드 벨가르드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그는 뉴먼과의 첫 대화에서 “당신은 성공한 사람이고 나는 실패자”("You are a successful man and I am a failure" 137)라고 잘라 말한다. 뉴먼은 재산을 모으고 건물을 짓는 등 무언가를 ‘했다’고 할 수 있는 반면 자기 자신은 “지금까지 무엇이든 해놓은 게 없으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I have done nothing--I can do nothing!")는 게 그 이유다. 그 다음에 마주쳤을 때 발랑탱은 자신의 무력감을 보다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미국이니까 태어난 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겠죠. [...] 주변을 둘러보고 거기에 그저 몇 발짝 걸어가 붙잡아오기만 되는 것들로 가득한 걸 알았겠지. [...] 나는 벨가르드 가문이기 때문에 사업을 할 수도, 돈을 벌수도 없었소. 마찬가지로 벨가르드 가문이기 때문에 나는 정치를 할 수 없었죠--벨가르드 가는 보나파르트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 부유한 소녀와 결혼을 할 수도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어떤 벨가르드 사람도 평민이랑 결혼해본 적이 없고, 내가 그런 일을 시도해보는 것 자체가 불손하기 때문이었죠. [...]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곤 교황을 위해 나가서 싸우는 것뿐이었어요.

Being an American, it was impossible you should remain what you were born, [...] you looked round you and saw a world full of things you had only to step up to and take hold of. [...] I couldn't go into business, I couldn't make money, because I was a Bellegarde. I couldn't go into politics, because I was a Bellegarde--the Bellegardes don't recognize the Bonapartes. [...] I couldn't marry a rich girl, because no Bellegarde had ever married a routière, and it was not proper that I should begin. [...] The only thing I could do was to go and fight for the Pope. (140)

부정어구로 가득한 이 문단에서 발랑탱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은 그가 교황을 지지하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벨가르드 가문의 이름과 함께 따라오는 의무는 변해버린 시대에 맞지 않는 갖가지 제약으로 남아 그 구성원인 발랑탱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를 제약할 수 있는 가족이 없었던("I haven't any house to call my own, or anything in the way of a family" 186) 뉴먼이 어떠한 구속에도 붙들리지 않은 채 만사를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면, 발랑탱은 자신이 뉴먼과 정 반대로 시작부터 모든 일이 정해져 있는 운명 하에 태어났다고 느낀다(벨가르드와 니오쉬 가족을 포함해 구세계에서 뉴먼이 마주하는 가족들 전부가 어떤 형태로든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작은 일이라도 무언가 행동하고 성취하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운명이나 다름없는 가족은 그에게 교황을 위한 낡은 의무3)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았기에 발랑탱은 자신의 삶을 자조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4)

발랑탱의 삶을 불구로 만든 벨가르드 가문은 『미국인』에서 가장 선명하게 구세계를 상징하는 집단이기도 하다. “[벨가르드] 가족은 9세기에서부터 내려왔으며 왕당파 전통의 명맥을 잇고 있다”("The family descend from the ninth century; they perpetuate the royalist tradition" Tuttleton 151). 그리고 클레르 드 생트레의 삶은 이 가족과 가족이 대변하는 구세계의 오래된 전통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압살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그녀는 재산과 지위를 모두 필요로 했던 가족의 뜻에 따라 심하게 나이차가 나는 결혼을 억지로 해야만 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결혼에 대한 요구를 거부하고는 있지만 가문의 시점에서 볼 때 클레르는 그녀 자신의 감정이 어떠하든 간에 언제든 적당한 혼처가 나타나면 가문의 번영을 위해 매매될 수 있는 자산에 가깝다. 그녀와 막역한 사이인 트리스트럼 부인은 뉴먼이 클레르에게 흥미를 갖자 그에게 “날개를 펼친 독수리는 자신의 날개를 사용할 의무가 있으니 [...] 날아가서 생트레 부인을 구출하세요!”("The spread eagle ought to use his wings [...] Fly to the rescue of Madame de Cintré!" 122)라고까지 말할 때, 클레르는 바로 자기 자신이 속해 있는 벨가르드 가문으로부터 구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극도로 폐쇄적인 이들은 경제적으로도 영락했을 뿐만 아니라("their fortune is small, and they make a common household, for economy's sake" 74) 이후 뉴먼이 브레드 부인을 통해 추정하는 바에서 드러나듯 도덕적으로도 타락했다. 비교적 젊은 우르뱅 드 벨가르드(Urbain de Bellegarde) 부부를 포함해 이 가문에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태어나지 않고 있으며 발랑탱이나 클레르는 물론이고 우르뱅 드 벨가르드 부인마저도 자신의 삶이 “따분해 죽을 정도”("I am bored to death" 297)라고 토로한다. 한 마디로 단순히 부패와 결핍만이 아닌 쇠락과 불모까지도 이 오래된 귀족 집안을 뒤덮고 있다.

