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렛 캐버노 인준의 역사적 맥락과 교훈
Intellectual History 2018. 10. 9. 21:3510월 6일 미국 상원에서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의 연방대법관 인준안이 통과되었다. 한국에서는 (적어도 내 시야 내에서는) 이 사안을 주로 트럼프가 지배하는 공화당의 승리, 혹은 성폭력 혐의가 있는 인물의 대법관 취임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둘 다 중요한 쟁점이지만, 내 생각에 보충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이번 브렛 캐버노의 지명과 인준이 트럼프·공화당의 갑작스럽고 충동적인 결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적어도 1980년대 이래 지속되어온 미국 우파 반혁명(counterrevolution)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대 미국 및 사법 문제에 있어 나는 흥미삼아, 그것도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지인들의 추천을 받아 한 두 권의 책을 읽은 정도에 불과하므로, 여기서는 거칠고 간략한 구도와 몇 가지 읽을거리를 제시하는 걸로 만족하도록 하자.
1.
20세기 미국사를 이해하는 여러 관점 중 흥미로운 구도를 하나 꼽자면 특히 연방대법원을 정점으로 하는 사법부와 행정부에 진보/혁신주의("progressive")와 보수가 어떻게 파고들었나를 지켜보는 데 있다. 미국사에 대해 더 정통하신 여러 분들이 나의 오류를 교정해주시기를 기원하며 매우 거친 도식을 그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19세기에 고등교육과 보다 전문적인 학문의 발전에 있어 독일은 상당히 선진적인 수준을 이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면, 이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혁신주의 시대"(Progressive Era*)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기 여러 미국인들은 유학 등을 통해 독일의 학문을 접하면서 특히 국가/행정기구가 사회개혁에 있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형성했다. 행정부를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수행하려던 진보에게 최대의 걸림돌은 연방대법원이었는데, 후자는 1930년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행정부가 제출한 "뉴딜" 법안을 줄줄이 위헌으로 퇴짜놓았다. 루즈벨트는 이에 맞서 1937년 대통령이 만 70세 6개월 이상 고령의 연방대법관의 수만큼 추가로 대법관을 지명할 수 있도록 하자는 초강수를 두었고,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지만 이를 전후해 연방대법원은 점차 연방정부의 개혁적 법안을 합헌으로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연방대법원의 진보적 성향이 두드러진 것은 1953년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 의해 연방대법원장으로 임명되어 1969년까지 재직한 얼 워런(Earl Warren)의 시기였다.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 Board of Education) 재판에서 연방대법원은 과거의 "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이란 구호 아래 인종분리를 정당화한 과거의 입장을 뒤집고 공립학교의 인종분리를 폐지시키는 기념비적인 결정을 내놓았고, 이후 (아이젠하워의 기대와 달리) 연방대법원은 매우 적극적으로 진보적 정책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보수의 반발이 뒤따른 것은 필연적이었다. 1969년 대통령직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은 연방대법원의 진보주의를 억누르고자 자신에게 무려 4차례나 주어졌던 연방대법관 지명권을 보수적인 대법관을 지명하는 데 할애했으나, 닉슨에 의해 지명된 판사들 또한 연방대법원의 진보적 성향을 바꿀 의향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1973년 여성의 낙태를 금하는 텍사스 주법의 위헌여부를 둘러싼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은 7 대 2로 위헌으로 결정되었다*. 이는 이후 수정헌법 14조에 보장된 "자유"에 여성의 프라이버시권이 포함되는지의 여부를 놓고 이를 인정하는 측과 그렇지 않은 측의 대대적인 갈등을 낳게 된다.
(* https://www.lawtimes.co.kr/Legal-Opinion/Legal-Opinion-View?serial=45636)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이 체계화된 형태로 등장한 것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기부터였다. 진보적인 성향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당시 미국 법학계에서 1982년 설립된 "연방주의자 협회"(Federalist Society)를 비롯한 보수주의 법학 단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보수단체의 재정지원, 레이건 행정부와의 협력 등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빠르게 성장해갔다. 레이건 정부는 진보주의가 장악한 연방대법원을 보다 적극적으로 뜯어고치고 싶어했으며 새로이 등장한 우파 법조인들을 다른 무엇보다도 연방대법관직을 포함한 중요한 자리에 기용하고자 노력했다. 이들의 핵심적인 교리가 바로 헌법 해석에서의 "원전주의"(originalism)으로, 새로운 우파 법학자들은 미국 헌법의 해석은 헌법을 입안한 사람들, 즉 18세기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의 원 의도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달리 말하면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낙태 합법화의 핵심논리였던 여성의 프라이버시권은 원전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에 속하지 않는다. 여성의 낙태권 그리고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한 입장은 현재까지도 연방대법관 (후보)의 선정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 남아있다.
2.
