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예술적 취향 분석에 관하여

Critique 2014. 12. 14. 17:33

이하는 다음의 글을 읽고 (꼭 글의 내용과 무관하게) 내 사고를 전개한 내용이다.

듀나. <누가 대중의 취향을 무시하는가>. (http://m.entermedia.co.kr/news_view.html?idx=981)




만 3년 전 글이고, 사실 정명훈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대중"이 일종의 도깨비방망이로 사용되는 현실에 대한 듀나의 날선 코멘트는 여전히 유효하다. 갖가지 예술적 취향에서 배제된 "대중" 혹은 조금 더 직설적인 언어로 하층계급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문화산업'이 전면화한 시점 이후로--한국사회의 경우 그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를 지나면서 분명해진다고 동시대인으로서 말할 수 있는데--숫적으로 가장 많고 문화적/경제적 계급구도에서 상대적으로 하위에 속하는 집단의 예술적 취향을 형성한 것은 TV와 온라인을 통해 막대한 시장을 구축한 연예기획사들이었다. 담담하게 사실을 기술한다면 문화적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는 계층의 10대-20대 남자애들이 가장 친숙하게 느끼는 예술은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성 아이돌과 "간지 넘치는" 옷차림과 스타일의 표본을 제공해주는 남성 아이돌이다. 실제로 예술적 비평의 일정 이상의 역사/정치/사회적 지평에 관심을 갖고 따라온 이들이라면 고도의 산업적 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아이돌이라는 대량소비재로부터 어떠한 정치적 당위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꽤 까다로운 비평적 곡예가 요구됨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수적 다수로서의 대중이 그 자체로 정치적/윤리적 당위의 준거점이 될 수 있었던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며 가야할 길의 지도를 떠올릴 수 있던 복되던 시절"은 적어도 예술비평에서는 진작에 끝났다. 자본도, 권력도, 이데올로기도 모두 그 시절보다 고도로 발전했고 문화예술이야말로 새로운 대량소비시장이자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으로서 발전된 지배적 경향들이 가장 깊숙히 교묘하게 침투한 장field이 되었다; 문화예술비평이론의 난해함과 복잡함을 현학과 지적 유희로 깎아내리는 이들은 실제로 현실이 그 이론들보다도 복잡해졌음을, 지극히 까다로운 이론적 틀조차도 현실의 고도화된 지배 앞에서는 천진난만한 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반지성적이다. 수량화된 경제적 효과나 각자의 쾌를 증진시키는 취미로서 예술의 가치를 준거하는 (고전적) 공리주의적 틀이나 오로지 개인의 영혼에 참된 울림을 전달하여 우리를 이 세상의 타락에서 구원하는 동앗줄로서의 예술을 숭배하는 퇴행적 시각이 다시 범람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비판적 문화예술비평이 맞닥트린 난국을 방증한다. 이러한 조건 위에서 다수로서의 대중을 하나의 기준이자 당위로 삼을 수 있다는 복되던 시절,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시절의 믿음을 아직도 고수하는 이들은 마치 묏자리만 잘 쓰면 손가락 까딱 안 해도 재물이 굴러들어올 거라는 신념을 철썩같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을 보며 애처롭게 여기고 또 향수와 아련함을 느낄 수는 있겠으나, 현실의 객관적 분석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복잡함을 주관적 해석틀의 편리함과 단순함으로 대체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들이 '대중예술'이라는 현실에 해석의 폭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예술과 취향의 문제에서 '대중'이라는 개념은 조금 더 복잡하고 신중하게 사용될 필요가 있다; 나는 사실상 후기자본주의사회의 결정적인 요소인 이 개념을 손쉽게 사용하는 것과 손쉽게 포기하는 것 양자에 모두 반대한다. 예비적으로 몇 가지 상식적인 원칙들을 꼽아볼 수는 있다. 먼저, 오늘날 대중적 취향이 그 자체로 해방적이거나 진보적 정치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이는 대중적 취향에 결정적으로 개입하는 문화산업자본 주체들과 그 주체들의 작동을 빼고 설명할 수 없는 대중문화시장의 존재만으로도 분명해진다. 한국에서 TV, 인터넷 포털사이트, 그리고 양자에 밀접한 영향을 받는 또래집단과 같은 요소들을 제외하고 대중문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만약 대중적 취향 및 대중예술로부터 해방과 비판을 위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이러한 요소들을 반드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만 한다.