상기한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 뉴먼이 구세계에서 마주하는 이들은 매우 유사한 경향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귀족(벨가르드 가족)과 부르주아(니오쉬 가족) 모두 영락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의 생산 또한 불가능한 상태다. 구세계의 새로운 인간으로서 뉴먼은 바로 이러한 불모상태에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3. 투자가적 행동양식


여러 비평가들이 아울러 지적하듯 뉴먼은 막대한 재산축적에 성공한 자본가이다. 서술자는 직접적으로 “크리스토퍼 뉴먼의 인생에서 유일한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그가 자리한 지점은, 그 자신이 느끼기에, 공격적인 기회를 활용해 단순히 한 재산을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재산은 크면 클수록 좋았다”("Christopher Newman's sole aim in life had been to make money; what he had been placed in the world for was, to his own perception, simply to wrest a fortune, the bigger the better, from defiant opportunity." 54)고까지 말한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해보았지만("I have been in everything" 130) 정작 “돈을 사용하는 방법, 황금의 물결을 집어넣는 데 성공한 삶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는 35년 간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Upon the uses of money, upon what one might do with a life into which one had succeeded in injecting the golden stream, he had up to his thirty-fifth year very scantily reflected" 54). 뉴먼 자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가 구세계에 건너온 목적은 지금까지 자신이 추구해온 삶에서 결여된 무언가를 채워 넣는 데 있다.

그렇다면 뉴먼은 자신이 목표로 했던 일에 성공하는가? 표면적으로 클레르와의 결혼이 실패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그가 지금까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영역을 자신의 삶으로 편입시켰다고 볼 여지가 있지 않은가? 브룩스는 뉴먼이 마지막에 복수를 포기하는 것을 일종의 윤리적 성취로 간주한다. 그에 따르면 뉴먼의 마지막 선택은 “권력의 비판이자 타인을 조종하고 타인의 자유를 부인하는 행위의 파괴적인 효과를 증명하는 것”("critique of power, a demonstration of the devastating effects of the manipulation of others--the denial of their freedom" 65)이다. 그러나 실제로 트리스트럼 부인과의 마지막 대화는 그러한 교훈으로 정리되기 어려워 보인다. 뉴먼은 자신이 찾아낸 비밀을 통해 벨가르드 가문을 겁주었다고 믿고("they were frightened" 449) 그것으로 충분한 복수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녀는 뉴먼의 자평을 반박하면서 벨가르드 가문이 다름 아닌 “당신[뉴먼]의 놀랍도록 선량한 품성”("your remarkable good nature")을 믿었기에 자신들의 우위가 전혀 흔들리지 않으리라 판단했다고 말한다. 곧 그들은 뉴먼이 결국에는 이 갈등구도를 끝까지 밀고 가는 대신 그로부터 무익함을 느끼고 복수를 포기하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날카로운 진술은 단순히 복수를 포기한 뉴먼의 태도에 대한 비난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는 소설을 통해 뉴먼이 보여주는 성격 혹은 행동양식에 대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앞서 언급했듯 뉴먼은 이전까지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결여된 무언가를 찾아 유럽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뉴먼과 유럽인들의 대면은 전자가 자신의 명시적인 목표와는 달리 여전히 지금까지 자기 자신의 몸에 배어 있는 태도, 즉 화폐를 매개로 관계 맺는 자본가의 행동양식을 고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절에서도 언급했듯 뉴먼이 유럽에서 최초로 알게 되는 사람들인 니오쉬 가족은 부녀 모두 그와 일종의 거래관계를 형성한다. 즉 노에미는 그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을 팔고 또 아버지를 통해 (지참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추가적인 모사본 생산을 주문받으며, 무슈 니오쉬는 돈을 받고 프랑스어를 가르쳐주도록 고용된다. 뉴먼이 그들에게 느끼는 일종의 인간적인 호의는 (매우 좋은 조건이라고는 해도) 화폐와 용역의 교환관계로 표현된다는 점이 부인될 수 없다. 그러나 뉴먼이 유럽인들과 맺는 관계에서 더 문제적일 수 있는 지점은 단순히 그것이 화폐를 통해 전개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화폐를 통한 관계 맺기에 함축된 거리감에 있다. 뉴먼이 니오쉬 부녀에게 인간적인 애착을 품었음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가 자신의 선의를 화폐지급을 통해 표현하는 순간 양자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비대칭적이 될 수밖에 없다. 뉴먼이 제공한 돈은 니오쉬 부녀의 삶을 깊은 지점에서 뒤흔들고 바꿔놓는 계기가 되지만, 역으로 니오쉬 부녀가 뉴먼의 삶과 인성에 (텍스트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는 실패감을 느끼기 전에는) 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제공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그들에게 돈을 건네면서 뉴먼의 위치는 그들의 삶을 관찰하는 관람객에 가까워진다. 뉴먼은 마치 동물원의 짐승들에게 먹이를 건네는 관람객처럼 니오쉬 부녀의 삶을 지켜보고 또 때때로 서툴게나마 개입할 수 있지만, 동물원의 짐승들이 관람객에게 무언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불가능하다--적어도 그는 그러한 계기들을 포착하지 못한다.

