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연. 『탕아를 위한 비평』. 2012. [130511]

Reading 2014. 3. 18. 11:50

*2013년 5월 11일 페이스북에 쓴 글.


수년 전 같은 저자의 <비루한 것의 카니발>을 잠깐 스쳐 읽긴 했지만 나는 아직까지 한국인 비평가들과 거의 닿아있지 않다(심지어 백낙청이나 김우창의 책도 읽은 적이 없다!). 신형철에 이어 한국인 비평가의 평론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건 이번이 겨우 두 번째다. 이 노트에서 발견될 비상식적인 면모는 그러한 무지에 기인할 수도 있다.

 

 

<탕아를 위한 비평>에 실린 글들은 사실상 동일한 문제의식 혹은 개념틀 안에서 집필된 듯 보인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근대한국문학'이다(근대가 한국에 선행한다). 이 개념은, 개념에 맞닥트리면 일단 질문을 제기하는 습관이 있는 독자들에겐 자연스럽겠지만, 다시 또 세 가지 개념들로 나뉜다; 근대-한국-문학. 이것들은 마치 칸트의 지성understanding-감성-이성과 같이 서로 구별되지만 긴밀히 결합되어 하나의 총체적인 문제의식으로서 '근대한국문학'을 형성한다. 그러나 황종연의 역사이론적 성격을 강하게 띤 개념결합체는 칸트의 인식형식으로서의 그것에 비해 보다 불완전하고 상호충돌하는 면모를 지닌다. 분할된 각각의 개념들을 다시 질문해보자.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수록된 평론들 중 한 편의 제목은 아예 "문제는 역시 근대다"이다)근대는 단면이라기보다는 선적인(linear; 직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념이다. 이때 시간축으로서의 근대는 객관적인 시간규정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성격--예컨대 마셜 버만Marshall Berman의 '유동성'과 같은--을 공유하는 관념적 구성물로서의 '시기'로 이해되어야 한다. 세 가지 시점이 근대라는 개념 안에서 연결되어 공존한다. IV부의 이광수, 김동인과 같은 근대국문학의 시조를 다루거나 문학 개념의 번역 및 유포과정 등을 논하는 글들에서 나타나는 한 시대의 시작점으로서의 근대=기원, 주로 III부에서 민족문학론을 언급할 때 나타나는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까운 과거로서의 근대=진행, 마지막으로 (II부에서 주로 부각되는) 동시대, 즉 하나의 사이클이 끝나고 (강하게 말하자면)그 잔해로부터 무언가 새로운 것의 출현을 예감하게 되는 시점으로서의 근대=종언. 논의의 경제성을 위해 먼저 말한다면 근대를 이렇게 이해하는 관점은 황종연 자신이 컬럼비아에서 수업을 듣기도 했던, 그리고 이 책 전반에 걸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인식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당장 <일본근대문학의 기원>과 <근대문학의 종언>과 같이 한국비평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가라타니의 저술들을 상기하라). 즉 근대라는 시기는 국가=자본=네이션의 결합체로서의 근대국민국가들의 형성 및 그 완성close까지를 지칭하는 일종의 보편적인 설명력을 가진 이념형ideal type이다. 이어 말하겠지만 <탕아를 위한 비평>은 가라타니가 제시한 "근대문학은 이제 끝났다"는 테제에 대한 (한국에서 행해진 것들 중에서는) 몇 안 되는 성실하고 투철한 답변의 시도이기도 하다--물론 그것이 성공적인 답변인가에는 나는 회의적이다.

 

 공간으로서의 '(근대)한국'은 단순히 객체적인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이 공간의 지리적, 역사적 특수성을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다(지정학적 개념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으로부터 큰 틀을 가져오는 비교문학자 프랑코 모레띠의 문학의 세계체제론이 황종연의 주된 이론적 논거가 된다. 그가 일상적인 표현으로서의 소설과 구별되는 '노블'novel을 얘기할 때 이는 서유럽으로부터 확산된 '우세종'으로서의 노블 장르가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황종연의 시도는 한국근대의 문학을 세계적인 흐름 안에 위치시킴과 동시에 그것의 특수한 면모를 아울러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과 특수 양자를 동시에 해명하는 강점을 지닌다. '번역된 근대'translated modern는 근대화라는 세계적인 흐름을 표명함과 동시에 '번역'의 필터를 거침으로서 미국이나 서구의 그것과, 심지어 똑같이 번역과정을 거친 일본-중국과도 구별된다는 함의를 품는다.

 

