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격차, 테크놀로지, 대중교육에 관한 노트. [140202]

Critique 2014. 3. 18. 12:18

* 2014년 2월 2일 페이스북.


 지인과 네이버와 구글, 위키피디아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정보형태와 정보활용수준의 차이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국어와 영어 위키를 동시에 이용해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국어 위키와 영어 위키의 질적/양적 차이는 심각하다. 예를 들어 Sigmund Freud의 경우는 한국어 위키가 나름대로 정돈된 체제를 갖고 있음에도 영어위키의 정보량에 현격히 모자라며, Anna Freud 의 경우 한국어 위키는 거의 항목만 존재하는 수준이다. 영어권 대학에서 페이퍼 작성/채점에서의 인용/표절문제를 다루는 문헌들을 보면 위키피디아에 관한 언급이 어떤 식으로든 들어가 있고, 이는 특히나 대학(학부)에서 위키가 정보를 습득하는 중요한 출처로 인식되고 있음을--물론 위키를 주요한 출처로 삼지 말 것을 당부하는 지침이 따라붙지만--알려준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부생이었을 때는 인터넷 문헌의 인용법을 배우면서 위키에 대한 언급조차 찾기 힘들었고, 나 또한 석사과정시절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과제를 부여하고 기본적인 페이퍼 작성법을 가르치던 과정에서 위키피디아 인용에 관해 특별히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는 온라인을 통한 참고문헌 탐색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앞으로 더더욱 중요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인문사회 분야의 경우 위키를 포함한 온라인에서 쓸만한 정보를 찾기 힘들 뿐만 아니라 웹검색을 통해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는 인식조차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로 한국은 위키피디아에 등록될 만한 지식을 다루는 사람 자체의 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학적인/전문적인 지식을 다루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둘 사이의 중간지점을 메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또 비교적 학적인 지식을 다루는 사람들의 온라인-지식생산 참여비중이 높은 IT쪽과 달리 인문사회분야에서의 간극은 처참할 정도로 크다(이 경향성은 영어권도 아주 예외는 아닌듯 싶다). 왜 그러한 차이가 큰지, 왜 인문사회분야에서는 전문가와 일반인의 가교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드문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지식생산자들의 사고/행동패턴을 해명하는 작업이 덧붙여져야겠지만, 여기에서는 일단 현상의 외적인 면모에 보다 집중하도록 하자. 한국의 인문사회영역, 혹은 사회 자체에 대한 학적인 지식은 일부 저널리즘적 글쓰기(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두자면 나는 결코 그런 글쓰기에 부정적이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 양과 질이 적극적으로 증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온라인 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주목할 만한 신간의 서평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20세기 중반 이전의 고전적인 저술이라든가 20세기 후반 이후의 주요한 연구서들에 대한 언급도 네이버, 다음은 말할 것도 없고 구글 검색을 통해서도 그 존재를 확인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말해 "한국어로 되어 있고" "온라인에서 참고 가능한" 인문사회분야에서의 학적인 지식은 매우 적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수준에서 두 가지 사실을 참고할 수 있겠다. 먼저 일차적으로 대부분의 인문사회분야에서는 일정 이상의 숙련과정을 거친 연구자들은 영어 또는 그에 준하는 학술적 지위의 언어로 된 문헌들을 참고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한국어는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제대로 된 학술언어로 간주되기 어렵다. 영어 외의 주요 학술언어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사람 수 자체가 적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영어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academic한 레벨에서 평균적인 수준의 '읽기'가 가능한 사람 또한 많지 않다(한국어 구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한국인들은 한국어로 된 학술서 앞에서 사실상의 문맹이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차적으로 한국어로 가공/번역된 지식의 경우, 사실상 주요 대학교에 학생/교직원으로 등록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접근권 자체가 없다. 논문의 경우, 극단적으로 말해 남한 인구의 99% 이상은 논문들이 실린 학술지를 지면으로 접할 일이 없을 뿐더러 온라인을 통해 참고하려고 해도 대학도서관을 경유한 온라인 접근권을 획득하지 않으면 잘해봐야(riss.kr 을 이용한다고 해도) 어떤 제목의 논문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 도서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한데, 인문사회학술서들은 대체로 비싼 가격에 쉽게 품절/절판될 뿐더러 대학도서관 중에서도 비교적 소수의 도서관에서만 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99년 새물결에서 출간한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푸코 하버마스 논쟁 재론>의 경우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에서 검색했을 때 총 50여 곳의 대학 도서관에서 검색된다; 한국대학신문의 2011년 기사를 참고한다면 한국에는 200여개의 4년제 대학이 존재함에도 말이다. 다시 말해, 영어 또는 주요 학술어를 아카데믹한 수준에서 다룰 줄 알거나 학술지 접근권 및 학술서 구입에 일정 이상의 예산을 배분하는 비교적 소수의 대학에 속해 있지 않다면 처음부터 접근할 수 있는 학적인 지식은 거의 없다(어떤 자료는 두 집단의 교집합에서만 탐색가능하다; 인문쪽에 속한 연구자가 JSTOR나 Project Muse, LION 같은 사이트를 통해 논문을 읽어보고 싶을 경우 소속대학의 웹사이트에서 접근권을 부여받지 못하면 파일을 열람할 수 없다).