 소설의 주 서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벨가르드들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성격은 조금 더 분명하게 강조된다. 먼저 클레르를 보며 뉴먼이 떠올리는 감정을 살펴보자.

뉴먼에게 생트레 부인은 고상한 교육을 받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녀가 받은 교육이란 어려서부터 수수께끼 같은 예식 및 문화적 절차들을 통과하는 것, 어떤 고상한 사회적 필요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형성되고 빚어지는 것이었다. 이 모두가, 내[서술자]가 단언했듯이, 그녀가 희귀하고 값지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뉴먼이 말했음직한 식대로라면 매우 값비싼 물건, 그리고 자신의 주변 모두를 최고의 것들로 채우려는 야심을 가진 남자라면 이것이 기꺼이 소유할 가치가 있음을 알아차릴 물건 말이다.

Madame de Cintré gave Newman the sense of an elaborate education, of her having passed through mysterious ceremonies and processes of culture in her youth, of her having been fashioned and made flexible to certain exalted social needs. All this, as I have affirmed, made her seem rare and precious--a very expensive article, as he would have said, and one which a man with an ambition to have everything about him of the best would find it highly agreeable to possess. (165)

인용된 대목은 클레르에 대해 뉴먼이 갖는 감정의 성격을 (다소 거리를 둔 시선으로)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원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형식은 고귀한 물건에 대한 수집과 같다. 뉴먼은 클레르가 자신의 시야 안에 놓여있는 물건들 중에서 “최고의 것”이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며, 그녀를 향한 사랑은 소유라는 행위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부패하고 타락했으며 몰락 중인 벨가르드 가문에서 그녀를 ‘구출’하려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파산 직전의 상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행위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 뉴먼이 클레르에게 “나는 당신이 나와 결혼하면 안전해질 거라 굳게 믿어요”("I firmly believe that in marrying me you will be safe" 171)라고 말할 때 이는 언제든 더 열악한 처지의 다른 곳에 팔려갈 위험에서,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가게에 놓여 있는 위험에서 벗어나 세심한 보살핌을 받는 기념품 진열장에 전시될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클레르의 어머니이자 벨가르드 가문의 사실상의 지도자인 벨가르드 부인(Madame de Bellegarde)과 나누는 대화는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결혼의사타진에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는 부인에게 뉴먼은 직설적으로 “저는 돈이 아주 많지요”("I am very rich" 190)라고 답한다.

