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앨런, <세계경제사> 읽기: 역사와 국가전략

Reading 2018. 2. 28. 05:09
로버트 C. 앨런, <세계경제사>, 이강국 역, 교유서가, 2017(원저는 Robert C. Allen, _Global Economic History: A Very Short Introduction_, Oxford: Oxford UP, 2011)를 읽었다.

1.

먼저 이 책이 현재 교유서가에서 "첫단추 시리즈"로 그 일부를 국역출간하고 있는 옥스퍼드 출판부의 '초간단 입문'(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의 일부라는 사실부터 언급하고 싶다. 영어권 학술장의 생태계를 먼 발치에서나마 지켜본 사람이라면, 케임브리지·옥스퍼드 대학 출판부가 최신의 연구성과 및 동향을 비전공자, 혹은 이제 막 학술장에 진입하려는 초보 연구자들이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는 데 커다란 노력을 기울여 왔음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나는 그러한 시도가 특유의 개방성과 함께 20세기 후반 영어권 학술장을 세계학술장의 중심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고 생각한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가 케임브리지 컴패니언(Cambridge Companion) 시리즈로 널리 알려졌다면,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는 다소 결이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이를 수행하고 있다. 케임브리지 컴패니언 시리즈에 대응하듯 등장한 옥스퍼드 핸드북(Oxford Handbook) 시리즈는 그 경쟁자보다 더 많은 수의 연구자들을 동원하여 물질적인 차원에서부터 압도적인 인상을 자랑하는 전문화된 스칼라십의 정수를 구축했다. 반면 앨런의 책이 속해있는 '초간단 입문' 시리즈는 권위있는 필자를 한 명 선정,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은 물론 대중독자들까지도 부담없이 진입할 수 있도록 '쉬우면서도 깊은' 안내서를 만든다는 마치 꿈과 같은 목표를 실현하는 보기 드문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 핸드북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발간된 것은 2000년대 말-2010년대부터고, 초간단 입문 시리즈 또한 과거에 다른 형태로 발간된 저술들을 묶어 내다가 처음부터 이 기획을 위해 집필된 책들을 출간하면서 퀄리티가 확 올라가는 시점이 2010년 언저리로 추측되는데--내가 본 것들에 한정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이 시기 전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내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옥스퍼드 초간단 입문 시리즈의 이와 같은 성격을 이해한다면, 내가 먼저 스스로의 비전문성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우연적인 계기로 접했던 몇몇 저술들을 제외하면 경제학·경제사에 전적으로 문외한이며, <세계경제사>의 서술 안팎을 교차하는 학문적 논쟁의 맥락을 충분히 음미할 능력이 없다(그쪽으로 보다 유용한 리뷰로는 https://blog.naver.com/jinforest/220596576633 및 [나 자신이 이 책을 읽어보게 된 계기를 제공한 https://www.facebook.com/notes/duol-kim/542319259436726/?notif_id=1514089607821237 등을 참고하라). 김두얼 선생의 서평 마지막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고도로 농축된 학적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의를 이해할 수 있는 시선, 혹은 그런 시선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충분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독자가 책에 나름의 관심을 느끼도록 하는 걸 가로막지는 않는다--적어도 앨런의 이 책은 그러하다. 따라서 나는 내게 흥미롭게 다가온 부분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 노트를 쓰겠다.


2.

먼저 앨런은 이 책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후기(epilogue)를 포함한 총 10개의 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재구성될 수 있다.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하는 1장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는 산업혁명을 경제성장의 중심범주로 설정한 뒤 왜, 어떻게 "어떤 나라[countries]는 부자이고 다른 나라는 가난한가"(8)라는 질문으로 전체 논의를 시작한다. 이어지는 내용이 보여주듯, <세계경제사> 전체의 서술은 이 커다란 질문을 세 가지 보다 작은 질문들로 다시 나눈다. ①산업혁명과 경제성장에 앞서 도달한 국가들--18-19세기 영국 및 19세기 서유럽·미국--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②인도·(19세기) 중국·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 등은 왜 경제성장에 실패했는가? ③20세기 러시아·일본·중국 등 일부 후발주자들은 어떻게 경제성장에 성공했는가? <세계경제사>의 2-4장 및 6장의 (북아메리카를 다루는) 일부는 첫 번째 물음에, 5장부터 8장까지는 두 번째 물음에, 8-9장은 세 번째 물음에 대한 답변을 시도한다.

