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 입문> 또는 아도르노의 벤야민 비판: 변증법과 매개의 문제

Reading 2015.05.19 01:15

<쥘리에트 혹은 악덕의 번영>을 다 읽고 도서관에서 <소돔의 120일>을 빌렸다(같은 역자에 같은 출판사다...77년 초판이 출간되었다가 회수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매우 오래 전이지만 직접 읽어보는 건 처음이라 기대하고 있다. 사드를 읽으면서 갖가지 괴상한 악몽들을 꾸고 있는데, 빨리 읽고 정리하고 넘겼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어쨌든 목요일까지는 수업에 집중해야 해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가 아니면 손대지 말고 남겨 두어야 한다.


사드 및 수업텍스트와 별도로--나는 이걸 "여러 개의 공으로 저글링하기"라고 부르곤 한다--아도르노를 찔끔 찔끔 읽고 있다. 최근에 1958년도 강의 <변증법 입문>_Einführung in die Dialektik_이 국역출간되었고(이 책은 아직 영어로는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국역자는 <부정변증법> <프리즘>의 역자이기도 한 홍승용 선생) 가끔 쉬는 시간에 느릿느릿 읽어가는 중이다(20강 중 10강까지 읽었다). <부정변증법> 및 <미학 이론>에 이르기까지 후기 아도르노의 저술에서는 항상 변증법적 사유라는 (그 자신은 이런 표현을 싫어하겠지만) '방법'에 대한 고민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책은 다른 텍스트에서 단편적으로 표현되어 있던 문제의식들을 집약해 풀고 설명한다는 점에서 후기 아도르노에 대한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한다; 국역된 강의록 중에서 이 책과 함께 <사회학 강의>, <미학 강의1>은 각각 해당 영역에 대한 좋은 입문이 될 수 있겠다(<부정변증법 강의>는 절반 정도가 메모만 기록된 상태로 출간되었다). 다른 강의록들을 포함해 이미 아도르노의 서술에 익숙한 독자들은 이 책에서 다른 책 곳곳에서 짧게 언급되었던 중요한 모티프들이 상당히 친절하고 상세하게 다뤄지는 걸 보면서 반가움을 느낄 것이고, 아도르노를 비교적 새롭게 접하는 이들은 이후에 맞닥트릴 모티프들을 미리 접하면서 변증법적 사유 자체를 경험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겠다. 지인들에게 아도르노를 처음 권할 때 통상적으로 <미니마 모랄리아>나 <프리즘>을 언급하곤 하는데, 이제 조금 더 본격적인 사유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저술로 추천할 만한 책이 생겨서 다행이다.


밑줄을 치고 음미할 대목이야 한 두 군데가 아니지만, 9강에서 변증법의 이론적 난관을 다루면서 벤야민의 보들레르론을 언급하는 걸 특히 눈여겨 보고 싶다(155-61). 아도르노와 벤야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케이드 프로젝트> 혹은 파사주 작업의 서두 역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벤야민의 보들레르론에 대해 아도르노가 꽤 강력한 비판을 가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벤야민의 애호가들이 이 주제를 다루면서 사석에서 "아도르노가 벤야민의 심오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정도로 언급하고 치워버리곤 하지만, 나는 해석자들조차도 무엇인지 해명하지 못하는 물신화된 '천재성'이야말로 반 이론적 사유가 아닌가 싶다. 벤야민-아도르노 서간문이 국역되지 않은 지금(영역본은 존재한다) 아직까지 이 주제를 '이론적'으로 검토한 한국어 글은 쉽게 찾기 힘들다; 최성만 선생의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은 보들레르론을 둘러싼 사실관계만을 정리해놓은 정도고(362-64), 꽤 오래된 글이지만 김유동 선생의 <벤야민의 새로운 천사>는 이론적 논쟁을 소개한 뒤 벤야민과 아도르노에 대한 인상비평으로 마무리해버린다(5절; 급한대로 http://waam.net/xe/index.php?mid=autom&page=10&category=80912&document_srl=82822 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것 중에서는 아감벤의 초기 저술 <유아기와 역사>에 실린 "왕자와 개구리" 정도가 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유일한 텍스트인데, 아감벤은 아도르노를 반비판하고 벤야민을 옹호하면서 변증법적 매개 개념 자체를 거부하고 '매개없는' 종합/반영을 주장한다. 나는 이게 아감벤이 벤야민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활용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일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된 이론적 검토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아감벤에 기대어 믿음을 말할 수는 있으나 그에 기초해 개념적 사고를 하기는 힘들다.


