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밀리아노와 포콕' 연구를 위한 노트

Intellectual History 2025. 6. 23. 22:27

올해 하반기에 마주할 많은, 정말 많은 일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포콕-모밀리아노 논문이다. 어차피 한국은 물론 영어권에도 이 주제로 글을 쓸 사람은 당분간 없어보이기 때문에--현재 History of European Ideas에 포콕 특집호 글들이 미리보기로 꽤 올라와있는데 아직까지 이 주제를 건드린 학자는 없다--간단한 타임라인만 언급해두자.

 

1.

 

1957년 J. G. A. 포콕은 박사논문을 확장한 『고대헌정과 봉건법』(The Ancient Constitution and the Feudal Law)을 출간한다. "17세기 잉글랜드 역사사상 연구"(A Study of English Historical Thought in the Seventeenth Century)라는 부제에서 암시하듯 이 연구는 일차적으로 역사서술, 포콕 본인이 서두에서 명시한 바에 따르면 '근대 역사서술'(modern historiography)의 역사를 탐구한 작업이자, 동시에 그러한 역사서술이 어떻게 하나의 정치사상적 실천으로 활용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탐구였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사 전공을 포함해 사학사적 성찰에 관심있는 연구자는 진지하게 두 번 정도 뜯어가면서 정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학사의 관점에서는 『마키아벨리언 모멘트』보다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더 많다.) 책에서 포콕은 아르날도 모밀리아노Arnaldo Momigliano의 기념비적인 1950년 논문 「고대사와 고문헌연구자」(Ancient History and the Antiquarian)을 각주에 넣고 좋은 평가를 내리지만--그리고 책의 헨리 스펠만 경 대목은 확실히 모밀리아노의 도식에 딱 들어맞는 편이지만--그 이상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1960-70년대에, 적어도 출간된 원고를 바탕으로 할 때, 포콕이 에너지를 집중한 분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특히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과 구조』와 같은 작업에 영향을 받아 수행한 역사와 정치 언어의 관계를 탐구하는 방법에 대한 고도의 이론화 작업이다(그 결과물은 두 편의 논문집에 나뉘어 실려 있다: 1971년의 『정치, 언어, 시간』[Politics, Language and Time], 그리고 2009년의 『정치사상과 역사』[Political Thought and History]). 다른 하나는 포콕의 이력에서 가장 잘 알려진 부분, 즉 '역사 서술'을 의식한 근대 초 정치사상사의 연구다. 이미 『고대헌정과 봉건법』의 제임스 해링턴 챕터에서 포콕은 자신이 순전한 역사가들이 아닌 역사이론가의 저작에도 깊은 흥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물론 책 전체에서 해링턴 챕터의 위치는 매우 의미심장한데, 이것만 풀어내는 일도 꽤 시간을 잡아먹으니 지나가자). 이후 포콕의 주된 관심사는 해링턴에 대한 관심사를 확장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니콜로 마키아벨리에서 해링턴을 경유하여 18세기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로, 나아가 미국 혁명으로 이어지는 시민적 인문주의 정치 언어 전통을 재구성하는 거대한 작업으로 향하며, 그 얼개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예로 『정치, 언어, 시간』의 네 번째 논문("Machiavelli, Harrington and English Political Ideologies in the Eighteenth Century", 1965년 최초 출간)을 들 수 있다.

 

후자의 관심사는 1970년대에 두 가지 거대한 작업으로 귀결된다. 하나는 당연히 1975년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고,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다른 하나는 1977년 150쪽이 넘는 서문을 붙여 출간한, 전체 분량이 900쪽에 육박하는 편집본 『제임스 해링턴 정치저작집』(The Political Works of James Harrington)이다. 제목과 달리 마키아벨리와 피렌체 공화주의는 '발사대'로서의 역할에 가까운 『마키아벨리언 모멘트』는 영어권 역사학계에 두 가지 거대한 논쟁점을 제기했다. 한국의 공화주의 연구자들에게 조금 더 익숙한 주제는 (특히 미국혁명 해석을 둘러싸고 많은 찬반을 불러온) 18세기 정치사상에서 공화주의 대 자유주의의 위치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였다--오늘날 돌아보면, 특히 헬레나 로젠블랫의 연구가 나온 시점에서, 적어도 지성사/사상사학계에서는 '18세기에 [로크적] 자유주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포콕의 입장이 판정승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하나는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3부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한 주장, 즉 18세기 사상사는 부르주아 자본주의가 아닌 '상업사회'라는 개념을 통해 더욱 설득력 있게 이해할 수 있으며, 갓 도래한 상업사회를 다루는 당대의 언어적 패러다임은 다름 아닌 공화주의 전통에 뿌리를 둔다는 해석이었다.

