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Reading 2014. 5. 5. 02:03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필요하다"(Necessaria est methodus ad veritatem investigandam). -- 제4규칙.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1997. 을 읽었다. 학부 때 철학과 수업에서 <성찰>은 두어번 읽었는데 정작 더 유명한 이 텍스트를 못 읽어서 걸리던 차, 홉스 세미나 하는 걸 기회로 한번 쭉 읽었다. 어차피 내가 기하학적인 내용을 (고등학교 수학을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별로 어려운 내용도 아니다) 신경쓰거나 할 것도 아니라서 흥미가는 부분에 조금 더 집중하며 읽었다. <방법서설>과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 모두 기본적으로는 방법에 관한 텍스트이기에 나처럼 사유의 방법 자체를 계속해서 질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Cogito Ergo Sum 자체보다 훨씬 흥미로울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성찰>이 좀 더 논리정연하게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래서 철학과 수업 시간에도 <서설>이 아니라 이것을 골랐겠지만, 보다 역사가적인/문헌학적인 연구자를 지향하는 내게는 <서설>쪽에 체크해둔 부분이 훨씬 많았다는 것만 말해둔다.


일차적으로 가장 눈에 밟히는 부분은 토머스 홉스, 특히 <리바이어던>의 홉스와 겹치는 지점이다. 물론 계몽주의의 지성사를 조금만 알면 놀라운 일이 아니겠지만, <서설>과 <리바이어던>은 전 시대의 철학자들, 그리고 그들이 전범으로 삼았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철학을 비판하면서(국역본에 수록된 삽화 중에는 아예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이 적힌 책을 밟고 앉아있는 그림도 있다) 학문의 새로운 전범으로 산술과 기하학을 제시한다. 데카르트야 카르테시안(Cartesian) 좌표계도 있고 매우 직접적으로 수리적인 영역을 신뢰가능한 것으로 제시하지만 홉스는 조금 의외로 느껴질 사람들이 있겠다. 그러나 <리바이어던> 곳곳에서 홉스는 정치철학 또는 시민철학의 원리를 기하학과 비교한다. 오늘날의 물리학은 굉장히 이론적인 학으로 간주되지만, 홉스의 시절까지 물리학은 경험적인 학문으로서 명증한 앎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으로 여겨졌고, 적어도 우리 인간이 창조자maker로서의 앎을 보유한 기하학 및 정치철학 쪽이야말로 진실된 앎을 내놓는 학문이라고 홉스는 주장한다. 둘의 수리에 대한 취급은 각별해서, 홉스는 이성reason을 '셈하기'reckoning으로 정의하면서 이성적 사유를 더하고 빼는 것과 동일시한다. 데카르트는 <규칙들>의 한 항목에서 아예 사칙연산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면서 신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다. 다시 요약하자면 둘은 모두 새로운 시대의 학을 개척하는 지평 위에 선 사람들이었으며, 새로운 학의 전범으로서 수리적인 것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유사섬을 지닌다(동시대인이었던 홉스와 데카르트의 관계 또한 꽤나 흥미로운 연구거리인데--<서설>이 1637년, <성찰> 초판이 1641년에 출간되었고 집필 후 출간까지 시간이 좀 걸렸던 <리바이어던>은 데카르트의 죽음 1년 뒤 1651년에 출간되었다--, 논문을 하나 구하기는 했지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아, 그들이 자신들의 주요한 분석방법으로 미시적인/환원적인 단위들을 먼저 설정하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스타일의 연역법을 사용했다는 것도 기억해 두자.


둘을 비교하면서 세부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사항도 몇 개 더 있다. <서설>에서 데카르트는 직접적으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이성에서 찾고 그 근거로 언어 및 의사소통능력을 꼽는다. 인간에게 어느 정도 주체적인 언어 표현이 가능하다면 동물은 기계적으로 반응할 뿐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관에서도 홉스는 데카르트와 퍽이나 유사한데, 그는 언어로 인해 초래되는 오류에 대해 무척이나 날카롭게 반응하면서도 역시나 언어 능력을 인간의 중요한 특질로 꼽는다. 다만 데카르트처럼 이성과 언어의 관계를 가깝게 놓는 것 같지는 않다...두 사람 모두 과거의 학문들과 관계를 끊고 근본적으로 새롭게 시작하고자 했던 사람들이지만, 데카르트에게 그 시작점이 유일하게 명증한 사실로서의 코기토였다면 홉스의 경우 개념어들의 혼동을 가로막기 위해 그것들을 재정의해서 합의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한 과제였다(그래서 홉스를 원문으로 읽으면 벤담을 비롯한, 나는 '공돌이식 글쓰기'라고 농담삼아 부르는데, 공리주의-실증주의자들의 글쓰기가 떠오른다...<리바이어던> 국역본은 내용을 훌륭하게 옮겼지만 사실 원문의 스타일은 거의 전해지지 않아서 내용요약이 아닌 '읽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최소한 영어판을 봐야한다...). 물론 홉스에게 정념과 감각처럼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지각이 중요성을 가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의 텍스트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정의'definition가 차지하는지를 본다면 데카르트의 텍스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간공동체에 근거한 '실용적'인 발상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둘 다 자신의 모국어, 즉 각각 영어와 불어로 학적인 텍스트를 먼저 쓴 사람들이기도 하다. (데카르트의 <서설>이 최초에 프랑스어로 쓰여졌다는 사실은 철학사에서 꽤나 특기되는 사건인 걸로 아는데, <리바이어던>이 라틴어 판 전에 영어판이 먼저 출간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일반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 같지는 않다) 나중에 로크와의 비교에도 중요한 주제겠지만 인간 생리학을 자신의 한 영역으로 간주한다는 것도 체크 포인트. 특히 홉스에게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서 주권자sovereign의 법인격의 창설이 갖는 정당성까지 흔들릴 수 있는 문제가 된다.


마지막으로 '경험'과의 관계. 베이컨 경의 <신기관>_Novum Organum_이 1620년에 출간되었음을 감안한다면 한 세대쯤 뒤의 데카르트와 홉스에게서 (이들보다 또 한 세대가 뒤인 로크와 스피노자는 1632년에 태어났다) 베이컨 경 혹은 그가 대변하는 사조의 영향이 어떻게 깔려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내가 아직 베이컨의 책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여기에 유의미한 진술을 덧붙일 수는 없겠으나 한편으로 감각적인 경험에 대한 의혹을 계속해서 제기하면서도 (특히나 기존의 학설과 무관한 실증적인) 경험의 가치를 인정하는 두 사람의 양가적인 면모를 언급할 수는 있겠다. 데카르트야 <서설>에서 직접적으로 세상을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언급하니까--만약 내게 신입생 대상 수업에서 커리큘럼을 짤 기회가 주어진다면, <서설>의 일부를 발췌해서 읽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그것이 자명하지만, 홉스에게는 좀 더 미묘한 태도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부분은 베이컨을 읽고 따로 의문을 제기해볼만 한 부분이다. 이후의 사상가들도 그렇지만, 17세기의 텍스트들을 실제로 읽는 경험은 우리에게 알려진 통념적인 이해가 얼마나 협소하고 무익한 것인지를 매우 강하게 깨닫게 한다.


+ 데카르트 또한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을 이야기한다는 사실(<규칙들>). 물론 함의는 이후의 철학자들과 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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