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글쓰기 교육의 정신에 관하여

Comment 2014. 6. 26. 20:16

이번 학기 수업 최종과제 우수작 리스트를 받았고 읽어보았다. 나름대로 매력적인 면모들이 있는 글들이었지만...솔직히 말해 조금 날카로운 사고의 맹아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그것만으로도 신입생들 중에서는 탁월한 편이지만)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감상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양식의 글을 인문대 학생들 전체에 일종의 모범처럼 읽히는 것에는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 물론 학생들이 읽어서 나름 얻을 게 있으리라 생각하니까 공지사항에야 올리겠다만...나로서는 학생들이 조금 거리를 두고서 읽기를 권하는 코멘트를 덧붙일 수밖에 없다; 요점은 글 자체가 좋냐 아니냐가 아니라 글이 드러내는 정신을 수긍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나는 조금 더 중요한 지점에까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이 글들을 우수작으로 선정한 누군가와 나 사이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글쓰기의 규범"에 관한 합의가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단지 둘 혹은 몇 명 사이의 간극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서울대 인문대의 10여개 과들 사이에 (학부 수준에서라도) 좋은 글쓰기에 대한 공통된 합의가 존재하기는 하는지를 묻고 싶다. 이번처럼 "좋은 글쓰기" "좋은 서평"에 대한 기준이 전혀 주어지지 않은 경우, 이런 식으로 서로 간의 간극이 드러나는 것 같다. 심사자들이 "학부 신입생이니까 굳이 학술적인 성격일 띨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간극은 줄어들지 않는다. 학술적이지 않은 글, 그냥 예쁘게, 적당히 자신을 드러내면 되는 글 정도라면 조교들이 달라붙어서 가르칠 필요도 없다. 좋은 에세이들을 골라서 읽히면 될 일이고, 그런 과정에서 딱히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게 중요하지도 않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그런 종류의 글쓰기는 그냥 기회를 주면 되는 것이지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 (비 인문대 전공자들에게 '교양' 글쓰기를 향유할 기회를 주는 정도가 아니라면) 대학에서 그렇게 본질적인 글쓰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즐기는 글쓰기' 또는 보다 속칭에 가까운 '문학적 글쓰기'(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나는 절대로 이러한 글쓰기에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그냥 쓰고 싶을 때 쓰게 하거나 쓸 기회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이번 학기에 짧게나마 학생들의 글들을 첨삭하면서 가장 자주 많이 강조한 것은 '공적인 성격'을 띠는 글쓰기였다. 물론 우리들은, 심지어 학자들조차도 자신의 주관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주관을 가장 철저한 지점에까지 말살시키면 객체 혹은 대상으로부터 아무 것도 끌어낼 수 없다; 객체를 주체와의 조응을 통해서만 운동을 시작하고 스스로의 진면목을 점차 드러낸다. 그러나 단순히 각자의 주관을 긍정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간다면 최종적으로 우리들 사이의 접점 혹은 대화가 남아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애초에 (후에 공적인 것을 떠맡아갈) '이성'이 등장한 것 자체가 대화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과 불가분한 관계이기에, 학술적인 글쓰기는 대화를 위해 "나"라는 명시적인 주체를 잠시 감추고 가능한 "객관적인" 사고를 진행시키도록 요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잠시동안 공적인 이성, 자신이 다루는 대상의 진면목을 "나"로 가려버리지 않는 이성=언어가 되기를 요구받는다. 즉 나의 사고과정을 타인들이 읽고 검토하고 참고할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내라는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비로소 철저한 글쓰기 교육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모든 소통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대학에서 요구하고 가르치는 소통은 학적인/공적인(둘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겹치는 지점은 있다)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서 짧은 코멘트나마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왔다.