무척이나 풍성한 세부논의들을 극히 제한된 분량 내에서 풀어내는 옥스퍼드 초간단 입문 시리즈 특유의 경이로운 압축적 서술을 일일이 조명하는 것은 내 능력으로 가능한 작업이 아니다. 대신 서술의 핵심에 놓인 전제 두 가지는 짚을 수 있다. 첫째, 경제성장의 핵심적인 원동력은 국제무역에서의 가격경쟁력 확보로 규정된다. 고임금, 고임금으로 인한 기술발전과 같은 사항들은 궁극적으로 가격경쟁력을 구성하기 때문에 조명된다. 둘째, 국가가 경제성장과 (장기적인) 가격경쟁력 확보를 실현하기 위해서 채택할 수 있는 "표준모델"(the standard model)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 전제를 중심으로 <세계경제사>의 핵심논의를 재구성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적어도 앨런에게 있어 경제사의 요체는 곧 국가가 경제성장을 위해 특정한 정책, 혹은 내가 선호하는 말로 풀어보자면 전략을 설정하고 수행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개념어를 중심으로 압축하여 다시 써본다면, 논의의 근본적인 쟁점은 '국가'라는 행위자의 '전략'과 그 결과를 이해하는 것이다.


3.

표준모델, 혹은 국가와 전략이라는 항목에 초점을 둘 때 이 책에서 좀 더 많은 무게가 실리는 대목은 3-4장(과 6장 일부) 및 8-9장이다. 전자는 영국 및 서유럽을 중심으로 표준모델, 즉 "역내 관세를 철폐하고 교통을 개선하여 전국 시장을 대규모로 창출하는 것, 영국[과 같은 선발국가들]과의 경쟁으로부터 '유치산업'(infant industries)을 보호하기 위해 역외 관세를 도입하는 것, 통화를 안정시키고 기업에 자본을 제공하는 은행을 설립하는 것, 마지막으로 기술 도입과 발명을 촉진하기 위해 대중 교육을 확립하는 것"으로 구성된 발전전략 패키지가 도출되고 또 이것이 19세기 서유럽과 미국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 과정을 보여준다(68). 그러나 8장 "표준모델과 후기산업화"(The standard model and late industrialization)는 제정 러시아·양차대전기까지의 일본·19-20세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같은 실패사례들을 통해 표준모델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언제나 성공적이지는 않았음을 지적한다: "선진국의 일인당 GDP가 연간 약 2퍼센트씩 성장했기 때문에 후진국들은 그 격차를 유지하려면 최소한 그만큼 성장해야 했고, 단기간에 그들을 따라잡으려면 훨씬 더 빨리 성장해야 했다. 차르의 러시아, 일본, 라틴아메리카는 표준 모델에 기초해서는 이를 달성할 수 없었다. 그 결과로 노동 수요의 증가가 인구 증가에 비해 더디게 나타났다. [...] 선진국에서 효율적인 생산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자본-노동 비율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1980년대 초의 금융위기가 없었더라도 표준 모델은 한계에 직면했다"(206).

이제 국제무역시장의 경쟁구도에서 과거에 유용했던 전략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성공적인 결과를 달성하기 어려워졌다. 달리 말하자면 먼저 발전한 국가들의 존재 자체가 전체 시장의 조건 또는 그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요소가 되었으며, 그에 따라 변화된 조건에 부합하는 새로운 전략모델이 필요해진 것이다. 9장 "빅푸시 산업화"(Big Push industrialization)에서 앨런은 현대의 역사에서 비록 적은 사례일지언정 새로운 전략모델을 찾고 그에 따라 단기간에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실현한 국가들이 있음을 조명한다; "규모가 큰 [후발]국가들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유일한 방법은 선진국 경제의 모든 요소--제철소, 발전소, 자동차 공장, 도시 등--를 한꺼번에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빅 푸시(Big Push) 산업화이다. 이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부른다. 수요와 공급이 있기 전에 모든 것을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공장이 철판을 사용하기 전에 제철소가 건설되어야 한다. 또 작업할 철강이 사용 가능하기 전에, 그리고 제품에 대한 유효수요가 있기 전에 자동차 공장이 건설되어야 한다. 모든 투자는 보완적인 투자들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이 성공하려면 계획기구가 경제 활동들을 조정하고 그 활동들이 반드시 실행된다고 보장해야 한다"(209); "대중 교육은 교육의 격차를 줄였고, 이런저런 형태로 국가가 주도한 산업화는 자본과 생산성의 격차를 줄였다. 대규모 자본집약적인 기술이 비용 면에서 즉각 효율적이지 않은 경우에도 도입되었다. 이 국가들은 라틴아메리카가 현대적 기술을 소규모 경제에 억지로 도입하려고 했을 때 발생한 비효율성을 피했다. 효율적인 설비의 산출을 흡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규모가 컸거나, 미국의 생산을 희생시켜 미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31). 20세기 중후반 소련·일본·중국을 간략하게 검토하면서 앨런은 빅 푸시 산업화를 성공시킨 국가들이 서구의 선진국과 동일하지 않은 자신들의 고유한 조건을 이해하고 그를 활용하는 종합적인 경제발전계획을 수립·실천할 수 있었다는 걸 강조한다. 충분히 효과적인 전략이 있다면, 선발주자가 존재하는 경쟁시장에서도 국가가 의도한 결과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4.

