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1일. 꿈과 불안. 테일러 <헤겔> 1-2부

Comment 2014. 9. 11. 23:46

1.


추석 연휴 때부터 계속 불편한 꿈을 꾼다. 수능을 다시 봤는데 망했고 그래서 내신으로 가려고 했더니(수능을 망하진 않았지만 내신으로 대학오긴 했다...) 갑자기 리얼해져서 유효기간이 지났고 결국 지금 학적(꿈에서는 학부생)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능본 걸 몰래 숨겨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깨는 꿈, 군대 다시 간 꿈, 일베 애들에게 둘러싸인 꿈 등을 꾸었고, 오늘 아침에는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시점이 배경으로 나왔다. 지금은 더 이상 디테일이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나는 요점은 유족/피해자가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고 그에 냉소적이고 적대적인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이었다. 무언가 옳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눈치를 보고 말을 골라내야 하는 그런 갑갑하고 싸늘하게 위협적인 분위기. 숨이 막히는 듯한 마음으로 깨어났다. 새벽 5시에 잠들었는데 아침 9시에 강제로 눈을 떴으니, 하루가 꼬이는 셈이다. 요즘 갖가지 불안의 요소들이 중층결정되어 꿈으로 나타나는가 싶다. 실제로 수업 및 일에서 느끼는 부담감도 있고, 다음 주 초 발제고, 읽을 양도 많고...그러나 최근의 극우파 난동 이후로(꿈을 꾸기 시작한 시점이 9월 6일 이후임을 생각하면 부인하기 어렵다) 확실히 내 '정신'에서 마치 지진계처럼 어떤 불안함을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으며, 그것이 꿈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꿈에서 딱 깨어났을 때 스스로에게 지금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을 질문하면, 꿈의 구체적인 내용에 무관하게 '불안'이라는 단어가 바로 떠오른다. 가깝고 먼 시점의 불확실한 미래들이 내 요동치는 삶의 불안정한 토대를 이루고 있지만, 그래서 매일의 살아가기가 흔들리는 대지 위에서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는 노력을 요구하지만--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는데, 월미도 놀이공원의 디스코텍에서 안전바가 없는 곳에 놓여있는 기분이다--, 그런 것들보다도 이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의 불안감, 이 사회에서 내가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이 새로운 원인으로 나타났다. 마치 저 멀리서 희미하지만 점차 크고 뚜렷해지는 악령의 나팔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요즘이다.


오늘은 수면시간도, 식사 주기도 안 맞아서 속도 거북하고 소화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맛있는 빵을 사왔는데(나는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빵이나 밥 가리는 식성은 아니다) 입맛도 영 없고 저녁으로 먹어도 지금까지 무언가 막힌 듯한 기분이 든다.




2.


늦은 점심을 먹다가 국정원장의 대선개입여부에 대한 판결이 나온 걸 TV로 봤다. 결론은 집행유예, 정치관여는 인정하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다...판결문을 읽고 법학 전공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봐야 이 판단이 어떤 의미에서 타당성이 있는가를 알 수 있겠지만, 지금 그러고 싶은 기분도 아니고 여유도 없다. 검찰이 증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선거기간에 정치관여를 하고 명백히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지시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선거개입은 아니라는 재판부의 판결 자체가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다. 요점은 "선거개입을 하지 않으면서도 정치관여를 할 수 있는" 사실상의 탈출구가 주어졌고, (지배여당이 국정원법을 고칠 리는 없기 때문에) 다음 대선에서도 얼마든지 국가정보기구의 '사실상의' 여론개입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우리는 법의 판단이 옳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 못지않게 판결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조건이 어떠한 전략/전술을 가능하게 할 것인지,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어떻게 재편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행위도, 사실도 있지만 판결이 없다. 한번 했는데 별 탈 없었으면 두세번은 쉽다. 나는 그런 점에서 진영논리와 무관하게 정보기구의 여론형성/의사결정과정개입 시도 자체를 아주 강하게 징벌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입장인데--어쨌든 한국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국가권력이 늘 지나치게 강했고, 그 권력이 오롯이 피지배계급을 위해 사용된 적은 별로 없으며 권력의 사적 사용 경향은 최근에 가속화되고 있다--재판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제 우리들의 삶에서 국가권력 혹은 국가를 장악한 이들의 권력이 손을 뻗칠 수 없는 지점은 과연 얼마나 남은 것일까? 오늘 밤도 불편한 꿈자리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새민련 원내대표 박영선이 비대위원장으로 이상돈을 거론했다는 뉴스가 떴다. 기사를 조금 읽어보니 박영선의 평소 '멘토'가 김종인이었다고 한다. 새민련이 갈팡질팡하다가 이제는 중도 우파에서 조금 더 오른쪽 스탠스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러면 그럴수록 새누리한테 밀릴 뿐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애초에 싱크탱크도 없고 조직력도 떨어지고, 한 마디로 능력이 떨어지지만 새누리에 대한 대항마로 간주되면서 울며겨자먹기로 지지한 사람들이 꽤 될텐데, 더 오른쪽으로 가면 이제 포기하는 사람이 늘지 않겠나. 진보정당계가 새민련에 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하던 분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궁금하다...이런 것조차도 '불안'의 한 요인이 된다)



3.