애초에 이 결혼의 성립을 위해서는 벨가르드 부인의 승낙을 받아야만 하며, 부인에게 딸의 결혼은 더 큰 가격을 받고 팔기 위한 상거래와 다를 바가 없었다는 점에서(Tuttleton 148) 뉴먼이 이 관계를 상품구매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치명적인 문제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뉴먼이 결혼 관계가 (클레르의) 소유자와의 상품거래관계로 등치될 수 있다고 너무나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것이다. 혼인을 통해 벨가르드 가문의 일원이 될 거라는 우르뱅 드 벨가르드 부인의 말을 반박하면서 그는 자신이 “오직 생트레 부인만 꺼내어 가져가길 원한다”("I only want to take Madame de Cintré" 214)고 답한다. 이어 벨가르드 부인이 “우리 모두는 높은 긍지를 지녔죠. 당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 끼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으면 좋겠군요”("we are all proud together. It is well that you should know the sort of people you have come among" 218)라고 말하자 뉴먼은 다시 한 번 강하게 자신은 그 무리와는 다른 사람임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그는 한편으로 ‘민주적인’(democratic) 태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결혼으로부터 자신이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오직 클레르라는 상품만을 빼내갈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이는 그가 “의무”("duties" 273)라는 표현을 접할 때마다 드러내는 거부감과도 이어져 있다. 최종적으로 벨가르드 부인은 뉴먼의 태도에 응답하기라도 하듯이 그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를 대며 파혼을 선언한다("We really cannot reconcile ourselves to a commercial person" 318).

뉴먼이 한 명의 ‘투자가’로서 유럽인들을 마치 사물처럼 다루는 측면이 강렬하게 나타내는 대목은 뜻밖에도 『미국인』에서 그가 맺는 관계들 중 가장 유의미해 보이는 발랑탱과의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앞서 언급했듯 뉴먼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무력함을 토로하던 그는 뉴먼과 클레르 사이의 결혼승낙이 떨어지고 노에미를 만난 뒤 삶의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다. 뉴먼을 통해 미국으로의 이주라는 가능성을 마주한 뒤 그는 “내가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 나는 트렁크에 달러를 가득 채워 돌아올 수 있을 거야”("I don't see why I shouldn't do something [...] I could come back with a trunk full of dollars" 298)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를 보며 뉴먼은 친구의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한다.

총명하지만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그 친구를 1급의 사업가로 바꾸는 아이디어로 뉴먼의 상상력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는 일종의 영적인 열광, 선전가적인 열광을 느꼈다. 그 열정은 일부분은 투자되지 않고 있는 자본을 볼 때 그의 내면에 생겨나는 일반적인 불편함의 결과이기도 했다. 벨가르드처럼 뛰어난 지성은 그만큼 뛰어난 쓸모에 맞춰 사용되어야만 한다. 뉴먼의 경험 내에서 가장 높은 쓸모란 철도 주식 사업을 운영하는 데 쓰이는 어떤 초월적인 영민함이었다.

Newman's imagination began to glow with the idea of converting his bright, impracticable friend into a first-class man of business. He felt for the moment a sort of spiritual zeal, the zeal of the propagandist. Its ardor was in part the result of that general discomfort which the sight of all uninvested capital produced in him; so fine an intelligence as Bellegarde's ought to be dedicated to high uses. The highest uses known to Newman's experience were certain transcendent sagacities in the handling of railway stock. (299)

이것이 한편으로 (마치 그의 클레르에 대한 애정이 그러하듯) 나름의 진정성이 있는 우정이면서도 동시에 분명히 투자가의 언어로 기술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뉴먼에게는 제대로 활용되지 않고 있는 자원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미국식 실용주의, 베버(Max Weber) 식으로 말한다면 ‘합리화’(rationalization)의 욕망이 있다. 물론 이러한 합리화는 뉴먼과 같이 합리화를 수행하는 주체 혹은 투자가에 의해 수행되며 합리화되는 대상과 합리화의 주체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주체-객체 관계가 성립한다. 이 구도에서 뉴먼은 니오쉬 부녀와의 관계에서 또 클레르와 맺고자 했던 관계에서 그러한 것처럼 손상되지도 변화하지도 않는 내적으로 완결된 주체로서 자신의 앞에 마주한 대상을 사물화 한다.



