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 <한 여인의 초상>. 읽은 뒤 감상.

Reading 2014. 11. 5. 09:07

아침에 <한 여인의 초상>_The Portrait of a Lady_의 마지막 장면까지 읽었다. 9월 초쯤에 유쌤의 (영어소설을 한국어로 옮긴 책 중에서는 최상급에 속할) 국역본을 읽었고 거의 두 달 만에 원서를 본 셈이다. 수업조교가 아니었다면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이 책을--물론 디킨즈보다는 짧다--학기 중에 끝까지 읽지는 못했을 터이다. 소설 하나를 붙잡고 이렇게 공들여 읽은 경험도 꽤 오랜만이다.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예술작품work of art을 연구하는 직업을 가지면서 특정한 텍스트를 선호하는 취향 자체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요리로 치면 이제는 무엇이 좋다라기보다는 이 요리는 이런 맛이 매력적이고, 저 요리는 저런 맛이 장점이라고 생각하게 된달까. 소설은 직업적으로 읽고 개인적인 독서의 즐거움은 역사나 철학, 사회과학에서 찾는다면 상식적으로는 매우 괴이한 일이겠지만 내 독서는 석사과정부터 그런 꼴이었다(발자크와 플로베르는 예외였다; 아마 내 분야가 아니라고 안심했기 때문이어서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읽은 제임스는, 물론 내가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전문가적'인 관점에 입각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처음으로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읽었다. 때마침 수업조교를 맡으면서 공부에 일정 이상의 흥미를 지니지 않은 학부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정확히는 어떤 독서가 이들에게 진짜로 도움이 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는 시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임스의 소설 자체가 인간의 의식을 구축하면서 윤리에 관련된 질문을 던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을 읽는 것, 읽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히 전문가적인 관심사로만 채워질 수 없다. 물론 문학이 그 특권을 독점적으로 보유하는 것은 아니며 아도르노나 스피노자를, 심지어 칸트를 읽으면서도 (단순히 정념과 지성으로 분리되지 않는) 인성 자체에 매우 진지하게 반성적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단지 텍스트를 나의 삶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저자가 맞닥트리는 문제를 얼마나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문제일 뿐이다.


 소설, 그중에서도 19세기 유럽소설이 갖는 장점 중 하나는 여러 인물들의 입장에 동시에 서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한 명 한명을 단순히 좋다 싫다고 말하는 대신 충분히 그 입장에 서 보고 이해하려는 노력과 그 뒤에 신중하게 판단을 내리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의 사회가 그런 능력을 매우 절실하게 필요로 하면서도 그러한 능력을 기르는 데는 어떠한 조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좋은 교양수업, 교양수업으로서 뛰어난 문학 수업은 다른 존재를 깊은 인내를 갖고 이해하는 성품과 능력을 요구하며 동시에 특정한 미덕과 악덕이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책임감 있게 반추해볼 기회를 만든다. 교양으로서의 문학이 인간의 내면을 풍성하고 깊게 성장시킨다고 할 때 여기에는 이러한 가치들이 깃들어 있다. 종합적인 이해와 판단은 확실히 19세기 유럽소설에 특유한 덕목이며 다른 시공간에 위치한 문학텍스트들도 이러한 기준에 입각해서 평가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덕목이 오늘날의 삶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교양으로서의 문학을 배운다고 해서 흠결없는 사람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 중에서도 위선자는 있고 슬쩍 고개를 돌린 채 타인을 고통의 늪으로 밀어넣은 뒤 자신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있다. 그러나 어쨌든 문학수업은 수업을 진지하게 듣는 이들에게 과연 나 자신이 이런 악덕과 무관한지,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를 질문해보는 경험을 제공한다. 혼자서 읽을 때는 그저 재미가 중요했다면, 수업을 통해서 재미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20대 전반부까지 내 독서와 취향이 오로지 특정한 방향으로만 발달해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조금 더 취향--감식안으로서의 취향을 말한다--이 성숙해진 지금의 나이에 <초상>을 읽을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에 감사히 생각한다. 취향의 성숙은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무언가를 더 구체적으로, 섬세 세밀 면밀하게 볼 수 있게 됨을 뜻한다. 취향이 다듬어지지 않은 둔감한 이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애초에 그 존재 자체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지각하고 음미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취향이 없는 사람과의 논쟁은 무척이나 어렵다...자신이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이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경우에 따라 섬세함은 마치 밥지을 쌀알에 무늬를 새기는 일마냥 낭비적이고 한심한 능력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때로 그 미세한 차이가 누군가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마치 밀양이 그러하듯, 거대한 힘의 시각에서는 단지 귀찮은 일일 뿐이겠지만,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이 송두리째 걸린 문제가 된다. 이때는 취향과 섬세함, 그리고 사려깊은 태도의 여부 자체가 의미심장하고 윤리적인 질문과 직결된다.


