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드먼 존스,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 독서노트 초안

Intellectual History 2018. 6. 6. 16:36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Gareth Stedman Jones)의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홍기빈 역, 아르테, 2018, 원저는 _Karl Marx: Greatness and Illusion_, The Belknap P of Harvard UP, 2016)를 지난 이틀 동안 몰아서 읽었다. <학산문학> 가을호 북리뷰로 이 책을 골라 쓸 생각인데(7월 중순 전에 초고를 완성하는 게 목표다), 일단 독서 직후의 간단한 인상들만 기록한다.

 

1) 원문대조는 하지 않았으나, 전체적으로 번역은 한국어로 무리없이 쭉쭉 잘 읽힌다. 가끔 '이걸 이렇게까지?'란 생각이 드는 순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특히 번역어 선정에 대한 꼼꼼한 역주는 확실히 역자가 여러 고민을 했음을 알게 한다. 고유명사나 개념어는 많은 경우 원문병기가 되어 있어서 역자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도 원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맑스 자신의 생애도 그렇고 스테드먼 존스의 책도 그렇고 워낙 방대한 시공간을 오가는지라 고유명사 번역에서 놓치는 부분들이 좀 있고 드문드문 있는 오기도 있으니 2쇄를 찍을 때는(나는 이 책이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식하고 성실한 교정자를 한번 더 거쳐서 흠결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있다. 오기나 고유명사 번역 실수를 볼 때마다 일일이 체크해놓진 않았는데 바로 기억나는 예 몇 가지를 짚자면 디킨스의 <블리크 하우스>Bleak House"<황폐한 집>" "<황량한 집>"이라고 일관되지 못하게 번역한다거나(원제가 중의적인 의미가 있긴 한데 기본적으로 작중 저택의 이름이라 고유명사로 치는 게 맞아보인다), 역시 디킨스의 소설 <작은 도릿>_Little Dorrit_에 나오는 단어인 circumlocution office (한국어로 직역은 안 되는데, 소설 원문에선 자기한테 오는 민원/일거리를 죄다 다른 부서로 뱅뱅 돌려서 행정처리가 필요하는 시민들을 엿먹이는 관료기구를 묘사하는 말이고, 최근 한국어 문헌에서는 "에돌림청" 정도로 번역하는 것 같다)를 독자들이 알기 힘든 말로 옮기거나, 영국의 역사가 루이스 네이미어를 나미에라고 옮긴다거나,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유행한 화풍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라파엘 이전 시기" 식으로 옮긴다거나 등등. 물론 책의 방대함을 고려할 때 내용 이해에 크게 무리가 없이 잘 읽히는 한국어로 번역한 역자의 노고는 반드시 인정받아야 한다.

 

2) 한국어판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건 논쟁적인 역자 서문이 맨 앞에 위치해있다는 사실이고, 개인적으로 2쇄 혹은 2판을 찍을 경우 역자 서문이 이왕이면 맨 뒤로 옮겨지는 게 독자들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역자 서문은 명확히 한국의 담론장에서 탈 맑스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데, 역자의 의도는 존중하지만, 역자의 인터뷰에 대한 여러 반응이 보여주었듯 사실 역자가 겨냥하는 형태의 맑스주의 신화화에 종속된 사람들이 한국 전체의 담론장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인터넷 리뷰를 뒤져봐도 역자 서문 때문에 괜히 겁을 집어먹거나 책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사례가 눈에 띤다. 스테드먼 존스의 서술은 방대하고 종종 관련 지식이 있는--특히 18-19세기 유럽지성사에 관심이 있는--독자들만 짚어낼 수 있는 포인트를 담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평이하게 쓰여져 있고 (심지어 주석도 매우 친절하게 전문적이지 않은 독자들을 위한 설명을 담고 있다) 한국어 번역의 경우도 학술장 바깥에 있는 독자들이 읽는 데 무리가 없다. 만약 역자의 의도가 이 책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부담없이 읽힐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면, 나는 역자서문을 뒤로 돌리고 독자들이 바로 스테드먼 존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도록 변경하는 게 더 합목적적이라 생각한다. 바꿔말하면 내 글을 읽고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역자서문은 책 본문을 다 읽은 뒤 보는 게 더 낫다고 권하고 싶다.

