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마지막 분기 결산1: 18세기 잉글랜드의 여성 우정론
매주 장애물 구간을 통과하듯 지내다보니 어느새 한 해가 끝났다. 2023년 4/4분기 동안 작업했던 것 중 몇 가지 추려 기록한다. 첫 번째는 11월 말일에 나온 학술논문이다.
이우창, 「“서로를 향한 깨지지 않는 우정”: 새뮤얼 리처드슨과 18세기 여성 우정론」, 『18세기영문학』 20.2 (2023), 1-37. [원문 다운로드 가능한 KCI 링크]
1. 문제의식과 구성에 관해서는 논문 서론의 일부를 살짝 수정하여 가져오는 게 가장 효율적이겠다.
본 논문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본 논문은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잉글랜드의 문인들, 주로 여성 문인들의 저작을 통해 여성 간 우정 담론의 전개를 이해할 수 있는 지도를 거칠게나마 그려본다. 둘째, 이렇게 복원된 맥락을 바탕으로 18세기 잉글랜드의 소설가 새뮤얼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의 소설에서 여성의 우정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의 문학사적·역사적 의미를 해명한다.
글은 먼저 17세기의 여성 시인 캐서린 필립스(Katherine Philips)와 성직자 제러미 테일러(Jeremy Taylor)의 저술을 통해 여성의 우정을 정당화하는 논변을 살펴본 뒤, 이어서 18세기 여성 우정론의 두 가지 전통, 즉 여성의 우정을 이상화하고 칭송하는 담론 및 여성을 위한 올바른 우정의 기준을 제시하는 담론을 재구성한다. 마지막으로 리처드슨의 소설들에서 여성의 우정이 어떻게 문학적 형상으로 구축되는지 추적하고, 그것이 18세기 잉글랜드 문예장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묻는다.
이를 통해 논문이 부각하고자 하는 지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우정”을 보편적·선험적인 범주로 간주하는 대신 그것을 역사적으로 특수한, 즉 시공간에 따라 서로 다른 함의와 용법을 갖는 개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수평적인 친교 일반을 우정으로 명명하는 데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오늘날의 용법을 과거의 세계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와 자기중심주의의 함정을 피하기 어렵다.
둘째, 우정의 역사화는 ‘젠더 간 번역’(translation between genders)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서구의 역사에서 우정은 본래 자유민·엘리트 남성 간 친교를 위한 개념이었다. 이는 설령 상층 계급이라 할지라도 여성이 맺는 관계, 특히 여성 간 친교를 우정의 언어로 규정·설명하는 시도에는 일종의 ‘번역’ 과정이 요구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러한 번역 과정에 내포된 간극과 긴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장르 간 번역’(translation between genres)의 문제도 중요하다. 모든 관념은 텍스트를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 이는 우정의 개념이 역사적 특수성만이 아니라 장르적 특수성 또한 벗어날 수 없음을 뜻한다. 설교문, 논쟁팸플릿, 교육서, 소설과 같이 서로 다른 장르는 각기 고유한 (물론 이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만) 장르적 문법을 염두에 두고 집필된다. 우리는 우정의 개념이 각각의 장르에서 어떤 방식으로 논의되는지, 그리고 한 장르에서 구축된 논의가 다른 장르로 ‘번역’될 때 어떠한 ‘번역자의 과제’가 발생하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2. 「새뮤얼 리처드슨과 18세기 여성 우정론」의 문제의식을 처음 구체화한 때는 2021년 하반기다. 그동안 박사연구생으로서 받아온 장학금의 종료를 목전에 두고 있던--하지만 학위논문을 마무리하기까지는 한두 학기 정도가 더 필요한 상황이었던--나는 2022년을 나기 위해 서울대 영문과에서 신설된 "박충집 학술기금 영어영문학 학문후속세대 연구지원" 기금에 지원할 주제를 찾고 있었다. 한창 박사논문을 쓰는 와중에 다른 연구주제를 챙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때의 나는 운이 좋았다. 몇 년 동안 자료더미에 코를 박고 기약없이 헤매던 중 드디어 '박사논문의 길'을 갓 붙잡은 시점이었던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여성담론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연구사에서 어디가 맹점으로 남아있는지 깨닫게 되면서, 당장 학위논문에 집어넣지는 않더라도 언젠가 연구할 수 있는 주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성의 우정'은 그중 하나였다. 실제로 내 학위논문을, 적어도 제1부를 읽어보신 분은 그 여정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이번의 논문이 가능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실 수 있을 것이다.
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나는 크게 세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 적어도 18세기까지 서구의 언어들, 특히 정치·도덕의 언어는 고전 고대로부터 구축된 전통과 여전히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이는 가정의 영역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언어와 사고에서도 마찬가지다. 둘째, 여성의 도덕적 품행과 지위를 지칭하는 언어는 많은 경우 본래 남성의 품행을 설명하기 위해 구축되어 있던 언어를 전유하고 변용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이는 꼭 18세기 영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셋째, 추상적인 관념에 머무는 대신 구체적인 글쓰기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설령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주제라 해도 그것이 표현되는 장르에 따라 언어적 구현방식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식에 기반한 접근법은, "젠더 간 번역", "장르 간 번역"과 같은 개념의 사용에서 드러나듯, 여성의 우정을 연구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다행히 기금에 선정은 됐으나, 당장의 학위논문 작업부터 학술대회 발표, 강연, 포닥 지원, 구직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음 두 해는 생각을 글로 옮길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다. 2023년 2학기는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시기였고, 논문을 쓰기 위해 뺄 수 있는 시간은 (가족들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짧았다. 기금에 선정이 됐으니 어떻게든 기간 만료까지 성과물을 제출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무엇보다 메모(예컨대 https://begray.tistory.com/565) 및 세미나/학회 발표를 위해 정리해놓은 내용이 없었다면 연내에 끝맺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촉박한 일정 하에서 뽑아낸, 그리고 무엇보다 고대부터 18세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아무리 거친 정리에 대한 양해를 구한다고 해도) 아우르는 글에 구멍이 없을 리 없다. 실제로 초고를 읽어준 친구 한 명은 아예 보강해서 따로 책을 쓰는 게 어떠겠냐는 의견을 주기도 했다. 저자로서 선수를 치자면, 「새뮤얼 리처드슨과 18세기 여성 우정론」의 이야기에는 크게 두 가지 빈틈이 있다. 하나는 17-18세기 '남성의 우정' 담론이 어떤 형태를 띠었는지 직접 분석해서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 간) 우정의 소설적 형상화 문제를 다룰 때, 희곡 장르와 같이 당대에 이미 꽤 많은 레퍼런스를 구축해놓은 다른 문학장르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변명을 덧붙인다면, 리처드슨 소설과 18세기 드라마 장르의 관계를 제대로 파고든 연구는 내가 알기로 한국은 물론 영어권에도 아직 없다).
앞의 친구에게 이러한 약점을 자인하면서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이 문제까지 해결하려면 한 5년 정도는 이것만 파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일단은 불완전하지만 분명 연구사에서 나름의 발자국을 내딛고 있는 이 글을 지금의 형태로 내보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