9강의 후반부에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의 이론적 난관 중 하나로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꼽는다. 즉 총체화하는 정신의 서사가 먼저 주어져 있다는 헤겔의 '순진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이 부분의 논리적 난관을 지적한 것으로 찰스 테일러의 <헤겔>에서 논리학을 다룬 파트를 참고할 수 있겠다), 동시에 개별적으로 주어진 부분의 경험에서 출발해 전체를 구성한다는 전통적인 과학논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 전체가 선행하는가, 부분이 선행하는가? 완전한 전체도, 완전한 부분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아도르노는 9강 후반부에서 제기한 이 문제를 10강을 거쳐 11강 초반부에까지 계속해 다루며 여기에서 제1철학, 존재론과 같은 주제들을 새롭게 끌어내기 때문에 지금 그걸 손쉽게 풀어내기는 어렵다. 무리를 무릅쓰고 요약한다면, 최초에 우리는 현실을 구체적인 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희미한 형태의) 전체, 일반화된 의식의 형태로 받아들이며, 이러한 전체에 의거해 부분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게 된다(구체 혹은 특수한 경험 역시 전체에 의해 '매개된' 인식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자).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은 다시금 원래의 전체에 모순되는 지점을 인식하고 전체의 상을 수정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이러한 운동과정은 전체-부분의 관계를 매개하는 이론의 '이성적인' 작업을 거칠 때에만 순진함을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운동의 과정은 이론 역시 지속적으로 갱신된다. 요컨대 변증법은 제1철학이 요구하는 단단한 토대 위의 건축이 아닌 멈추지 않고 변하는 운동과정으로서 사유의 "역학적 성격"(157)을 강조한다. 실제로 짜임관계/성좌konstellation의 문제나 전체가 상위원리로서가 아니라 부분들의 '관계'로서 존재한다는 것, 실천의 기능과 같은 사항 등을 누락하면 곤란하겠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해 두자; 아도르노가 단순히 총체성을 부정하여 파편에 머문다거나 '부정변증법'을 부정신학과 등치시키는 것과 같은 오독을 교정하는 데는 이 정도의 설명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그래서 벤야민과 아도르노를 그 사유에서가 아닌 독자의 주관적인 인상에서 논하는 걸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변증법의 맥락에서 아도르노의 벤야민 비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아도르노의 벤야민 비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 2제정기의 파리>"Das Paris des Second Empire bei Baudelaire"(국역은 길판 선집 4권 수록)에서 벤야민은 자신이 분석하는 텍스트의 몇몇 대목을 자본주의의 핵심적 성격과 등치시킨다. 이것은 전체(자본주의 체계의 핵심적 경향)과 부분(보들레르의 <포도주> 연작)을 매개하는 이론적 분석없이 곧바로 양자를 잇는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지 못하다; 벤야민은 자신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말이다(공정하게 말하자면, 본래 벤야민의 의도는 결국 집필되지 못한 그 글의 3부에서 매개의 이론적 문제를 다루려 한 것이었다--164-65 각주 143을 참고). <변증법 입문> 9강에서 이 부분을 언급하는 대목을 인용하자.


"[벤야민의] 경향은 그의 이론상 보들레르 시에서도 핵심적 성격을 지니는 전체 현실의 유물론적 결정성에 대한 문제를 그러니까 포도주세, 싸구려 술집, 넝마주이 등과 같은 개별 경험들로 완전히 직접 환원시키는 것이었습니다. [...] 유물변증법적 사고, 그러니까 물질적 조건들에 근거해 사회적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사고에 대해 생각한다면, 포도주세나 교외와 같은 직접적 사실들에 호소하는 것은 물론 그런 이론을 위해 충분하지 않습니다. [...] 당시 나는 벤야민에게 이 경우 볼 수 있는 물질적 모순들과 물질적 긴장들의 개별 모티프들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어떤 시의 내용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물변증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그것이 근거로 삼는 개별 자료들이 전체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사회의 총체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고 상정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개별 경험들은 그것이 아무리 충격적이고 아무리 확고해도 자체로는 이론적인 사회적 결론들, 사회 이론적 결론들을 끌어내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눈에 띄는 사실들을 단순히 묘사하는 데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개별 계기들을 나름대로 사회적 총체의 구조와 관련지어야 한다고 말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예컨대 우리가 전성기 자본주의에 대한 보들레르 서정시의 관계를 다루고자 할 경우 [...] 우리는 보들레르가 직면했던 자본주의 현실의 개별 모티프들을 끄집어내어 그 내용의 해명에 관련짓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이때 예컨대 보들레르에게서 사실상 아주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상품의 성격을 사회구조 전체로부터 추론하고, 또 어떤 점에서는 이 서정시에서 상품형식의 주관적 반영을 감지하려 시도해야 하지, 개별적인 동기유발들에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158-59).