 

당시 케임브리지학파 안팎의 연구자들에게 더 중요한 주제는 두 번째 것이었다. 그 맥락을 붙잡기 위해서는 우선 케임브리지 역사학과에 재직하고 있던, 포콕보다 두 살 위였던 또 다른 천재 던컨 포브스Duncan Forbes의 작업을 알아야 한다. 포브스는 1950년대부터 영국 근대 정치사상의 진정한 출발점은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를 필두로 하는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사상에 있다는 테제를 제시했다. 이는 포콕을 물론 존 던, 도널드 윈치, 이슈트반 혼트를 비롯해 케임브리지 역사학과와 연을 맺고 있던 지성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발휘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 연구센터를 중심으로 진행된 "정치경제와 사회, 1750-1850"(Political Economy and Society, 1750-1850) 프로젝트의 밑바탕이 되었다--헝가리에서 영국으로 갓 망명했던 이슈트반 혼트는 이 프로젝트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다만 『흄의 철학적 정치』(1975)로 집약된 포브스의 작업은 정작 스코틀랜드 계몽사상의 핵심 중 하나인 정치경제학적 논의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3부의 상업사회론은 바로 이 공백을 채우는 퍼즐이 될 수 있었다. (이후 이 문제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간 대표적인 지성사가인 혼트는 자신의 선행자로 포브스와 포콕을 꼽았다.)

 

포콕 역시 자신이 어떤 지점에 서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985년 출간된 논문집 『미덕, 상업, 역사』(Virtue, Commerce, and History)은 여러 중요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18세기의 사상가들의 상업사회/정치경제 담론을 풀어내는 모델들 및 실제 사례를 분석하는 연구를 제시하려는 노력이다. 8장의 에드워드 기번 논문에서 볼 수 있듯 포콕은 이제 공화주의 정치사상이라는 패러다임이 18세기 상업사회 및 재정-군사국가라는 현실과 조우하여 붕괴 혹은 경색상태에 빠졌다는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3부의 인식을 수정, 스코틀랜드 계몽사상으로부터 상업과 정치경제의 문제를 포괄하는 고도의 문명사적 분석이론이 구축되었다는 테제로 나아갔다. 이 논문집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는 글이자 포콕이 프랑스혁명기 이후로 본격적으로 들어간 진실로 드문 사례인 「배척에서 개혁까지 휘그 사상의 다양성: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역사」(The varieties of Whiggism from Exclusion to Reform: A history of Ideology and Discourse)에서 볼 수 있듯, 포콕은 이러한 도식을 휘그주의에 대한--자신의 첫 저작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오랜 관심을 덧붙여 20세기 사상사로까지 뻗어나갈 구상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웅대한 관심사는 이후 포콕의 지적 이력에서 더는 핵심부에 들어오지 못했다.

 

 

[*해당 프로젝트의 첫 결과물은 혼트와 마이클 이그나티에프가 공편한 『부와 덕: 스코틀랜드 계몽에서 정치경제학의 형성』(Wealth and Virtue: The Shaping of Political Economy, 1983)으로 출간되었다. 혼트는 프로젝트의 두 번째 결과물로 『애덤 스미스 이후』(After Adam Smith)라는 제목의 논문집을 기획했고, 실제로 해당 논문집에 수록될 모든 원고를 모았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아마도 그의 극심한 완벽주의 때문에--책을 출간하지 않았다. 포브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19세기 영국 정치사상을 탐구한 또 다른 저작으로는 스테판 콜리니, 도널드 윈치, 존 버로우가 공저한 『정치학이라는 고결한 과학: 19세기 지성사의 한 연구』(That Noble Science of Politics: A Study in Nineteenth-century Intellectual History, 1984)를 참조. 포브스와 스코틀랜드 계몽 연구의 맥락은 다음을 참조: 이우창, 「문인의 글쓰기와 지성사적 전기: 제임스 해리스, 《데이비드 흄: 지성사적 전기》(2015)」, 『전기, 삶에서 글로』 [『교차』 3호] (2022년 10월): 143-69.]