 

3) 책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매우 박식하고 뛰어나며 맑스(주의)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과 그렇지 않은 독자들 모두 주의깊게 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물론 맑스에 대한 평가에선 논쟁적일 수 있다. 책은 아주 거칠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5장은 맑스의 가족과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에 대한 배경으로부터 시작해 헤겔주의자들을 둘러싼 지적 논쟁을 상세하게 다루며,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가운데 5-9장은 1840년대의 격동기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독일, 런던을 오가는 급진파 정치 저널리스트로서 맑스의 언어적 실천들을 언어적·정치적 맥락을 세세하게 복원해가면서 조명한다. 마지막 9장에서 에필로그까지는 영국으로 망명한 이후의 맑스를 다루면서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론>에 대한 세세한 문헌학적 검토·평가와 제1인터내셔널에서 맑스의 활동을 주로 살피며 마지막에는 맑스 만년의 러시아 공동체에 대한 관심 및 엥겔스 등을 통해 맑스의 이러한 관심사가 잘려나간 "맑스주의"가 널리 유통되는 과정을 언급한다. 각 챕터별로 저자는 크게 네 가지 층위, 가족 및 가까운 지인들과의 삶, 맑스의 사유와 언어적 실천, 정치적 급진파 진영에 속한 행위자 혹은 활동가·조직가로서의 궤적, 그리고 19세기 중반기의 사회적·사상적 변화에 걸쳐--물론 이것들은 칼로 나뉘듯 잘릴 수 없이 상호연관되어 있다--맑스의 삶을 조명한다.

 

스테드먼 존스는 모든 것들을 상세한 문헌연구 및 2차문헌에 기초해 다루기 때문에, 저자의 입장에 대한 부분적인 논쟁의 여지는 있겠으나 비판자들이 적어도 역사적으로 크게 논박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는 먼저 번역된 탓에 또 필자의 저명함 덕에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서평이 많이 읽히는 것 같은데(https://wspaper.org/article/20347), 책을 한번 완독한 시점에서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지적으로 저급한 서평이기에 전혀 참고하지 않아도 좋다. 캘리니코스는 스테드먼 존스의 배신(?)에 대한 원한과 이 역사가의 본업에 충실한 전기가 맑스의 성인전(hagiography)이 아니라는 사실에 무척 감정적이 된 걸로 보이며, 그가 제기하는 문제제기 상당수는 원저의 맥락에 제대로 부합하지 않거나 중요성 자체가 떨어져보인다. 만약 캘리니코스의 리뷰를 읽고 스테드먼 존스의 저작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분들이 계시다면, 그냥 그 리뷰를 무시하고 책을 처음부터 직접 읽는 게 훨씬 올바른 선택이라고 말씀드리고자 한다.

 

4) <카를 마르크스>를 앞서 다소 중첩되는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자의적으로 나눈 것은 각 대목에서 내가 읽은 흥미로운 면들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1-5장에서 주목할 지점은 스테드먼 존스가 케임브리지 학파로 대표되는 지성사가들과 합류하면서 18-19세기 사상적 논쟁의 맥락을 보다 섬세하게 발굴해낸다는 데 있다. 그는 한편으로 특히나 프랑스 혁명 이후 시기 독일의 철학적-정치적 논쟁에서 기독교 신학의 교리를 어떤 식으로 수용할 것인지가 얼마나 또 왜 중요했는가를, 그리고 그것이 헤겔철학 및 관련 논쟁의 성격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간결하지만 놓칠 수 없게 지적하며, 다른 한편으로 17세기 영국혁명, 18세기 말-19세기 초 프랑스혁명을 거쳐 확산된 공화주의적 전통이 헤겔주의와 맑스에 끼친 영향 또한 강조한다(좀 더 눈이 밝은 독자라면 이스트반 혼트Istvan Hont에의 빚을 강조하는 스테드먼 존스가 <강요>에서 맑스의 사회이론을 설명하면서 사회성sociability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걸 캐치할 것이다). 이후의 내용에서도 암시되지만, 17-18세기 자연법·상업사회·신학적 논의에서 사용된 여러 언어·논리의 영향은 19세기 전반부에 지적인 훈련을 받은 맑스에게서도 예외는 아니었다--18세기 사상사 연구를 따라가고 있는 나의 솔직한 아쉬움은 오히려 스테드먼 존스가, 물론 책 전체 기획을 고려할 때 비난할 지점은 아니지만, 그러한 영향을 종종 아는 사람만 알아보도록 서술한다는 것이다.