 문학을 논의하기 전에, 문제는 보편적 이념형으로서의 근대와 노블의 세계체제론(황종연이 직접 이런 표현을 사용하진 않지만, 나는 일단 그의 논의를 이렇게 거칠게 표현한다)이 자연스럽게 맞물리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보다 시간적인 면모가 강조된 가라타니적 근대와 공간적인 면모가 강조되는 모레티적 근대를 융합시키는 노력이 아직 황종연의 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두 역사이론체계의 단층은 근대=기원을 논의하는 글과 근대=종언을 논의하는 글의 텍스트 읽기가 현저히 다르다는 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쉽게 말하자면, 일본과 일본이 또한 모태로 했던 서구의 문학사가 수시로 참조되고 실제로 개념의 번역-이동과정이 추적되는 보다 역사학적 연구의 성격을 띤 전자와 달리 후자에서 동시대 한국문학 텍스트들에 대한 비평에서는 보다 추상화된 형태로서의 포스트모던적 공간에 대한 묘사만이 남아있다. 곧 황종연이 자신의 비평 전반에 걸쳐 역사-사회와의 접점을 강조한다면, 후자의 경우에 문학텍스트의 모태이자 극복대상으로 등장하는 '현실'은, 제 아무리 포스트모던적 사회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인 개념들이 언급된다 한들, 그리고 그러한 개념들에 힘입은 묘사가 참되다고 한들 보다 추상화되어 있으며 한국의 특수성이 소거된 공간이다. 다시 말해 공간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게 지정학적인 면모라면, 동시대 텍스트들에 대한 황종연의 평론에는 지정학적인 면모가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약간의 무리를 무릅쓰고 황종연의 근대를 구성하는 시점들을 하나의 총체로 연결한다면, 그것은 시간축이 공간축을 삼켜가는 과정이다[여기에서 포스트모던기를 시간성보다 공간성이 우세한 시기로 파악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진술을 상기할 수 있겠다]. 결국에는 가라타니가 말한 국민국가들의 근대체제, 곧 국가=자본=네이션의 완성이 한국에서도 실현되었으며 그 순간 공간적인 특수성은 의미를 상실한다; 여기에서 멈추지 말고 황종연을 옹호하려는 입장에 서서 진술을 덧붙인다면, 지금의 한국은 문자 그대로 국가=자본=네이션의 완성태로서 하나의 전범이기도 하다; 이념형이 완성된 순간 그것은 특수한 것이 될 수 없다.

 

 황종연의 텍스트 전반에 걸쳐 가장 취약하면서도 동시에 문제의식의 측면에서 핵심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부분은 세 번째 개념인 '문학'이다. 앞서 말했듯 <탕아를 위한 비평>이 그 위에 가라타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그림자와 투쟁하는 저술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문학'의 가능성 및 그 역할을 규명하기 위한 황종연의 노력에서 비롯된다. 단적으로 말해 황종연의 난국은 가라타니적 역사 이론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 역사 이론에 필연적인 귀결로 따라붙는 문학의 종언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부터 비롯된다(황종연은 자신이 가라타니의 근대체제를 그대로 수용한다고 직접적으로 진술하지는 않지만, 그가 바라보는 동시대가 어떤 폐쇄된 형태이자 특정한 흐름의 종결부라는 점에서는 가라타니와 같은 방향에 있다). 문학에 초점을 맞추고 볼 때 제일 중요한 위치에 놓였다고 할 수 있는 두 편의 글, 곧 I부 첫 글 "문학의 묵시록 이후"와 같은 파트의 마지막 글 "탕아를 위한 국문학"은 각각 문제의 인식과 그 대응책이다. 그러나 두 글 모두에서, 비교적 정돈된 입장을 보여주는 후자에서도 비춰지는 일종의 자신없는 태도에서 드러나듯 황종연은 자신의 답변을 스스로 완전한 것으로 여기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문학의 묵시록 이후"에서 그 자신도 인정하듯 국가=자본=네이션이 완성된 형태로 등장했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게 역사적인 과제라는 인식을 수용한다면 근대국가의 형성과정에 복무한 근대문학의 효용 또한 폐기되는 건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가라타니의 역사인식을 수용하는 황종연이 손쉬운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황종연에 비교할 때 문학의 가능성만으로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한 답변을 제출하려고 했던 신형철[<몰락의 에티카>]과 김홍중[<마음의 사회학>]의 논리는 불충분하고 나이브하다).

 

"근대 문학 이후의 문학은 자신의 자유를 인식하는 한편, 그 자유를 스스로 희생하고 맞아도 좋은 뭔가를 찾아야 한다"(25)는 진술에서 드러나듯 황종연은 (전통적인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포기하면서도) 문학의 사회적인 역할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이론적인 돌파구로 "쓸데없는 부정성"negativite sans emploi을 이야기한 조르주 바타이유와 <부정변증법>의 저자 아도르노가 참조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하다(윗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곧바로 아도르노를 떠올릴 수 있다). 문학은 동일성을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동일성을 깨트리는 힘, 아도르노식으로 표현하자면 동일성 개념을 거부하는 객체/대상object이기도 하다. II부의 동시대 문학텍스트(특히 천운영과 박민규)에 대한 황종연의 비평은 문학의 비동일성으로부터 이질적인 것들의 (보편적인) 공동체/사회[여기에서 아도르노 유토피아 론의 핵심이 되는 별자리konstellation를 연상하는 건 자연스럽다]로 나아갈 가능성을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하나의' 국문학"을 거부해야만 한다는 "탕아를 위한 국문학"의 결론부는 이러한 보편적인 정치에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걸고자 하는 황종연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론적 돌파구가 그 자체로 틀리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한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부정성으로서의 보편성이 과연 구체화될 수 있는 개념인가? 보편성이 단지 부정성으로만 머무를 때 그것이 목적없는 수단으로, 그 자체가 물신화되는 퇴행적 태도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직 그 자신이 강조하는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위해 필수적인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황종연의 답변은 NAM을 비롯해서 <트랜스크리틱> 이후 가라타니의 행보를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로서 황종연의 작업을 무가치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의 한계지점은 곧 한국사회의 한계지점이다; 그는 어쨌든 근대에 대한 비판적 사유로부터 시작된 사유의 연장선에서 (적어도 한국에서는) 최전선에 가까운 입장이다. 여기에서 한국이 특별히 뒤처져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쨌든 황종연의 텍스트 읽기가 특별히 기발하지 않다고는 해도 그의 지적 광범위함과 사려깊음은 미덕이다. 그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인물로 본다면, 아직 나와 같은 이들이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매우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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