오늘의 몇 안 되는 위안은 (수년만에 친구를 만난 것 빼고는) 찰스 테일러였다. <헤겔>을 1/5, 그러니까 1부 거의 끝까지 읽고 있다. 원래 조금만 읽고 다음 주 수업을 위한 독서로 넘어가려고 했으나, 내 기대보다 너무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지금까지 에르네스트 만델의 맑스 경제이론 입문서를 제외하고 어떤 사상가에 대한 2차 문헌을 읽으면서 찬탄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는데, 테일러의 <헤겔>은 두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예외사례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주요한 사상가에 대한 알기 쉬운 안내가 아니라 그 자체가 폭넓고 사려깊으면서도 정밀한 이해력을 드러내면서 또 그 여정에 독자를 동참시키는 매우 탁월한 저술군에 속한다. 한 마디로 테일러는 이 책에서부터 '세계 레벨'이란 게 무엇인지 보여준다. 1장이 사상사적인 배경을 폭넓으면서도 명쾌하게 정리했다면, 헤겔의 청년기와 성숙기 사유를 다루는 2, 3장은 섬세하면서도 명징하고, 부분과 전체를 아우르는 사유의 힘을 드러낸다. 2장에서 테일러는 헤겔의 사유가 어떤 문제의식 위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살피고, 3장에서는 헤겔 철학의 중심을 이루는 논리 및 개념들을 검토하며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체계를, 그러니까 일관된 논리적 흐름을 형성하는가를 그려낸다. 쉽게 말하자면 뼈대를 재구성한다. 물론 이폴리트나 코제브의 헤겔 독해를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할 순 없지만, 테일러는 영미쪽 지적 배경을 지닌 사람--테일러는 엘리자베스 앤스컴에게도 배운 적이 있다--혹은 영어로 사유하는 사람은 진정한 철학 혹은 형이상학을 할 수 없다는 편견을 아주 간단히 깨트린다. 그는 외려 그러한 지적 전통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형이상학적 전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사람보다 더 분명하게 요점을 짚고 사유-구조물의 원리를 꺼내어 보여줄 수도 있다는 걸 스스로 입증한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진실로 탁월한 저술은 대상을 불필요하게 난해하거나 불확실하게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그 빛을 보전할 수 있고, 타인의 사유를 소개하면서도 읽는 이의 사고를 촉발시킬 수 있다는 모범적인 사례다. 1장에서 나중에 내 논지를 보강해줄 만한 인용대목들을 몇 군데 찾았다면, 2장과 3장에서 실로 오랜만에 두뇌 자체의 힘을 키워주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칸트, 헤겔, 맑스, 프로이트, 아도르노,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저자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사고 및 논리의 역량을 넘어서는 사유를 부과하기에, 그러한 저술들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견뎌내면서'/'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유와 이해 자체를 확장시킬 수 있게 된다; 첨언하자면, 푸코는 분명 그런 성장을 가능케하지만 그러한 이해를 위해서는 아주 정성들여 읽어야 하는 저자에 속한다...종종 푸코의 가장 뛰어난 부분은 어떠한 설명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주어져서 외려 주목받지 못하곤 한다. 독서 및 사유역량의 확장은 이처럼 독자 자신에게 너무도 친숙하게 깃들어 있는 편안하고 고향같은 사고를 내려놓고 더 위협적이고 낯설고 이해불가능해 보이는 언어와의 대면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방된 태도를 요구한다(때때로 절대로 지적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 이들이, 예컨대 한국의 이공계-의학 종사자들이, 이러한 사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쓸모없는 것으로 폄하하며--마치 포도를 저주하는 여우처럼--뒤돌아서는 사례를 종종 보여주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그들이 자라나온 지적 전통 및 논리연장tool의 가치가 상대적임을 전혀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결코 불필요한 긴장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독자의 사고력을 활성화시킨다(나는 <청년 헤겔>을 꽤 재밌게 읽은 사람이지만, 테일러의 헤겔 독해에 비하면 루카치의 그것은 솔직히 난삽하다).