 <초상>을 읽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취향에 대한 고심을 유도한다. 확실히 <초상>과 이 텍스트에 담긴 인물들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섬세한 안목이 필요하다. <워싱턴 스퀘어>_Washington Square_와 같은 소설에서도 비슷하지만 복잡한 문제를 충분히 복잡하게 보지 못하면 우리는 매듭을 풀어내는 대신 칼로 잘라버리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 결정을 내릴 수는 있지만 그것을 최대한 원형 가깝게 접근할 기회는 놓쳐버린다. 앞서도 말했듯 내가 5,6년 전에 이 텍스트를 읽었다면 지금 의미심장하게 간주하는 것들 중에서 아주 많은 부분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터이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당신은 좀 더 사려 깊어지고 당신이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일단은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라고 말한다.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인정해야 한다. 문학이 불확실성을 견디는 것이라면, 이는 취향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내가 당장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무언가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이들만이 경험과 반성의 교차적 축적을 통해 더 나은 지각으로 인도받는다.


 동시에 <초상>은 취향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으며 가장 섬세한 취향조차도 그 근본에서부터 부패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악역 길버트 오즈먼드Gilbert Osmond는 그 어떤 인물들과 비교해봐도 자신의 독특함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는 단연코 이 소설에서 가장 탁월한 취향을 갖춘 인물이며 제임스가 구축한 오즈먼드의 언어는 최상급의 섬세함이 없이 만들어질 수 없을 정도다. 불필요하게 신비화되지는 않으나 단번에 이해되기는 어려울 정도로 미묘하다. <초상>은 바로 그 심미안이 뿌리부터 썩어 무척이나 위험한 것으로 자리한 상황을 그려낸다. 어떤 형태로든 예술을 다루는 이들, 그리고 자신의 취향을 가꾸어 나가는 이들은 오즈먼드를 보면서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심연의 가능성을 본다. 마치 톨킨의 간달프가 사우론의 반지를 앞에 두고 두려워하듯, 예술과 맞닿아 있는 이들은 오즈먼드를 보면서 자신 또한 단 한 번의 잘못된 걸음만으로도 이렇게 타락할 수 있음을 상기할 것이다. 한번 정도는 오즈먼드와 맞닥트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 중요한 순간에 이러한 길목으로 잘못 들어서지 않는다.


 이자벨 아처Isabel Archer, 길버트 오즈먼드, 랠프 터칫Ralph Touchett은 모두 중요하다. <초상>을 읽는 것은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이 셋을 모두 이해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물론 이 셋이 전부는 아니다...제임스는 발자크나 디킨즈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인물들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이해하는데 깊은 노력이 필요하며 동시에 그 노력을 기울일만큼의 인물을 최소한 셋이나 제공한다는 점에서 <초상>은 확실히 아주 공들인 노력의 산물이다. 텍스트를 단순히 종이뭉치로 받아들이는 대신 이것의 문장과 단어에 새겨진 섬세한 노동을 인식할 수 있는 이라면 <초상>이 얼마나 공들인 성취인지 감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발자국 나아간다면 <초상>은 단순히 한 작가가 아니라 한 세계의 산물이기도 하다. 제임스는 직접적으로 세계에 대해 코멘트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상>의 인물들과 그들이 맞닥트리는 고민은 철저히 특정한 시공간의 근본적인 난제와 맞물려 있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 피상적으로 밖에 접하지 못한다면 이자벨이 최후에 맞이하는 질문과 그 답변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세계에 대한 감각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윤리적인 질문이 나온다는 사실이 아니라 윤리적인 질문이 나와야 한다는 요구 자체가, 그리고 그 요구를 필연적으로 제출하는 세계의 논리 자체가 중요하다. 제임스는 인물을 통해서 세계를 구축한다. 바꿔말하면 인물에 대한 이해는 세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야 한다. 세계에 대한 감각을 가질 때 비로소 모든 인물을 어떠한 증오나 원한 없이 받아들이는 것, 나아가 그중에서도 옳고 그른 선택이 존재한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세계에 대한 이해없이 인물과 행위를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는 기계적인 판단능력은, 특히 오늘날처럼 한 편으로는 기계적인 판단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형식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사적인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를 투영하는 태도가 만연한 시점에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초상>을 이해하는 길은 그 자체로 이와 같이 사물과 사태에 대한 기계적인 판단 및 기계적 판단을 옹호하는 이들이 빠지는 오류와 결별하려는 노력을 수반한다. 그것이 세계를 그려내면서도 세계 앞의 판단을 요구하는 텍스트가 요구하는 덕목이다.



 이 모든 내용은 결국 한 가지 목적을 향한다. <한 여인의 초상>이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물론 꼼꼼하게 말이다. 영어로 읽기 힘들면 (표지에 대한 취향이 매우 조잡한 창비에서 나온) 국역본도 좋다. 특히나 나와 같이 어떤 형태로든 예술과 맞닿아 있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을 예술과 분리시킬 수 없는 이들에게는 꽤나 유의미한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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