<세계경제사> 1장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경제사는 사회과학의 여왕이다"(8, 원문은 Economic history is the queen of the social sciences). 나는 이 문장에서 두 가지 함의를 이끌어내고 싶다. 첫째, 지금까지 책 전체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확인할 수 있듯, 앨런의 경제사의 핵심은 국가의 경제발전, 혹은 나의 학적 관심사를 더 투사한다면 (경제적 영역에서의) 국가통치전략을 탐색하고 수립하는 것이다. 학문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 주제는 17-18세기 정치산술(political arithmetic)·정치경제학의 탄생 이래 근대학문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아왔으며 여전히 근대학문의 토대를 구성하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도 미셸 푸코가 열어젖힌 통치성의 역사는 이 시기를 거치며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사회를 다스리고 양육하고 발전시킨다는 관념 및 그러한 통치행위가 가능하도록 경제·사회의 중요한 요소들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상황에 따라 더 나은 대응방식을 탐색하는 도구로서의 '과학'이 형성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세계경제사>는 경제사가 바로 그러한 전통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학문 중 하나임을 명확히 선언한다(가령 이언 해킹의 <우연을 길들이다>[_The Taming of Chance_, 1990]를 읽은 독자라면 통치를 위해 사회의 제반 경제적 요소들을 측정가능한 수치로 추출하려는 때로 경이로울 정도의 시도들이 갖는 의미를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국가와 사회의 통치에 대한 요구로부터 사회과학이 탄생했다면, 그 소명에 그 어떤 학문영역보다 직접적으로 부응한다는 점에서 경제사는 사회과학의 여왕이다.

둘째, 나는 앞서 인용한 문장이 (비록 한국어판의 "경제사"라는 번역어가 이 사실을 다소 희미하게 만들지만) "역사"(history)와 "과학"(sciences)의 긴장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바로 다다음 문장에서 저자가 이 두 단어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국부의 요인을 경제학자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경제 발전 이론들에서 찾지만, 경제사가들은 역사적 변화의 동적인 과정에서 찾는다"(8쪽, 원문은 Economists seek the ‘causes’ in a timeless theory of economic development, while economic historians find them in a dynamic process of historical change).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는 특수한 시공간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보편적으로 작용하는(timeless) 인과관계의 법칙을 탐색하는 것이다. 역사가는, 적어도 과학적 법칙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은 인간사회의 역사가는, 특수한 역사적 시공간의 관여를 초월하는 보편법칙의 존재에 회의적이며 대상의 특수하고 개별적인 요소들을 충분히 이해할 때만 비로소 대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과 역사의 갈등을 염두에 둔다면 앨런의 첫 문장은 단지 스스로의 학문에 대한 자화자찬이 아니라 학문의 성격과 본질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드러내는 매우 강력한 진술이기도 하다(이뿐만 아니라 1장은 책을 끝까지 읽은 뒤 한번 더 곱씹어볼만한 함의가 많다--뛰어난 서문은 본론을 읽기 전에 한번, 본론을 읽은 뒤에 한번 이렇게 두 번 읽혀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두 가지 함의, 요컨대 올바른 국가전략을 탐색한다는 직분과 과학에 대한 역사의 우위가 결코 마음 편하게 양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특정한 사례들로부터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인과관계·법칙을 도출할 수 없다면, 한 사례의 교훈으로부터 다른 사례에 적용가능한 전략을 끌어내는 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근대의 사회과학이 끊임없이 자연과학에 동경의 눈길을 보내며 스스로를 '과학화'하고자 했던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주어진 직분을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통치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개별 사례들로부터 보편적인 인과관계를 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러한 시도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믿음의 필요성이 믿음의 타당성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라고. 전략의 수립은 분명 일반적인 지침을 전제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뒤이어 바로 그 일반적인 지침조차도 특정한 조건의 산물이며, 같은 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듯 그 조건이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음을 지적한다.

앨런의 책은 정확히 그러한 교훈에 입각하고 있다. 성공적인 사례로부터 유용한 '일반'지침을 도출할 수는 있다. 그러나 표준모델의 한계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 '일반' 지침은 보편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전략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성공과 실패의 사례들을 최대한 세심하게 분석하고 그로부터 잠정적인 효능만을 갖는 전략적 가설을 도출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전략적 가설이 역사적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앨런은 빅 푸시 산업화의 성공사례들을 조명한 뒤 본문의 마지막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이 [성공적인 후발]국가들이 추진했던 많은 정책 중 무엇이 가장 효과적이었는지는 엄청나게 많은 논쟁의 주제로 남아 있다. 또 그 성공적인 정책들이 다른 국가에 이식될 수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므로 경제 발전을 가져오는 최선의 정책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232). 이것이 자신들이 "시간을 초월하는"(timeless) 경제발전의 법칙·전략을 과학적으로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 과학자들에 대한 역사가 다운 비판의 표명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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