 

 

2.

 

『미덕, 상업, 역사』 이후 포콕의 이력에서 가장 주요한 관심사 세 가지를 꼽는다면 다음을 떠올릴 수 있다. 첫째, '잉글랜드 계몽'이라는 범주의 정립을 포함한 계몽사상의 연구다(상세한 맥락은 나의 2022년 논문 「영어권 계몽주의 연구의 역사와 “잉글랜드 계몽주의”의 발견」을 참조). 둘째, 1990년대 영국의 유럽연합 가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주권과 역사서술의 관계를 성찰한 일련의 저작으로, 이중 일부는 포콕의 또 다른 저작집 『섬들의 발견』 (The Discovery of Islands, 2005)에 수록되었다. 이 두 주제만 해도 어지간한 역사학자 평생의 경력에 맞먹는 성과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포콕이 역사가로서 계속해서 활동한 이후의 30여 년간 그가 필생의 과제로 여겼던 주제는 기번의 역사서술이다. 지성사 연구 최대의 걸작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야만과 종교』 연작(전6권, 1999-2015)이 그 결실이다. 그는 어떻게 이 주제로 들어서게 되었을까?

 

『미덕, 상업, 역사』의 출간 9년 전인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왜 1976년일까? 이때는 바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첫 권이 출간된지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이후 기번 연구가 성장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두 번의 학술대회가 진행된다. 먼저 로마에서 1976년 1월 6월부터 10일까지 한 차례 학술대회가 열렸고, 다음 스위스 로잔대학교에서 6월 9일부터 12일까지 또 다른 학술대회가 열렸다--그 결과물은 이듬해 각각 「에드워드 기번과 로마제국의 쇠망」(Edward Gibbon and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근대 역사서술의 관점에서 바라본 기번과 로마」(Gibbon et Rome. A la Lumière de l'Historiographie Moderne)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 두 행사는 지금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거물 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우리는 이중 로마 컨퍼런스 참석자 목록에서 50대 접어든 포콕의 이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포콕이 발표한 글의 제목은 "마키아벨리와 흄 사이: 시민적 인민주의자이자 철학적 역사가로서의 기번"(Between Machiavelli and Hume: Gibbon as Civic Humanist and Philosophical Historian)이었다. 포콕은 이듬해 이를 수정보충한 논문 「기번의 『쇠망사』와 후기 계몽의 세계관」(Gibbon’s Decline and Fall and the world view of the Late Enlightenment, 1977)을 출판하고, 이후 앞서 언급한 논문집 『미덕, 상업, 역사』에 8번째 논문으로 수록한다. 처음의 제목에서 알아차릴 수 있듯, 포콕은 본래 기번을 자신의 공화주의-상업사회-스코틀랜드 계몽 도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생각했다. 그가 기번의 『쇠망사』에 이끌렸음은 분명했으니, 「기번의 『쇠망사』와 후기 계몽의 세계관」의 첫 각주에서부터 포콕은 자신이 『야만과 종교: 기번 『쇠망사』에서의 세속사』(Barbarism and Religion: Civil History in Gibbon’s Decline and Fall)라는 제목의 연구서를 쓸 계획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로마 학회 이후 3년 뒤, 포콕은 이탈리아 피사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기번과 목자들: 『쇠망사』의 사회 단계들」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Gibbon and the Shepherds: The Stages of Society in the Decline and Fall, 1981년 History of European Ideas에 게재). 주제 자체는 직전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기번을 스미스와 존 밀러 등 스코틀랜드 계몽 문명단계론의 맥락에 위치시키는 것이었으나, 논문의 첫 문단은 그의 지적 여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서들을 간직하고 있다. 두 번째 문장에서 포콕은 아르날도 모밀리아노의 중요한 시론 「역사학 방법에 기번이 남긴 기여」 (“Gibbon’s Contribution to Historical Method”; 1954년 최초 출판, 포콕은 1955년의 모밀리아노 논문 선집에 수록된 글을 인용)를 언급한다. 모밀리아노의 설명을 숙지하고 있는 독자가 포콕의 첫 문단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는다면, 그가 전자가 구축한 사학사적 도식의 골자를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좀 더 정교화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1980-90년대 포콕이 무엇을 어디까지 읽고 고민했는지는 그가 남긴 서신과 원고들이 공개되기 전에 구체적으로 알 수 없겠지만, 출간된 문헌만을 근거로 삼을 때 나는 확신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포콕은 1990년대부터 『야만과 종교』 연작에 이르기까지 기번을 중심으로 한 17-18세기 사학사 혹은 역사서술의 역사를 본격적인 탐구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때 그의 가장 중요한 안내자가 된 것은 다름아닌 모밀리아노의 작업이었다. 조금 압축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대 헌정과 봉건법』 출간 이래 20년이 지난 후 포콕은 기번을 통해 모밀리아노를 다시 만났고, 이 만남을 통해 다시금 정치사상사에서 역사서술의 역사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이다.

