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엘리엇. <미들마치>와 공화주의적 덕성, 스피노자.

Reading 2015. 3. 7. 13:32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의 <미들마치>_MIddlemarch_를 드디어 다 읽었다. 1월 초부터 독서모임을 가졌는데 어제야 다 읽었으니 꽤 오랜 시간을 쏟은 셈이다. 총 여덟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5권 정도까지는 일종의 장기말 배치에 가깝다면 6권부터 본격적으로 장기말들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서사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7권 후반부에서부터는 정말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Oxford World's Classics 판으로 500쪽 정도까지는 조금 지루할지도 모르겠지만--물론 그때까지도 중간중간 몇 가지 사건들은 집어넣는다--그 뒤에는 이야기로서도 굉장히 재밌게 읽힌다. 오스틴Jane Austen이 도입부 몇 문단 안에 거의 체계적일 정도로 장기판을 배치하고 그 뒤에는 거의 클리셰적이까지 한 서사장치들을 교묘하게 움직이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라면, 엘리엇의 <미들마치>나 제임스Henry James의 <한 여인의 초상>_The Portrait of a Lady_은 꽤 긴 분량을 할애해서 인물들과 (엘리엇의 경우에는) 세계를 축조한 뒤 후반부에 그것들을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인물의 내면으로부터 일종의 심리적인 에너지를 이끌어낸다. 플롯중심 서사와 의식중심 서사의 대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게 프랑스의 발자크-플로베르 쌍이라고 한다면(그리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을 일종의 '발전'으로 보는 오래된 시선이 있는데), 엘리엇은 아마도 19세기 영국소설의 정전작가들 중 의식의 깊이로 파고드는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미들마치>를 "성숙한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몇 안 되는 영국소설"("one of the few English novels written for grown-up people")이라 평한 울프Virginia Woolf의 코멘트는 그런 점에서 나름의 타당성이 있다.


<미들마치>는, 이런 점에서는 디킨즈와 비교할 수 있을텐데, 정말로 그 안에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주제들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상인'의 이미지를 아주 충실하게 구현하는 Nicholas Bulstrode와 같은 인물을 이 정도까지 깊이 파고들어 묘사하는 일은 엘리엇만이 가능할 것이다--벌스트로드의 심리를 따라가기만 해보아도 이 소설의 탁월함을 알 수 있다.물론 내가 핵심적으로 잡고 싶은 주제는 서두prelude에서부터 언급되는 이 작품의 주제의식, 즉 "자신을 넘어선 삶"("life beyond self")과 공화주의적 덕성virtue의 관계다. 자신self이 주어진 전통에 복속되는 삶 혹은 생존을 위한 경제적 삶과 같은 층위를 지칭한다면--하나의 개체라기보다는 그저 무리의 일부로 살아가는 이러한 삶에 대한 엘리엇의 거부감은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_The Mill on the Floss_의 세인트 옥스St. Oggs 마을에 대한 묘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엘리엇이 암묵적으로 설정하는 당위적 가치는 이러한 삶을 넘어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실천적인 관심을 유지하는 것이다--나는 이러한 일종의 윤리적 가치에 대한 희구를 디킨즈와 엘리엇의 중요한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넘어서는 동력은 타인을 위하고 공동체를 재구축하려는 덕성에서 온다는 공화주의적 사고가 이들 텍스트의 핵심에 내재되어 있다.