 

첫 파트가 전통적인 지성사 연구를 바탕으로 맑스가 속해있든 19세기 전반부 독일의 여러 논쟁의 맥락을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맑스의 입장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룬다면, 5-9장에서는 좀 더 마이크로한 수준의 렌즈를 통해 맑스의 정치적 저널리즘을 세세하게 조명한다. 즉 민주주의자·공산주의자 등 여러 형태의 급진파가 서서히 대두하는 1840년대 독일의 역동적인 맥락 속에서 맑스가 '언어를 통한 정치행위'를 어떤 식으로 수행했는지 훨씬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맑스는 기본적으로 1790년대의 프랑스 혁명을 근본도식으로 삼아 자기가 속한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자 했으며--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명백한 오판 또한 존재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그를 바탕으로 자신이 속해있고 또 관여한 정치적 노선이 다른 급진파 경쟁자들을 앞질러 헤게모니를 쥘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경주했다(그리고 실패했다). 이 부분에서 특히 매력적인 지점은 단순히 맑스가 노동계급 중심의 공산주의를 외쳤고 다른 보다 폭넓은 지분을 보유한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갈라졌다는 서술에 만족하는 대신 맑스가 겨냥했던 적들, 가령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등이 맑스의 예측을 뛰어넘는 전략적 움직임을 보여주었던 점에 대한 조명을 포함해 당시의 정치적-담론적 전장(戰場)의 면모를 재구성한다는 데 있다. 분명 스테드먼 존스는 맑스의 판단과 정치적 선택에서 발생한 여러 착오와 실수들을 냉정하게 지적하지만, 그는 (이 책에 종종 가해지는 잘못된 비판과 달리) 맑스를 단순한 의미에서의 19세기 인물로 과거에 가두는 대신 역동적인 세계 속의 정치적 행위자로 조명한다--이것이 한 명의 "이론가""고전"의 완전함 또는 의미를 이끌어내려는 경향이 있는 여러 독해와 대비할 때 맥락주의가 갖는 매우 강력한 장점이다.

 

마지막 파트는 기본적으로 가운데 파트의 서술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자본론>으로 이어지는 맑스의 보다 커다란 후기 저작들에 대한 문헌학적·맥락주의적 해석을 시도한다. 스테드먼 존스의 <자본론>에 대한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맑스는 기본적으로 헤겔 학파의 논리구조에서 사유를 시작했고, 이는 <자본론>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제는 맑스와 엥겔스가 특히 독일에서 1840년대에는 문제없이 통용되었을 그러한 사고틀이 급격한 사회변화와 함께 사상적 패러다임 또한 격변한 1860년대의 독일에서는 그다지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점이다. 스테드먼 존스가 지속적으로 맑스가 무엇을 읽었는가를 언급하는 데서도 암시되듯, 기본적으로 맑스는 실천적 저널리스트답게 동시대의 학적 담론·독자들의 반응을 절대 등한시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저작이 헤겔철학에의 무관심과 함께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맑스는 (스테드먼 존스가 여러 초고와의 대비를 통해 강조하듯) 자신의 저작에서 헤겔철학적 요소를 적어도 겉으로나마 최소화하기를 원했는데, 문제는 그러한 요소들을 묻어두면서 당대까지의 정치경제적 변화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틀을 수립하는 게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였다는 점이다(거기에 시시각각 변하는 정치적 변화 또한 맑스의 저술에 지속적인 변화를 끼쳤다). 저자는 맑스가 이 과제를 사실상 성공해내지 못했으며 말년의 원고를 포함해 <자본론> 기획의 난점을 돌파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자본론>의 당대 맥락에서의 강점은 맑스가 영국 망명에 따라 생계를 위해 미국의 언론 <트리뷴>에 기고를 시작하면서 흡수한 엄청난 양의 영국 문헌들(<이코노미스트> 등의 기사, 정부보고서, 학술서 등등)을 기반으로 자본의 발전이 노동자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를 토대로 한다는 주장을 실감나게 내놓았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나는 맑스 연구자도, 문헌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스테드먼 존스의 주장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으며 그럴 의향도 없다. 그러나 스테드먼 존스의 해석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비판이 단지 몇몇 맑스의 문헌에 대한 해석의 이견 혹은 맑스의 총체적 이론·유산은 그런 게 아니다 식에 그친다면, 그건 스테드먼 존스의 해석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형태의 비판을 근거로 이 책을 평가절하 하기는, 설령 스테드먼 존스의 주장에 의구심을 품는 독자라고 해도, 어려워 보인다.

 

5) 아마도 <카를 마르크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강점 중 하나를 꼽는다면 특히 저작의 중후반부에서 잘 나타나듯 저자가 19세기 ()유럽의 놀라운 사회변화와 그에 수반한 학문적·담론적 변화를 지속적으로 짚어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단지 한 명의 일생과 언어가 아니라 그가 살아가던 당시의 세계를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통찰은 오랜 기간 19세기의 노동계급과 그 언어를 연구해온 저자의 경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좁게는 수개월에 걸쳐, 크게는 매 10년마다 19세기의 물질적·언어적 변화가 요동치는 상황을 붙잡아내고 그 변화 속에 맑스를 위치시키는 저자의 감각은 확실히 역사가로서의 오랜 숙련만이 허락하는 탁월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스테드먼 존스는 맑스가 그러한 변화를 예견하거나 최전선에서 붙잡기 보다는 오히려 한 발짝씩 늦거나 자기 자신의 이론적 틀에 얽매여 사태의 전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많았던 것처럼 그려낸다. 그가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문제 중 하나는 특히 선거권을 획득하려는 투쟁의 의미, 선거권 확대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정치의 등장과 같은 주제를 맑스가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물론 사려 깊은 독자라면 19세기의 엄청난 변화속도를 고려할 때 맑스가 매순간 이를 충분히 따라잡지 못했다는 점이 딱히 힐난의 대상까지는 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나는 저자가 이를 다분히 의식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맑스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이 책의 입장은 오늘날 선거·대의제 등의 주류적정치에의 참여 및 개선시도에 대한 급진주의 좌파의 거부감·몰이해를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보다 중도적인 입장의 시선과 상당부분 겹쳐진다.