 (청소년교육이나 대안교육쪽의 학습배경을 가진 친구들의 경우, 특히 그중에서 한국 공교육/고등교육체계 자체에 비판적인 경우 "공부 같은 공부를 하고 싶다면 수능쳐서 제대로 된 대학에 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당황스러워할 수 있을텐데, 그런 진술이 나오는 까닭은 간단하다-한국에서는 아직 '제대로 된 대학' 바깥에서 인문사회적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지식축적공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공계에 비해 전문화가 덜 된 것처럼 보이는 인문사회분야의 경우에도 근대학문에 필요한 엄밀한 연구 능력 및 상식적인 지식들을 습득하는 과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나는 학교 밖에서 이런 과정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곳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요컨대, 인문사회분야에서 지식 생산은 고사하고 축적 및 접근이 가능한 현실적인 조건 자체를 전체 인구 중 극히 소수의 비율만 누릴 수 있는 상황에서, 온라인을 통한 지식의 분배 및 전파 자체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현황은 당연하다. 이 사실은 단순히 지식의 불평등함과 '사회비판적 작업'이 (국가와 기업의 침투에 극히 취약한) 대학 공간 바깥에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나는 앞서의 사실로부터 두 가지 예측을 추가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온라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총량 자체가 극히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을 통한 지식의 습득이 대중화된 지금 우리가 '평균적인 교양'이라고 부르는 지식집합의 수준이 대체로 낮은 정도에서 머무를 것이다. 교양bildung을 현재의 지식생산과정의 맥락에서 사회구성원에게 요구되는 세계관의 형성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면, 한국의 고등교육에서 교양교육이란 중고등학교를 거쳐 극히 협소한 형태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 개개인의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확장시키는 역할을 맡게 된다; 실제로 대학의 교양교육과목은 자신이 전문적으로 다루게 될 전공과목과 대비하여 지식의 영역을 깊지 않은 수준에서나마 확장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고, '교양학부'라는 명칭은 과목이수를 넘어서 해당과정 자체에서 교양=확장된 세계관의 형성을 촉진한다는 걸 가리킨다. 그러나 지식의 접촉루트가 여전히 수업 및 도서/논문참고로 한정된다고 한다면, 온라인 교육의 가장 혁신적인 잠재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의 대량확산은 인문사회영역에서 사실상 전혀 이용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도서를 찾아읽는 비교적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한 인터넷을 주된 지식습득경로로 이용하는 다수가 자신의 세계관을 충분히 유효하게 확장시키는 일은 극히 어렵다--이런 상황은 왜 한국인 웹 이용자들이 지식의 확장이 가능한 구글이 아닌 폐쇄적 체제의 네이버에 여전히 머물고자 하는지를 설명하는 한 요인일 수도 있겠다; 지식을 축적하고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게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그런 과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람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둘째, 지식접근권이 극히 제한된 상태에서는 (전문)연구자들이 자신이 훈련받은 영역을 넘어 다른 분야와 접촉하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 또한 높다. 위키피디아가 자신의 이상적인 형태로 실현될 경우 혜택을 보는 건 대중만이 아니며 오히려 연구자야말로 가장 중요한 수혜자가 된다. 한 분야의 전문가는 다른 분야에서의 비전문가와 적어도 해당분야의 지식량 자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상기하자. 예컨대 문학연구자가 철학적인 개념을 원용할 때, 혹은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을 참고해야할 때를 가정하자. 이때 자신이 해당분야의 전공자와 직접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있지 않을 경우(아마 한국적 풍토에서는 대부분이 그러할 것이다) 온라인을 통한 지식접근이야말로 가장 빠르고 일차적인 경로가 된다. "전문 연구자라면 당연히 관련 학술서부터 읽어야지"라는 반응은 실제로 그런 일을 제대로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자신이 참조할 분야의 전통이 깊고 논의가 활발할수록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효율적인 참고가 가능한 책/논문을 찾는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과정이 된다; 어떤 책이 널리 인정받는 책인지 알고 있어야 그 책을 읽을 수 있지 않겠는가? 위키피디아는 단순히 주어진 지식을 축적하는 곳이 아니며 엄청난 양의 지식화되지 않은 데이터들로부터 체계화되고 신뢰가능한 지식을 선별/가공하는 작업 및 그렇게 정리된 지식을 다른 분야의 개념/지식과 연결hyperlink하는 기능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바꿔말하면 위키피디아와 같은 웹사이트가 자신의 기능을 이상적으로 실현할 경우, 특정 분야의 연구자가 자신과 다른 지적 전통에 속한 지식을 습득하고 참고하는데 극복해야 할 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춰줄 수 있다--뒤집어 말하자면 현재와 같은 조건에서 연구자들은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보다 많은 노동을 감내해야만 한다.