4. 마이더스의 손


크리스토퍼 뉴먼이 자신이 마주하는 인간관계에서 유사한 행동양식을 보인다면, 마치 이에 응대하기라도 하듯 『미국인』의 서사는 그가 투자가적 형태로 개입한 모든 인물들의 삶이 파멸적으로 전개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클레르는 수녀원에 들어가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 발랑탱은 무모한 결투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그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채 누워서 뉴먼에게 “네가 뭐든 시도해보라고 했었지, 나는 그걸 시도했던 거야!”("You talk about trying; I tried that!" 333)라고 말하는 장면은 발랑탱의 죽음이 단순히 인물의 독특한 성격에 따른 결과만이 아니라 실제로 뉴먼의 추동이 끼친 영향이 배제할 수 없는 요소로 작동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5) 소설의 후반부에 다시 마주친 니오쉬 부녀 역시 예외는 아니다. 뉴먼은 우연히 이제 완전히 요부로 거듭난 노에미가 한때 클레르를 두고 자신과 경쟁구도에 있었던 딥미어 경(Lord Deepmere)을 유혹하는 장면을 보곤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노에미를 흘깃 본 것만으로도 그의 불쾌감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그녀는 자연의 얼굴 위에 떨어진 흉측한 얼룩 같았다”("this imperfect glimpse of Miss Noemie had excited his displeasure. She seemed an odious blot upon the face of nature" 431). 그리고 이 광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아버지 무슈 니오쉬 또한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상기한 모든 인물들의 사례, 즉 뉴먼이 어떤 형태로든 개입한 모든 서사는 비극적인 결과만을 낳았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충격적인 지점 중 하나는 뉴먼이 이 모든 사태를 보면서도 단 한 번도 (발랑탱의 죽음 앞에서 그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지만, 자신이 발랑탱의 후견인 노릇을 좀 더 했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대목["I ought to have treated you as a small boy" 335]의 함의는 다소간 복잡해 보인다) 자기 자신의 책임 여부를 묻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들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남는다. 이러한 면모는 서술자가 뉴먼의 성격을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다음 대목을 통해 분명해진다.

그[뉴먼]는 자신이 유럽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유럽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믿었다. [...] 이 점에서든 다른 어떤 점에서든 뉴먼에게 책임감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라곤 없었다. [...] 그에게는 세계란 거대한 시장과 같아서 그곳에서 누구든 어슬렁거리며 멋진 물건들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 의무적 구매와 같은 개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사회적 압력이란 것을 느끼지도 않았다.

He believed that Europe was made for him, and not he for Europe. [...] Neither in this nor in any other respect had Newman a high sense of responsibility [....] The world, to his sense, was a great bazaar, where one might stroll about and purchase handsome things; but he was no more conscious, individually, of social pressure than he admitted the existence of such a thing as an obligatory purchase. (103)

뉴먼에게 개별적인 선악을 분별하는 감각조차 결여된 것은 아니나, 그 구성원들의 행위와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가 그 자신을 이해하는 바와 같이, 세계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유로운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곳일 뿐이다. 발랑탱이 “당신에게는 세상 어디에서도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의 분위기가 있다”("It's a sort of air you have of being thoroughly at home in the world" 104)고 말할 때 이는 화자의 의도를 넘어선 진실을 가리키는 면이 있다. 그러한 뉴먼에게는 자기 자신이 비록 간접적인 형태로라도 타인들의 파멸에 무언가 기여를 했을 가능성에 대한 반성도, 자신이 오류와 결부되어 있을 경우에 대한 의심도 존재하지 않는다.6)

벨가르드 부인의 파혼 선언 이후 놀라울 정도로 무력한 모습을 보이는 뉴먼에게 남은 것은 그리움도,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 자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은 선량한 사람”("he was a good fellow wronged" 441)이라는 거의 나르시시즘 적이기까지 한 인상뿐이다. 아주 희미한 복수심, 벨가르드 가문이 자신이 그들의 비밀을 폭로할까봐 두려워하리라는--이후 트리스트럼 부인에 의해 부정당할--초라한 희망만이 뉴먼의 무력함과 동반한다. 이는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 및 그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 자기 자신의 사고체계를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심리가 도달한 선택지 중 하나다. 정신분석적 관점에 입각해 뉴먼이 매 맞는 아이로, 벨가르드 부인이 벌주는 어른 역을 맡아 후자가 전자에게 마치 초자아처럼 기능한다는 해럴슨의 독해(485)는 뉴먼의 심리를 해명하기 위한 나름의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공한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수정을 가해야 한다면, ‘매 맞는 아이’로서의 뉴먼은 초자아의 가르침을 따르는 대신 더욱 더 자기완결적이고 폐쇄적인 논리 안으로 퇴행한다는 사실이 덧붙여져야 한다. 그가 결국 죽은 벨가르드 경의 편지를 불태우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편지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사실, 곧 그가 자신의 논리와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타자에 의해 자신의 소망충족이 좌절된 과거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하다. 자신의 실패를 직시하고 자기 자신을 재구축하여 삶을 전진시켜나갈 동력 대신 그에게는 오로지 감각적인 자기증식만이 존재한다. 정확히 말해 그의 사고 자체가, ‘미국인’의 심리 자체가 그를 완결된 장소로서의 자기 자신이라는 내적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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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단화된 선악구도 속에서 인물을 통해 형상화된 덕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장르로서의 멜로드라마 전통에 대한 설명으로 브룩스의 고전적인 텍스트 『멜로드라마적 상상력』(The Melodramatic Imagination)을 참조하라. 브룩스는 1987년도의 논문에서 전자의 논의틀을 이어받아 (전자의 헨리 제임스 파트에서는 주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미국인』 또한 “도덕적 의식의 멜로드라마”("the melodrama of the moral consciousness" 62)라고 설명한다. 제임스를 의식의 멜로드라마라는 모티프로 간주하는 브룩스의 입장은 대체로 설득력이 있지만, 『미국인』의 경우는 조금 달리 봐야한다는 것이 본고의 입장이다. 『미국인』의 경우 독자들은 뉴먼 내부에 자리한 갈등을 다소간의 거리감을 갖고 바라보게 되며 오히려 멜로드라마적인 것은 구세계의 부패를 대변하는 악인들과 무언가 새로운 가능성을 다소간 품고 있는 다른 등장인물들 간의 배치 자체다. 그리고 제임스는, 이 글 아래에서 논의하듯, 그러한 배치에 기대되는 통상적인 멜로드라마적 전개와는 다른 길을 택한다.