 

6) 개인적으로 아쉽다고 생각하는 지점 두어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장 아쉬운 점은 젊은 맑스의 철학적 논의에 대한 해석에 비할 때 후기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논의가 동시대의 다른 논의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서술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카를 마르크스>를 읽으면서 맑스가 사회주의자·노동운동·급진주의 그룹에서 다른 입장들과 어떤 지점에서 대립각을 세웠는지에 대한 풍부한 설명을 볼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맑스의 정치경제학이 (한 세대 앞의 데이비드 리카도를 제외한) 당대의 다른 정치경제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맑스의 냉소적인 코멘트에 대한 소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가령 저자 본인이 제자와 함께 편집자로 참여한 <케임브리지 19세기 정치사상사> (The Cambridge History of Nineteenth-Century Political Thought, 2011)에 수록된 에마 로스차일드(Emma Rothschild)의 매우 박식한 설명이 보여주듯(22“Political Economy,” 748-79) 19세기 동안 정치경제학은 대중적으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패러다임과 논쟁도 수차례 바뀌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맑스의 저작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심지어 맑스의 저작이 아예 동시대의 논쟁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식의 설명조차도누락되어 있고 그 부분에 대한 맑스주의 해석자들의 도전을 피하기는 어려워보인다.

 

둘째, 예컨대 마지막 부분에서 19세기 후반 원시적 공동체에 대한 학문적 관심사가 급증했다는 식의 포인트는 분명 탁월하지만, 특히 19세기 중반에 걸쳐 당시 유럽(특히 독일)의 철학적·학문적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대한 종합적인 코멘트는 충분히 나와 있지 않다. 물론 맑스의 전기에 어떻게 그것까지 요구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바로 이 문제가 <자본론>에 대한 저자의 해석의 핵심적인 토대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단순히 당시 엥겔스와 맑스가 담론적 변화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양자의 서신을 통해 보여주는 것 이상의 설명은 필요했다. 물론 19세기의 사상적·담론적 변화는 그 폭과 넓이 모두에서 실로 엄청난 것이었음은 분명하고, 지금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뛰어들고 있지만 여기에 대한 종합적인 개괄은 아직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19세기 중반 이후 헤겔철학의 몰락과 함께 (특히 영국 다윈주의와 과학주의의 도전에 직면한) 독일철학이 어떤 길을 갔는지는 한국어로도 번역된 프레더릭 바이저의 <헤겔 이후>를 포함해 아직까지 영어권에서 많은 연구를 요구하는 질문이며, 아직 연구되지 않은 분야를 다루지 못했다고 저자를 비난하는 건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후 19세기 유럽사상사 연구의 진척에 따라 스테드먼 존스의 해석이 도전받을 지점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7) <카를 마르크스>는 영웅전도, 성인전도, 이론해설서도 아니며 만약 그러한 책을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나는 그에 포함되지 않는다--이 책에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저자가 맑스를 시시포스적 영웅으로 그려낸다는 역자의 평가에도 나는 쉽게 동의가 가지 않는다...저자는 딱히 그러한 암시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한 명의 정치적 행위자가 전례 없이 유동적인 세계 속에서 어떠한 전략을 구상하고,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실천을 시도했는지, 그 실천이 다른 행위자들의 실천·세계의 변화 속에서 어떤 결과로 돌아왔는지, 그리고 (종종 의도에 부합하지 않은) 결과를 받아든 행위자가 다시금 어떤 변화를 꾀했는지를 보는 경험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독자라면, 이 책은 분명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스테드먼 존스의 책은 한 초월적인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역사적 세계와 그곳을 살아가는 정치적 인간을 그린다. 그것은 책을 읽을지 말지 고민하는 우리 자신 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모든 실천적 행위자가 속해 있는 조건이다. 맑스와 그의 언어를 역사 속으로 돌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실천을 역사 속에서 사고할 수 있게 되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여러 비판자들의 혐의와 달리 매우 실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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