(따라서 어떤 집단이 공익에 입각하여 위키피디아의 항목들을 조직적으로 보충 및 체계화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면 수년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광범위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인은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에서 비슷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소규모 집단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는데, 그러한 집단을 유지하기 어렵다면 학교에서 교양수업 모델의 일환으로 특정분야에 대한 지식을 찾고 해당 위키를 업데이트하는 과정을 과제의 일환으로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학생들은 이미 정리된 영어 혹은 다른 언어의 위키를 번역하고, 거기에 몇 권의 주요한 개설서를 읽고 간략한 사항을 정리한 뒤 교수자의 검토를 거쳐 등재하는 것만으로도 온라인 상의 공공지식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 지금처럼 "시간이 남는" 누군가의 선의에 기대어야만 하는 조건에서는, 특히나 그런 선의를 제공하는 데 인색한 한국의 풍토를 고려한다면 이는 확실히 신속한 발전을 낳을 것이다)


 여기까지의 논의에서 (만약 여기까지 읽는 사람이 있다면!^^) 두 가지 전제가 밑바탕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지식습득의 격차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 둘째, 새로운 테크놀로지, 특히 (아직도 기술적으로 발전할 여지가 매우 많은) 온라인을 통한 대중교육변화의 잠재성. 첫번째의 경우 분명히 말하건대, 특히 기업이나 (사실상 이윤창출의 관점에서 대학을 본다는 점에선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국가--기업화가 극도로 진행된 미국의 경우에는 그나마 다양한 학술지원기금이 존재하지만, 한국의 대학개혁논의에서는 한국에 그런 기금들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고려되지도 않고 있다--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인문사회분야, 그중에서도 비판적 연구의 경우에는 관련 분야의 대중교양수준 자체를 끌어올리지 않고는 자신의 생존을 담보받기 어렵다.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그러한데, 하나는 자신의 물질적인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본을 지원해줄 수 있는 대상을 설득해야한다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지식의 대중적인 축적 없이 연구자들의 평균수준만 올라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일반론에서.

