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 31일 일기. 안개. 샤를리 엡도.

Comment 2015. 2. 7. 19:41

1.  1월 26일 오전 일기.


커튼을 걷으니 안개의 도시가 있었다. 물기어린 길바닥 위로 피어오른 희끄무레한 기체 덩어리가 땅, 건물, 하늘을 뒤덮어 불과 20여 미터 정도만 떨어져 있는 무언가도 매우 희미한 실루엣으로만 보일 뿐이다--안개는 다른 대상들만이 그렇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자체 역시 희미하게만 보인다는 점에서 정말 공평하다. 이런 날 사람들의 의식 가장 밑바닥에 있던 음울한 상상력은 관절을 툭툭 털며 기어나와 머리 바깥을 헤매일 것이고, 도시는 귀신, 도깨비, 유령 혹은 형체없는 우울함과 불확실함의 이미지로 가득해 사람들은 그로부터 도망치듯이 지하철로, 건물로 기어들 것이다. 안개 낀 날에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악몽은 바로 건물 안쪽에까지 안개가 파고드는 것인데--때때로 기발한 만화가들은 바로 이런 장면을 형상화하곤 했다--우리가 단지 일상 바깥에 놓여있을 뿐이라고 믿었던 유령의 세계가 경계를 타넘을 때, 그 순간을 반길 수 있는 이들은 오직 아이처럼 그 투박한 냄새의 덩어리들로부터 지금과 다른 색채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이들 뿐이리라.




2. 1월 31일 P 선배의 글에 썼던 리플. 주간 샤를리(찰리)와 오늘날의 위기 관해.


말씀하신 내용에 동의하면서, 저는 샤를리 엡도가 68혁명의 아이들이라고 할 때 68혁명의 정신은 그 자체로 면죄부처럼 활용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혁명의 정신이 그 자체로 완전한 규범이 아닌 것처럼 68혁명의 이념--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간에--또한 완전한 것이 아니죠. 중요한 건 그게 오늘날의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무력적 폭발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사실, 이 문제가 단순히 68혁명의--따지고 보면 이 자체가 얼마나 지역적인, 특수한 조건에서 성립한 윤리입니까?--이념 혹은 (18세기 계몽의 한 적자로서) "세속주의"의 원칙을 재확인한다고 해서 풀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샤를리 엡도가 표방하는 정신은 "실질적인 무력을 행사하지 않는 한 개인의 모든 정치적/비판적 사고와 발언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전제에 입각해 있습니다; 자유주의적 계몽의 맥락을 가져온다면 단연 볼테르, 나아가 (나라는 다르지만) 칸트고, 이들이 이러한 전략을 채택한 게 구체제 비판에 대한 일종의 우회로라는 측면이 있었음은, 다시 말해 당시의 역사적 특수성에 기인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문제는, 정치적/비판적 사고에 명백한 제한선을 긋는 규범을 보유한 집단, 무슬림 극단주의의 등장입니다. 이 문제가 생각보다 까다로운 것은 세속주의와 극단주의는 궁극적으로 양립불가능한 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이번 테러는 그 양립불가능성을 표출시켰다는 점에서, 그 행위가 그르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우리 세계가 맞이한 근본적인 진실을 표명하는 셈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샤를리 엡도 비판이 생각보다 많은 건 한국이 철저한 자유주의-세속주의와 명예에 대한 규범적 금기가 공존하는 장소이기 때문이죠; 멀리 갈 것 없이 이곳이 "명예훼손"과 "모욕"이 범죄로 성립하는 나라, 5. 18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에 처벌이 가능하고 또 다수가 그에 동의하는 나라라는 것만 감안해도 놀랍지 않습니다. 이처럼 벌써 우리는 상호비판에 대해 서로 다른 기준선을 가진 세 개의 사회를 보는 셈인데, 여기에서 샤를리 엡도를 개인적 자유의 이름으로 옹호한다는 것은--물론 저는 그쪽이 더 편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냉정히 말해 어느 한 사회의 규범을 지지하고 채택하는 게 아니냐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죠. 그게 궁극적으로 가야할 길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그 규범을 당장 채택할 수 없는 사회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도 없습니다.



 잠정적으로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세속주의 혹은 (정치적 표현에 있어서의) 개인적 자유주의를 보편적인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샤를리 엡도를 68혁명의 자손으로 규정하며 이들을 옹호한다고 하는 입장은 암묵적으로 여기에 묶이는 셈입니다. 다른 편은, 한국이나 무슬림 사회 등의 특수성을 고려하며 서로 다른 규범을 지닌 사회 간의 비판적 언급은 옳지 않다는 입장에 서는 거죠(문화상대주의가 대표적인 입장이고, 어떤 면에서 공동체주의도 여기에 가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입장은, A​ 선배가 지적했듯, 지금까지 별달리 폭발하지 않았던 이 문제가 왜 최근에 갑자기 폭발했는가에 주목하고 이를 최근의 서구 자본주의의 위기와 같은 정치경제적 맥락(이런 경우 넓은 의미의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겠죠) 혹은 다른 외적 맥락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 이 입장의 강점은 어느 한쪽 편을 지지하는 상황에 붙들리는 대신 메타레벨에서의 분석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이고, 사실 그래서 저도 분석자로서는 이쪽에 서고 싶습니다. 이때, 마찬가지로 주원 선배가 지적했듯, 윤리적 규범은 기본적으로 표면에 가깝고 진정한 모순은 다른 데 있으니 그걸 해결해야 한다는 식의 지향점을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네 번째 입장은, 세 번째 입장과 어느 정도 공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처음의 두 항과 다른 종류의 보편적 규범이 있다고 가정하고 앞으로 점진적으로 모든 사회를 그와 같은 보편적 규범에 접근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죠. 그 구체적인 규범과 방법을 지시하지 않는 한 매우 이상주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만, 처음 두 입장 중 어느 하나도 곧바로 완전한 규범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세 번째 입장과도 연동하기 쉽다는 강점 때문에 여기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소수나마 있을 겁니다.


 물론 실제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채택할 입장은, 특정한 규범을 옹호하는 대신 그때마다의 정황적 윤리에 의지하는 거겠죠. "남의 문화/종교/규범을 함부로 모욕하면 안 돼, 그렇지만 너희들도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 식의 입장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가 흔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 문제가 단순히 윤리규범의 차원이 아니라 전 지구에 걸친 세계질서의 역사적 위기의 한 발현임을 나타낸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 문제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풀기 어려운, 어쩌면 관념의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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