 둘째, 오늘날 대중은 순진한 이론적 개념으로서의 단일한 집단적 주체가 아니다. 나는 모든 개개인은 전부 다르다거나 아니면 스스로가 꾀바르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더욱 순진한 의식의 산물인 '보편적인 것은 없고 개념과 이론은 다 허구다'는 식의 슬로건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단일한 층위로 환원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들과 경향들이 적어도 대중의 의식적/무의식적 차원에서는 뒤얽혀 작동하는 게 사실에 가깝다는 평범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단적으로 우리는 문화와 예술적 취향의 문제에서 성차, 정치경제적 계급, 지역, 인종/민족, 세대, 정치적 정체성과 같은 상이한 요소들을 결코 그중 하나의 요소 하에 통합할 수 없다; 실제로 대중문화산업 영역의 자본가들은 상이한 가치들이 가로지르며 만들어낸 구획들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또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여 상품을 생산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서로 다른 기제들은 뒤얽혀서 작동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는 "여성부"와 "페미니즘"(이 단어가 여성혐오의 전통에서 '여성주의'가 아니라 "페미니즘"이라는 외래어로 표기되는 사실은 한국에서 외래어가 계급적 위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결부되어 사고되어야 한다)을 비난하는 여성혐오적 남성들의 사고 기저에서 일종의 계급적 원한을 바라볼 수 있다. 한편으로 예술적 취향을 형성하는 여러 기제들이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파악될 수 있으나 그것들은 다시 결합된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대중적 취향의 분석은 여러 실들이 뒤얽힌 타래를 한 올 한올 풀어내듯 사려깊게 진행되어야 한다.


 셋째, 대중적 취향은 결코 단순하게 현실도피적/순응적이지 않다. 가장 순수하게 정련된 의식을 제외한다면 예술적 취향은 어떤 형태로든 현실적 조건과 (이데올로기적으로 매개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예술적 소비와 그 취향은 우리 자신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대중과 대중의 상당수를 점하는 중하층 계급의 현실인식을 설명함에 있어 분명히 현실적 조건에 대한 절망, 좌절, 원한, 분노, 체념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제외할 수 없다. 오히려 완전한 순응주의, 사회의 갖가지 요구에 의문을 품지 않고 충실히 복무하고자 하는 의식은 넉넉한 물적 조건과 충분한 교육을 받은 이들, '스스로에게 주어진 명령에 착하고 선량하게 응하면 결국에 자기 자신은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이들, 동물적인 선량함을 갖춘 이들에게서 발견된다; 이들의 클리셰적인 동전의 뒷면으로 적당히 회의적인 쾌락주의자들이 따라붙는다; 양자는 어쨌든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서 자신이 만족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으리라 믿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하층계급의 현실인식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따라서 오늘날 대중적 취향은 세계에 대한 음울한 감각 위에서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인식의 일부로,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심지어 육체적 쾌감에만 몰두하라는 극단적으로 욕구충족적인 예술소비조차도 자신의 삶에는 그러한 지평 이외의 다른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체념어린 현실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현실의 의도적 망각은 그 자체가 현실의 산물이다.