 두번째 항목, 테크놀로지의 수준에서는, 만약 우리가 지식의 격차를 줄이고 사회의 평균적인 지식습득량을 높여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나는 지식격차를 줄이고 대중의 지식수준 자체를 끌어올리는 하나의 수단으로 온라인이 갖는 잠재력이 아직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지금 한국에서 온라인과 주변기기(스마트폰 및 스마트TV 등등...가령 쿡티비도 TV시청 중 인터넷을 검색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고작 네이버만 이용가능하며 그중에서도 제한된 내용일 뿐이어서 별 쓸모가 없어서 그렇지-_-)의 결합은 놀랄 정도로 일반화되었으며 "검색"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전의 특수한 용법에서 당당히 일상어의 위치로 승격하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수없이 행해지는 검색에 비해 검색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식 자체가 극히 제한적일 뿐이다. 지식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전문지식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활용되지 않을 거라는 비관적인 답변은 아직 시기상조인데, 온라인 상의 지식습득경로에서 하이퍼링크를 통한 지식의 연결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식으로 다가서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엔하위키/리그베다위키와 같은 취미형 위키가 사용자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큰 힘은 하이퍼링크에서 나온다; 지식의 습득 및 지식습득의 확장 자체가 하나의 쾌락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은 매우 중요한 사례다). 다시 말해 손쉽게 검색가능한=최대한의 개방성과 노출도를 갖춘 지식의 보급과 그것들의 상호연결만으로도 일상적인 층위에서의 대중교육의 진전을 이루어낼 수 있다. 나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의 노력만으로도 우리가 믿는 것보다 크고 장기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나는 지식의 양적 축적이 일정한 궤도 위에 올라갔을 때 다른 조건들과 결합하여 특정한 집단적 의도의 부과 없이 이후에 유입된 이용자들을만을 통해 자체적으로 지식생산-축적-전파-교류-개선이 가능한 '생태계'가 생겨날 수 있다고까지 믿는다. 사실상 온라인 상에서 현재 기술적으로 어떤 것들까지 가능한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 정도의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앞으로 현실화될 기술들이 어떤 운동을 가능하게 할지 주시하는 노력이 무가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테크놀로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은 매우 많지만, 당장 떠오르는 특성 세 가지만 말해보자. 하나, 어떤 목표가 이론적으로/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 목표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신속하게 달성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맞춰 적용한다면 대중교육과 기술을 연계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전반적인 기술수준에서 어디까지 이론적으로 도달가능한지를 탐색하고 예측하는, 어떤 면에서는 거의 추론하는 과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 기술은 항상 다른 것들과 결합해서 작동한다;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단독적으로 고민하는 대신 다른 요소들과 어떻게 결합가능한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셋, 기술은 "가능한 지평", 즉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의 외곽선 자체를 재구축한다; 예컨대 근대적 형태의 대중교육 자체가 아동인구의 집적을 가능케 한 기술적/경제적/정치적 조건들의 결합물이었던만큼, 기술의 발전 및 적용은 대중교육의 내포와 외연을 함께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최종적으로 누군가는 그렇게 새로이 출현한/할 교육의 정의와 수단을 재설정해야 할 것이다.


 나는 전통적인 교육방식의 무용함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이 전통적인 교육과 근대적인 교육 양자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그것들이 어떤 힘을 갖는지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육방식을 올바르게 수행한다는 것이 사실상 일정 이상의 자본을 소유한 이들에게만 가능한 일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러한 권리의 확대를 요구함과 동시에 그러한 영역에 단시간 내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형태의 교육이 가능한지를 함께 고민해야만 한다(가장 추악한 형태이긴 하지만, 통신망의 확충과 발전이 인터넷강의라는 형태로 사교육의 "강남-중상층 이상" 계층의 독점을 부분적으로 무너트리면서 확장되어 나갔다는 사례를 떠올려 보자...나처럼 지방에 살았고 경제적으로 "대치동 사람들"과 같은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분명히 인터넷 강의--당연하겠지만 거의 무료로 구할 수 있는 불법사이트도 그 비용을 감당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사람들에겐 인기였다--는 혁신적이었다; 아마 인강이 없었다면 나는 내 고등학생 시절을 지탱해준 독서와 대중문화에의 접촉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고민을 구성하는 근본요인으로 테크놀로지가 등장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삶의 조건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테크놀로지가 아직 충분히 활용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잊혀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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