개인적으로 테일러와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의 관계는 꽤 생각해볼 주제라고 생각한다. 구글에서 Charles Taylor와 Adorno / Horkheimer를 같이 검색해봐도 (적어도 한두 페이지 안에는) 건질만한 내용이 없다. 테일러가 18-19세기 사상사 이야기하는 건 호르크하이머(및 아도르노)의 견해와 아주 많은 내용을 공유하고, 심지어 베버의 탈주술화를 거론하면서 계몽의 한 흐름을 설명하는 것까지 겹치면서도--<계몽의 변증법>에서 신화, 자연지배, 탈주술화의 모티프를 갖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베버가 생각나지 않으면 이상하다! 애초에 대놓고 탈주술화라는 단어를 갖다 쓰는데...--정작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언급이 없다. 내가 대놓고 프랑크푸르트 1세대 논의의 연장선에서 사고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1992년의 저술 <불안한 현대사회>(_The Malaise of Modernity_, 이후 _The Ethics of Authencity_로 재출간)에서도 놀랄 정도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물론 나는 아직 철학자로서 테일러의 독창적인 입장이 드러난 저술을 아직 접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양자를 연결시켜 사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꽤나 흥미로운 작업이 될 듯 하다. 역으로, 테일러가 <헤겔> 2장에서 기독교 및 종교, 특히 아브라함에 대한 헤겔의 논리를 설명하는 대목(국역 115부터)은 몇몇 단어만 수정하면 <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이와 자연지배의 문제를 설명하는 논리와 놀랄 정도로 겹친다. 거의 후자를 이해하는데 전자를 보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다. 젊은 헤겔이 표상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은 부분적으로 후기 아도르노가 참된 예술작품에 부여하는 가치와 유사하게 느껴지는 점도 있다...


<9월 20일 추가>


<헤겔>은 2부 정신현상학 파트까지 읽었다. 여전히 저술의 탁월함을 느끼면서 나아가고 있다. <정신현상학>을 이렇게 쉽고 명료하게, 그러면서도 저질의 논리로 떨어트리지 않으면서 설명하는 책은 처음이다. 나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자신의 논리/사유능력 자체를 확장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은데, 한 가지 유의사항이 있다면 앞에서부터 차분히, 기초적인 설명부터 잘 숙지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테일러의 설명은 차분하고 어려운 표현에 심취한 흔적도 없다. 단지 뒤로 나아갈수록 앞부분의 설명들, 특히 기초적인 논리적 패턴 및 모티프에 대한 설명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는 대목이 늘어나기 때문에 각 단계를 제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가다가 막히기 쉽다. 그래서 1부의 논의를 잘 이해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바꿔말하면 1부만 잘 이해하면 2부도 전혀 어렵지 않다. 3부는 이 책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파트로서 <논리학>을 다룬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헤겔 안내서 중 <논리학>을 다루는 책은 없었는데, 테일러는 <정신현상학>을 <논리학>의 서문으로 간주하며 후자를 헤겔 논의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시킨다(실제로 책 순서 상으로도 가운데에 있다). 80년대에 번역된 <대논리학>은 구해놓았지만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데, 테일러의 설명을 바탕으로 찬찬히 나아가고 싶다. 어차피 그룬트리세(<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를 읽기 전에 한번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오기도 했고. <현상학> 설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내가 <현상학> 국역을 꾸역꾸역 고통받으면서 읽는 기간 동안 어렴풋이 '이런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몇몇 대목을 테일러가 명확하게 확인해줄 때였다. 그중 공리주의 비판은--헤겔은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읽으면서 나름 표시까지 하면서 이건 분명히 공리주의 비판이라고 생각했던 대목이었는데, 내 연결이 나만의 막연한 자의적인 해석이 아님을 알게 되어 기뻤다. 나중에 테일러로부터 인용해야겠다고 체크를 해두었다.




P.S. 


올해 말-내년 초부터 맑스의 <자본> 1권부터 3권까지 읽는 세미나를 할 예정이다. 김수행 선생의 영어중역으로 할지 강신준 선생의 독어역을 고를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공부를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한다고 상정하는 세미나고, 어차피 맑스를 제대로 판다기보다는--그런 지적배경을 가진 사람은 여기에 없다--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읽고 이해하는' 게 목적이다...가능하면 부분부분을 명확히 이해하기보다는 전체적인 맥락, 구조, 흐름을 느슨하게나마 포착하는 쪽에 주안점을 둔다. 같이 할 사람이 몇 명이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나 빼고 최소 2명은 생겼다. 만약 어느 정도 공부경력이 있는 사람이 추가적으로 참여하는 일이 없다면, 내가 일정 부분 책임감을 갖고 진행하게 될 것 같다. 진입장벽과 구성원들의 부담은 낮추고, 대신 내 비중이 높아지는 식 말이다(어쨌든 나는 기본적으로 세미나가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앎/생각거리는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주로 19세기 영국과 유럽역사, (개략적인) 영국정치경제학사, 다른 비판이론과의 연계에 초점을 두고 읽을 거다. 당연하지만 각자가 각자의 이야기가 있는 거고, 내 이야기가 지배적일 이유는 없다. 혹시 같이 하고픈 분, 그러니까 그때까지 혼자 조금이라도 읽어놓든 아님 그냥 기다리든 연말연초에 세미나를 같이 하고픈 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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