 도로시아Dorothea Brooke, 리드게이트Tertius Lydgate, 윌Will Ladislow은 물론 로자먼드Rosamond Vincy와 (훨씬 미약하게, 노동과 근면에 대한 가치추구로 나타나지만) 프레드Fred Vincy-매리Mary Garth는 나름의 형태로 미들마치라는 시골마을이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자아에 갇힌 삶'을 넘어서려는 내적 동기를 갖는 '젊은이들'로서 소설의 서사에서만이 아니라 주제의식에서도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정확히 이들의 더 높고 의미있는 삶의 추구가 어떻게 좌절되는가를 보여주는 게 <미들마치>의 서사로서 때로는 낭만주의적이고(윌과 로자먼드) 때로는 공화주의적인(도로시아) 삶의 추구가 어떻게 시골마을의 '공리주의적인'(utilitarian, 이 표현은 MoF에 나온다) 현실 앞에서 최초의 힘과 방향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묘사가 엘리엇의 리얼리스틱한 면이다. 물론 이것이 이 소설의 끝이 아닌데, 현실적인 삶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소거될 수 없는 열망을 붙잡고 그것에 우리의 주의를 이끄는 것이 엘리엇의 유토피아적인--나는 이 표현을 어떠한 부정적인 함의 없이 사용한다--의도이다. 이들은 세계를, 공동체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서로를 구원하는데는 성공한다(도로시아와 디킨즈의 여성주인공들, 시씨 쥬프Sissy Jupe 및 에이미 도릿Amy Dorrit이 '구원자'로서 갖는 근본적인 유사한 역할은 지적될 필요가 있다). 서술자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들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행위"("unhistoric acts")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다; 정확히 대문자 역사History, 주류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삶과 그 삶의 중요한 동력을 포착하고 다시 우리들의 삶에 되돌리는 것이 엘리엇의 핵심적인 모티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왜 엘리엇이 19세기 영국발전의 핵심인 동시대의 도시가 아닌 수십 년 전 과거의 시골에 계속해서 정항하는지를 설명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애초에 엘리엇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영어 번역자이기도 한데, 스피노자의 철학과 <미들마치>의 관계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미들마치>가 그 인물의 묘사에서 "power" "strength" "master"와 같은 개념들을 사용하는 것, 즉 자신을 통제하고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역량potentia의 관점에 기초해 있음은 리드게이트, 도로시아, 벌스트로드와 같은 인물의 재현에서 아주 명확하다. 1968년 이후 프랑스의 스피노자 해석자들(대표적으로 마트롱, 들뢰즈)이 역량과 공동체적 삶에 초점을 맞춘 건 이런 점에서 <미들마치>와 스피노자적 사유의 관계를 밝히는데 도움이 된다. (가설적인 표현을 쓴다면) 스피노자적-공화주의(<정치학논고>에서 드러나듯 스피노자가 마키아벨리의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하자)는 인간의 자기통제에서부터 시작해 타인의 삶에 개입하고 공동체적 삶을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역량을 도입한다; 역량을 갖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고 타자에 대한 올바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역량의 개념이 엘리엇의 인물묘사에, 도로시아가 스스로의 내면에서 넘쳐나는 힘power/strength을 느낄 때, 고난에 처한 인물들이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역으로 그 노예가 될 떄overmastered 깃들어 있다.


한 발자국 물러나 본다면, 엘리엇은 다른 텍스트에서도 불합리한 세계에 맞서기 위해 이전의 철학적 전통을 찾고 거기에 기대곤 했다. 대표적으로 <물방앗간>에서 매기가 스토아학파적 전통과 만나 그로부터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힘을 얻는 것을 사례로 꼽을 수 있겠다(이후 엘리엇의 다른 소설들을 읽으면 또 다른 사례들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즉 한편으로 세상의 불합리함에 맞서기 위해 자기 자신의 정념을 통제하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것,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주인-되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넘어선 삶에 도달하는 것이--이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가 지적했듯 정확히 스토아/에피쿠로스 전통의 핵심이다--엘리엇의 관심사라면, <미들마치>는 이러한 관심사를 스피노자적 사유의 전유를 통해 (물론 엘리엇이 스피노자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것만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이 소설은 그러기에는 훨씬 더 복잡하다) 표현한다. 그것이 19세기의 영국, 퀜틴 스키너가 지적했듯 이전의 공화주의적 전통을 파묻고 자유주의자들의 사고 및 언어가 지배했던 세상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는 지금 여기에서 서술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디킨즈와 엘리엇이 각자 자신들에게 친숙한 방식을 통해 '어떻게 개인이 자신의 삶과 세계/공동체/사회의 삶을 함께 더 나은 것 상태--탁월함으로 이끌 수 있는가'란 문제의식을 사고했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