 

구체적으로 포콕이 모밀리아노로부터 무엇을 보았으며, 포콕이 이를 『야만과 종교』의 서술에서 어떤 식으로 활용 혹은 변용했는지를 풀어내는 게 내 다음 프로젝트의 질문이다.

 

(포콕보다 16년 먼저 태어난 모밀리아노 본인은 1987년에 작고했으며, 1980년 발표한 기번에 관한 에세이에서 포콕의 기번 논문을 흥미롭게 언급하긴 하지만 그가 포콕의 전체 구상을 알았다는 근거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3.

 

놀랍게도 이 포스팅을 쓰게 된 원래 목적은 모밀리아노에 관해 뭐라도 쓰는 거였다(...).

 

1908년 이탈리아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모밀리아노는 토리노 및 로마대학에서 가에타노 데 상티스에게 수학,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가로 훈련받았다. 30세에 토리노대학 로마사 교수로 취임했으나 파시즘과 반유대주의가 득세하는 시기였기에 그는 곧 영국 옥스포드로 망명길에 올랐다(같이 망명하지 못한 부모는 결국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는 가장 1951년부터 1975년까지 고대사 교수로 재직한 런던대를 비롯, 이탈리아와 영국, 미국 등지의 여러 대학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원래 이탈리아와 독일의 고전학·역사학 전통을 깊이 파고 있던 모밀리아노는 망명 시기에 옥스퍼드·바르부르크 연구소 등지에서 다른 망명 학자들 및 영국의 학자들과 교류했고, 자신의 넓은 관심사를 한층 더 확장할 수 있었다. 그는 오늘날에는 더는 찾기 힘들어진 유형, 이른바 ‘대가들의 대가’로 인정받았다(그의 지도를 받은 학생 중에 피터 브라운과 앤서니 그래프턴이 있다는 것만 이야기해 두자).

 

가끔 독일어로 쓴 글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주로 이탈리아어와 영어로 썼다. 단행본이 일부 있긴 하지만 그의 출판물은 대체로 논문·시론·서평 등이었으며, 주요 저작은 자신이 출간한 논문선 시리즈 『고대 세계 및 고전학의 역사에 관한 저작』 (Contributo alla storia degli studi classici e del mondo antico, 전10권 14책, 1955-2010)에 재수록되었다(대략의 감으로 영어 출판물의 비중은 30% 내외인듯 싶다). 그 외에 영어로 된 저작선집을 따로 몇 권 냈음을―수록된 글 일부는 원래 이탈리아어로 집필된 글을 영역한 것이다―고려하면 모밀리아노가 영어권 독자층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은 분명하다.

 

자신의 본령인 고대사 연구를 제외하고 모밀리아노가 깊은 애정을 지속한 주제는 바로 고전학 및 역사학·역사서술의 역사와 같은 학문의 역사였다. 19세기 이래 유럽 인문학의 정점에 있던 독일 고전학 연구 전통을 꿰고 있으면서도 이탈리아인으로서 또 망명자로서 ‘외부의 시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는 고대·고전 연구 자체를 역사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고대 그리스로부터 (혹은 그 이전의 페르시아부터) 20세기 베버와 뒤르켐의 사회학으로까지 이어지는 장구하면서도 섬세한 학술사의 도식을 구축했다. 나와 같은 연구자에게 다행인 것은 사후 출간된 강연록 『근대 역사서술의 고전적 토대』 (The Classical Foundations of Modern Historiography, 1990)를 비롯, 그의 사학사적 저작 중 상당수가 영어로 출간되어 그의 문제의식과 도식을 어렵지 않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

 