2) 이는 초기 제임스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인 『한 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a Lady)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임스는 『초상』의 뉴욕판 서문에서 투르게네프를 언급하며 자신의 소설에서 이저벨 아처(Isabel Archer)라는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5-6). 그러나 『멜로드라마적 상상력』 6장에서 브룩스가 보여주듯 이 소설에서 인물의 의식에 (멜로드라마적) 윤리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플롯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미국인』과 『초상』은 마찬가지로 플롯과 인물 어느 한 쪽만의 분석이 주도권을 점할 수 없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3) 이 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당대 프랑스 보수 세력의 정치지형을 상세하게 추적하는 존 카를로스 로우(John Carlos Rowe)의 1987년 논문을 참조하라. 로우에 따르면 뉴먼의 실패는 이러한 정치적 지형 자체의 무지와 분리될 수 없다.

4) 이러한 인물 전형은 『초상』의 랠프 터칫(Ralph Touchett)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랠프는 탁월한 지성과 야심을 지니고 있음에도 폐결핵으로 인해 평생 죽음을 곁에 두고 요양을 이어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소망/역량과 현실적 제약의 괴리가 그를 냉소적이고 자조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그와 발랑탱은 제임스의 동일한 인물전형을 공유한다. 그러나 랠프가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상징하는 이저벨 아처를 보고 그녀의 삶에 동력을 공급하려는 역할을 한다면, 발랑탱과 뉴먼의 경우 후자가 전자에게 동력을 공급하고자 하는 역할을 맡는다(물론 양자 모두 의도치 않은 비극을 초래한다는 점은 같다).

5) 그리고 발랑탱의 이러한 말을 듣고도 뉴먼이 브레드 부인에게 “시도해보라”("Try" 363)는 요구를 반복적으로 하는 대목은 그가 친구의 죽음으로부터 무엇을 느꼈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6) 이러한 지점에서 뉴먼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소설 『아서 왕국의 코네티컷 양키』(A Conneticut Yankee at King Arthur's Court)의 주인공 행크 모건(Hank Morgan)과 근본적인 유사성을 공유한다. 모건은 문자 그대로의 ‘구세계’인 6세기 영국 아더 왕의 궁정에 떨어져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이 6세기의 인물들보다 진보된 사고방식을 갖춘 유일한 현대인임을 잊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타인들에 대한 도구적 사고방식으로 이어지며 최종적으로 마지막 전투에서 기사들에 대한 대학살로까지 이어진다. 텍스트에서 모건이 유일하게 다른 태도를 취하는 인물이 그의 아내가 되는 여성인물 샌디(Sandy)인데, 마지막 학살극을 앞두고 그가 아내로부터 떨어져 자신에게 순종적인 남성집단으로 돌아온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뉴먼처럼 결혼에 실패하지는 않으나 결국 자신의 아내와 분리되어 자기 자신에 대한 무반성적인 태도로 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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