 넷째, 대중적 취향의 분석은 대중적 취향이 향하는 문화예술 상품=텍스트의 분석과 무관하게 진행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종종 매우 뛰어난 예술텍스트가 매우 저열한 이유로 소비되는 사례를 발견하며, 역으로 매우 급진적이고자 하는 요구에 의해 형편없는 수준의 혹은 때로 반동적이기까지 한 예술텍스트들이 향유되는 광경을 목도한다. 그러나 의식의 주관적 차원을 풀어내는 일은 현존하는 객체로서의 예술텍스트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별개로 진행될 수는 없다; 주체에 대한 철학적 전통의 비유를 빌려 말한다면, 예술텍스트는 그를 향유하고자 하는 이 앞에서 마치 해소될 수 없는 타자처럼 존재하는 면을 갖는다. 향유가 아닌 상품소비의 행동양식은 소비주체로 하여금 대상으로서의 예술텍스트로부터 타자성을 제거하고 오로지 주체가 바라는 쾌락을 투사하여 마치 거울을 통해 되돌아오는 시선처럼 동일성을 즐기도록 한다. 그러나 주체는 자위적 쾌락의 반복 속에서조차도 결국 자기 자신에 내재해 있는 것과 다른 무언가를 보도록 강요받는다. 대중을 포함한 대다수의 인간들의 주체성은 결코 지금-여기 그대로의 주체됨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견고하지 않다; 취향의 변모는 주체의 가변적 성질을 드러낸다. 개별적 예술텍스트와의 깊은 대면이든 문화적 상품들의 급류에 휩쓸리는 것이든 예술텍스트와의 대면은 어떤 형태로든 주체를 변모시킨다. 따라서 그 변화를 추적하는 데 있어 예술텍스트가 형식과 내용에서 무엇을 담고 표현하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은 불가결하다. 이는 의식의 분석에서 사회의 층위가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섯째, 예술텍스트 및 예술적 취향에 대한 분석은 그것의 구체적인 생산/수용방식이라는 매개물을 고려해야만 한다. 예술텍스트와 소비취향을 매개하는 조건들에 대한 분석은 계급적 취향에 대한 고전적인 통찰에서 볼 수 있듯 이미 과거에서부터 행해져 왔다. 그러나 단순히 사회적 맥락이라는 층위를 넘어 예술이 생산/소비되는 기술적 형식에 대한 고려 및 그 형식 자체에 대한 분석 또한 포함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K-POP의 영향은 단순히 곡 자체에 대한 청취만이 아니라 시각적 요소를 포함한 영상의 수용과 분리되어 고찰될 수 없다. 실제로 이전까지 콘서트나 음악순위프로에서의 공연이 제한된 수의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K-POP이 한국 외에 시장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것은 높은 해상도의 공연영상이 유튜브와 같은 '장치'들을 통해 해외의 잠재적 소비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될 수 있게 된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동시에 하나의 공연영상에 집적되는 기술적 노력 역시 과거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실제로 방송사에서 제공하는 아이돌그룹의 공연영상(이것들은 4-5분짜리 개별적인 영상으로 편집되어 유튜브에 고음질/고화질로 공유된다)을 살펴보면 음악의 리듬 및 짜여진 안무 등에 맞춰 카메라가 매우 현란하게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다; 여러 카메라들을 통해 이뤄지는 줌 인&아웃은 한편으로 그룹 전체의 안무가 만들어내는 미적 질서를, 다른 한편으로 개별 그룹멤버를 포착하면서 개개인에게 마치 마술과 같은 매력을 부여한다. 이 카메라의 움직임은 음악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어 공연영상의 시청을 해당곡의 음원에 대한 청취와 근본적으로 다른 예술소비경험을 제공한다. 클래식 음악의 공연영상을 시청하는 것이 연주를 직접 관람하는 것에 비해 근본적인 아우라가 제거된 경험을 제공한다는 인식을 준다면, 카메라워크를 통해 K-POP 공연영상은 실제 공연참석의 단순한 '아쉬운 보충물'로 한정되는 것 이상의 특수한 상품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과거 한국의 미국 아이돌음악 수용이 주로 음반과 같은 청각적 소비를 통해서 이루어져왔다면, 오늘날 K-POP의 해외소비자들이 음악만이 아니라 춤동작의 모방과 같은 소비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은 기술적 진보를 제외하고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기술적인 요소를 포함한 다층적 매개물에 대한 고려없이 대중적 예술취향을 종합적으로 재구성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불완전하다.



 상기한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종합해 말할 수 있다. 예술에 대한 대중적 취향은 그것을 관통하는 제반 사회적 조건들, 예술을 전유하는 개별 주체의 의식, 예술텍스트 자체에 대한 분석, 그리고 구체적인 예술소비방식식 및 그것을 겨냥해 만들어지는 예술생산방식에 대한 고찰들이 종합될 때 비로소 어느 정도 현실적인 재구성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요소들에 대한 고려없이 대중적 취향에 대한 무반성적인 옹호/반감은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 가장 좋은 상품이다" 혹은 "대중은 언제나 천박하고 조야하다"는 그 자체로 천박한 의식과 다를 바 없다. 대중예술 및 대중적 취향으로부터 정치적인 혹은 윤리적인 가치를 끌어내려는 비평적 시도 또한 이 요소들에 대한 고려 없이는 대중이라는 지푸라기 인형을 붙들고 자신의 맹목적인 편견을 되풀이해 읊는 복화술사의 처지와 근본적으로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이른바 진보적 비평은 결국 항상 현실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침잠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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