모밀리아노의 사학사적 연구를 평가하는 논자들은 종종 ‘사실’(facts)에 대한 그의 집념에 주목한다. 학자들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사실들을 비틀어 대던 파시즘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 사실이라는 주제에 천착했음은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모밀리아노의 유산을 이해하기 위해 좀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사실들을 생산하는 방법과 테크닉, 구체적으로 ‘학자·역사가가 무슨 자료를 어떤 방법과 기술에 기초하여 해석하고, 그로부터 어떠한 사실들을 도출해냈는가’의 과정 일반에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는 데 있다. 간단히 말해 그는 단순히 포스트모던적 역사학이 등장하기 한참 전에 역사적 사실들은 학자들에 의해 생산된다는 (진부한) 사실만이 아니라, 그 사실이 생산되는 프로세스 자체를 주목해야 한다는 (오늘날에도 힘이 있는) 것을 알고 가르쳤다.

 

모밀리아노의 가르침이 오랫동안 생생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쓰기’의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 역사서술의 고전적 토대』의 각 장에서 서로 다른 역사서술의 전통을 소개하듯이, 아니면 『그리스 전기의 발전』 (The Development of Greek Biography, 초판 1971, 증보판 1993)의 서론에서 고전적 역사 장르와 전기 장르의 복잡한 관계를 훑어내리는 대목에서처럼 모밀리아노는 역사학·역사서술이 단일한 장르로 존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드러냈다. 그가 이후 17-19세기 사학사 연구에 남겨놓은 가장 큰 유산 중 하나가 고문헌연구·호고학(antiquarianism) 및 박식(erudition) 전통의 중요성을 부각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요점은 단지 근대 초 역사서술에 그러한 양식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애초에 역사 장르 자체가 그러한 서술 양식들의 결합을 통해 성립하며, 그 결합의 양상에 따라 다양한 역사 장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예컨대 모밀리아노는 가장 정통적인 역사 장르인 정치사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고문헌연구의 요소를 흡수하면서 고대의 그것과 다른 면모를 띠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모밀리아노에게 기번이 중요했던 이유 역시 후자가 요한 빙켈만과 함께 18세기에 고전적인 서사, 박식, 새로운 철학의 세 양식을 성공적으로 종합한 극히 드문 사례였기 때문이었다.)

 

역사적 사실의 생산 과정에 대한 의식, 그리고 다양한 역사적 글쓰기가 존재하며 또한 이들을 구성하는 역사서술 양식에 주목해야 한다는 인식은 오늘날 영어권 학계에서 특히 근대 초 학술사 분야를 중심으로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18-19세기 이후의 근대 사학사를 재구성하려는 많은 연구 역시 모밀리아노의 통찰을 출발점으로 설정한다. 그 영향권에는 피터 N. 밀러 및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지성사가들도 포함된다―『야만과 종교』의 ‘후기 포콕’ 역시 모밀리아노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하나의 독특한 사례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사실은 모밀리아노의 작업 및 그가 유럽 사학사 연구에 끼친 파급력이 한국 학계에서는 전혀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 한국사를 포함해 한국의 역사학 학술장에서는 ‘역사학 또한 역사적인 성찰·탐구의 대상’이라는 의식이 매우 희박하며, 다른 한편으로 랑케 대 E. H. 카, 혹은 실증주의·거대서사 대 포스트모던 역사학 따위의 낡고 무용한 역사철학·역사이론적 도식이 ‘역사학의 역사’의 전부인양 통용되고 있다. 물론 고전어부터 근대 유럽어까지 다양한 언어권의 자료를 넘나드는 인물의 저작을 옮기기란 늘 어려운 일이지만, 「고대사와 고문헌연구자」, 그리고 『근대 역사서술의 고전적 토대』 등에서 출발하여 모밀리아노의 작업이 상세하고 섬세한 해제와 함께 조속히 한국어로 소개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5.

 

이번 연구 프로젝트에서 스스로에게 부여한 또 다른 과제는 모밀리아노의 지적인 시야를 영어 출판물에 국한해서나마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일단 그 출발점으로 『고대 세계 및 고전학의 역사에 관한 저작』에 수록된 영어 문헌 목록을 틈틈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고대사 자체에 대한 연구나 근대 초 역사서술 연구 외에 19-20세기 독일 고전학·역사학 학술장에 관해 남긴 진지한 에세이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무엇을 보고 돌아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여정이 즐거우리라는 기대만큼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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