아도르노의 비판을 몰이해나 질투심 혹은 심리적 동기로 설명하는 분들에겐 유감이지만, 그가 전후 독일에 복귀해 사회학의 영역에서 변증법적 방법론의 구축을 위해 쏟은 노력을 본다면, 이 문제는 단순한 심리적 욕구에서 기인한 것으로 치워버릴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이론의 정립을 위한 중심문제로 진지하게 간주할 필요가 있다. 벤야민의 기획이 실현된 형태가 적어도 인쇄물의 형식으로는 발견되지 않은 지금 실제로 벤야민의 방법이 아도르노의 비판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벤야민의 기획을 재구성하고자 했던 수전 벅-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_Dialects of Seeing_ 같은 시도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실제로 벤야민이 아도르노의 문제제기를 그냥 지나쳐가진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추상적인 글쓰기 스타일 때문에 종종 낭만주의적 천재로 오인되고는 하지만, 벤야민의 학술적인 글쓰기들을 고려한다면--<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 <괴테의 <친화력>>, <독일 비애극의 원천>--그가 방법의 문제를 아주 깊은 수준에까지 사유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심지어 파편화된 글쓰기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역사철학테제")"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첫 테제의 핵심은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의 결합이라는 방법론적 구상이며 이 글 자체가 온전히 역사구성의 방법에  할애되어 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내친김에 말하자면 난장이와 자동기계, 연속체의 폭파와 같은 '이미지들'에만 매달리면서 정작 벤야민이 추구한 방법을 묻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사유를 물신화한다는 측면에서 벤야민과 아도르노 양자 모두의 경멸을 받을 것이다.


방법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고한다면 나는 한국에서의 통상적인 벤야민 활용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벤야민이나 아도르노의 이론을 이해하고 문헌학적 지식을 축적하는 작업의 의의를 부인할 수는 없겠으나, 양자, 특히 벤야민의 경우에, 특정한 이미지/모티프만을 떼내어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서고자하는 작업이 몇이나 되는가? '실용적 필요'--석사논문 이상의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만--때문에 벤야민을 끌어다 쓰는 경우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벤야민 애호가라고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이론가를 대하는 최고의 예우가 그의 사유를 가장 기초적인 방법에서부터 읽고 활용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그가 실현하려고 했던 방법의 귀결을 그 성패를 떠나 끝까지 뒤쫓는 것이라면, 벤야민을 경애하는 이들은 벤야민에게 그만한 예우를 다 하고 있는가? 벤야민과 변증법의 관계를 묻지 않을 때--예를 든다면 앞서 언급한 아감벤의 처리는 그 자체로는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분명한 자기 입장의 표현이다--벤야민의 사유를 (적어도 후기의 작업을) 그 근본에서 논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 질문을 뒤집어본다면, 벤야민이 자신의 작업을 '역사유물론'이나 '변증법'이라고 부를 때, 이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된 개념인지를 묻고 설명할--적어도 그것을 시도할--수는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가 어떻게 사유했는가를 이해하지 않고 그의 사유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음미하고 재구성하기란 불가능하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수용의 형태든 비판의 형태든 변증법에 대한 질문이 결여된 벤야민주의자는 성립할 수 없다.


결국 이 주제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문제의식으로 되돌아온다. 학문은 현실 앞에서 어떻게 비판적일 수 있는가?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변증법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처럼 반지성적인 가십으로 끝날 게 아니라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아도르노는 사회의 구체적인 자료들과 총체적인 체계를 잇기 위해 매개의 층위에서 이론이 있어야만 학문이 변증법적일 수 있다고, 따라서 비판적인 성격을 견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벤야민 역시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이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지상태의 변증법"을 통해 참된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연구자들이 망각하기 쉬운 태도, 즉 이론의 실천적 지향을 깔고 있다. 그러한 지향 위에서 사유의 방법은 필연적인 과제로 주어진다. 방법 혹은 이론은 지적 쾌/권위를 선사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유되어야 한다. 나는 아도르노의 벤야민 비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양자에게서 변증법과 매개가 갖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이런 맥락에 위치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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