반드시 짚어야 하는 추가적인 사실이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복음주의자들로 대표되는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들이 연방대법원 문제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후 1960-70년대에 사법적 영역을 포함해 세속주의가 두드러지게 퍼져나간 것에 대항하여 개신교 복음주의는 1960년대 중후반부터 각 지역의 풀뿌리 교회 조직 및 대규모 TV 방송 등을 매개로 대대적인 조직화를 시도했다. 1960년대까지는 정치영역에의 개입을 꺼리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은 세속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항하여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를 기념하고 가르칠 권리,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적인 지원을 받을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적 활동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제 복음주의자들은 "도덕적 다수"(the Moral Majority, 1979년 출범)와 같은 슬로건 하에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1980년 레이건의 당선, 1988년 아버지 조지 부시의 대통령직 당선을 거치면서 공화당의 주요 결정에서 근본주의적인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의 의사는 무척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미국의 보수적 개신교도들에게 "로 대 웨이드" 판결과 낙태 합법화를 뒤엎는 과제는 사법적 영역에서 개신교 보수주의 혹은 극우의 승리를 선언함에 있어 결정적인 사안이 되었다. 보수주의 법학계의 원전주의적 입장이 그들의 중요한 법리로 자리 잡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전사회적인 논란을 초래했던, 그리고 이번 캐버노 지명의 전례처럼 언급되고 있는 1991년 클래런스 토머스(Clarence Thomas) 연방대법관 인준은 헌신적인 원전주의자를 연방대법원에 집어넣기 위해 행정부·법조계·개신교계가 긴밀히 연계하는 현대 미국 우파 정치의 중요한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연방대법원에 원전주의자가 지속적으로 투하되면서도 쉽사리 뒤집히지 않았고,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이뤄지지 않는 걸 보면서 더욱 강경한 입장으로 옮겨갔다. 이는 특히 2000년대 아들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직 이래 공화당 정치의 주류에서 온건·중도파의 토대가 좁아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티파티에서 도널드 트럼프에 이르는 공화당의 새로운 포퓰리스트들은 "제도"(institution)에 대한 국민적인 혐오와 불신을 증폭시켜 연방정부의 역량과 권한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 과정에서 공화당 중도파는 무력화되었으며 민주당과 리버럴 또한 점차 좌경화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는 "미국의 분열"의 한 가지 이유다.
트럼프가 캐버노를 선택하고, 지명을 밀어붙이고, 최종적으로 그 지명이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인준될 수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바로 지금까지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편으로 1980년대부터 미국 법학계에서의 보수주의 반혁명이, 다른 한편으로 그것과 분리될 수 없는 미국 우파 개신교계의 강력한 대중정치적 영향력이 있었고, 양자가 결합하여 미국 정치를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몰고 간 흐름이 있었다. 다음달 중간선거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새로운 미국 우파의 영향력이 쉽게 사라질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3.
캐버노의 인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한국인들은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세 가지 사실만 꼽고 싶다.
첫째, 극단주의의 발흥을 막아내지 못하면 언젠가는 '상식적인' 의사결정마저도 쉽지 않은 순간이 온다. 아직 태극기부대와 유튜브의 우파뉴스 채널은 미국의 포퓰리스트 극우파에 비하면 무척 왜소한 영향력만을 지니고 있지만, 이들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해 보수정당에 침투하여 게임의 규칙을 새로 짜려 시도할 가능성은 항존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보도된 에스더기독선교회를 비롯, 반동성애 개신교 극단주의자들은 성소수자 인권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무척 경계심을 갖고 볼 필요가 있다.
둘째, 종교와 교회는 현대 정치에서도 여전히 너무나 중요하다. 현대 정치가 공적 영역에서 종교의 영향력을 퇴출시켰다고 믿을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난지 오래다. 한국의 많은 진보/리버럴은 여전히 종교집단이 언젠가 알아서 사그라들거나 기껏해야 개인의 사적 생활로 축소될 거라고 낙관하는 경향이 있는데, 1990년대, 그리고 무엇보다도 9.11 이래 종교사회학·역사·사상연구자들은 종교의 영향력이 결코 쉽게 지워질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전제에 입각할 때, 한국의 성소수자운동 및 그 지지자들이 개신교를 뿌리치기보다는 어떻게 최근 더욱 보수화하고 있는 개신교단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게 좀 더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셋째, 미국 리버럴은 보수주의 반혁명에 대처하는 데 그다지 성공적인 전략을 채택한 것 같지 않다. 20세기 중반 이래 보수진영에서 근본주의, 진보진영에서 세속주의가 강화되는 동안 진보·리버럴은 역설적으로 미국 기독교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를 점차 상실했다. 이는 오늘날 공화당과 복음주의자들이 기독교안 유권자들의 담론장에서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거의 개입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나는 보다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 혹은 그러한 담론을 그대로 흡수한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태도, 미국 진보·리버럴의 규범적 가치와 정치적 전략, 그리고 그들이 20세기를 해석해온 과정을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날의 세계와 한국사회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나 역시 미국 리버럴·진보의 가치관을 상당히 공유하는 입장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전략과 현상분석이 '미국의 몰락'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과제 중 하나는 근래 수십년 간 미국인 연구자들이 리버럴의 '휘그주의적' 전제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역사, 특히 20세기의 역사를 새롭게 연구해온 것을 소화하고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4. 주로 참고한 자료 세 가지만 열거하면,
1) 지난 9월 말 New Republic에 실린 "왜 보수주의자들이 모든 것을 걸으면서까지 캐버노를 원하는가"는 1980년대 이래 보수주의와 연방대법원의 관계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으며
https://newrepublic.com/article/151411/conservatives-want-kavanaugh-costs
2) 제프리 투빈, <더 나인: 미국을 움직이는 아홉 법신의 이야기>, 강건우 역, 라이프맵, 2010 은 연방대법원과 보수주의 반혁명 관련 비전공자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 중 하나다. 한국에서는 이 책이 대체로 미국 연방대법원에 대한 인상깊은 취재물 정도로만 간주되고 있는데, 이 책의 핵심서사는 1980년대 레이건부터 2000년대 말 아들 부시까지 연방대법원을 장악하려는 미국 우파들의 노력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있다.
3) Noah Feldman, _Divided by God: America's Church-State Problem--And What We Should Do about It_, NY: Farrar, Straus and Giroux, 2005 는 미국역사에서 세속주의 대 근본주의/복음주의의 구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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