 중고등학교까지를 포함해 한국의 학생들이 배우는 대부분의 글쓰기는 이런 규준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조금 나아간다면 기껏해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글쓰기가 대부분이지 자신의 글/사유가 실제로 무엇을 담고 있으며 어떻게 읽힐지를 고민하는, 독자=타자를 고민하는 쓰기와 소통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교육은 이뤄지지 않는다(일종의 총체적인 소통부재시대에 우리가 도달하고야 만 것은 이러한 교육의 부재와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의 부재란 통치자와 피통치자간이 아니라 피통치자들, 혹은 "민주 시민들" 사이에서의 소통가능성이 점차 절망적으로 되어가는 사태를 가리킨다). 신형철의 책 제목을 끌어온다면, 나는 감성이 소통과 공동체를 회복시켜줄 유일하고 결정적인 도구임을 단호히 부정한다. 우리는 각자의 감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일 수 있지만, 그러한 감성이 그 자체로 상호연결을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미 우리들의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감성/감수성을 가질 수도, 그것을 가지기를 요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감성에 기초한 공동체의 재창출 요구는 무반성적일 뿐만 아니라 은밀히 폭력적이다. 사상사적인 맥락을 덧붙인다면, 근대 서구에서 아담 스미스를 포함해 도덕적 '감성'에 기초한 공동체의 구축가능성을 탐색한 인물들은 대체로 이성을 배제하는 형태로 감성을 배치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마도 미적인 요소에 기초해 보편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가장 근본적인 지점에서 정초하려 한 인물일 실러조차도 이성을 배제한 형태에서 보편이 가능하다는 주장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이 메마른 이성적인 기계들이 아니라 이성에 근거한 최소한의 소통지점조차도 부재한 퇴행상태에 가깝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문창극과 김명수 등의 지명은 국민의 감성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최소한의 이성적인 행위에도 미달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대학원은 말할 것도 없고 학부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의 근본적인 규준은 '학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감상적인 글쓰기가 대학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도, '학적인' 글쓰기라는 것이 일상을 무시하고 상아의 빛깔을 띠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4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학생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글쓰기의 최소한의 공통규범이 있어야 한다면 이러한 형태여야 하지 않는가를 물을 뿐이다. 모 선배의 표현을 빌리자면, 몇 가지 재치있는 생각과 여기저기서 채집한 수사적인 장식물로 자신의 글을 채워 "이빨을 까는 고학번들을 잔인하게 쳐죽여야 한다"(정확한 인용이 맞는지는 자신이 없다;)면, 이 학생들이 처음 대학에 들어온 시점에서부터 무엇이 진정으로 독자를 배려하는 글인지, 무엇이 공허하지 않고 내실있는 글쓰기인지, 수사가 단순히 글에 낯선 독자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힘을 발휘하려면 어떻게 활용되고 배치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은 짧은 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종의 감상적인 글쓰기, 낭만적인 글쓰기를 마치 진정으로 인문학적인 글쓰기인양 묵과해주는 태도가 힘들고 고된 노력을 요구하는 공적이고 비판적인 글쓰기를 학생들의 머리로부터 지워버릴 유혹으로 남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이빨까는" 글쓰기는 그와 같은 감각을 갖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습득될 수 없다는 점에서부터 분명히 제대로 된 교육의 산물은 아니며, 바로 그런 글을 쓰는 학생들 본인이 자신이 만들어놓은 허구적인 논리에 도취되어 발이 걸려 넘어진다는 점에서 방치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학부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은 막연히 더 많은 양의 수업을 학생들에게 떠맡기면 된다는 전근대적인 발상이 아니라 가장 기초적인 수업에서부터 앎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으로부터 가능하다.


 유감스럽게도, 글쓰기 교육의 정신이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학적인 글쓰기가 반드시 삶의 글쓰기와 분리된 위치에 있어야만 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아직 우리에게 공유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질문들이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는 한, 서로 다른 학문적 규준에 속해있는 우리들은 서로 다른 글쓰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밖에 없고 학생들은 여전히 졸업 때까지 '인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다소 막연한 분홍빛 꿈만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상이 여전히 지배적으로 남아있는 한 "인문학적 정신"이라는 것이 애완동물처럼 목줄에 매여 컹컹 짖고 꼬리를 흔들며 자본과 권력이라는 주인을 좇아 내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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