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효용"을 조금 더 생산적으로 논의하는 방법에 관하여
*아래는 디씨인사이드 독서 마이너갤러리에 올린 포스팅 일부를 다듬은 것으로, 상세한 작성 경위는 해당 포스팅 앞 부분을 참조하라(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reading&no=452376).
1. 인문학 위기론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물음이 따라나온다: "인문학은 어떤 효용이 있는가? 그것은 다른 분야와 동등한 지식/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의 불가결함을 떠나, 나는 이러한 질문이 그 자체로는 일정 정도의 혼란을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이는 무엇보다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대상이 서로 다른 지적 영역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음의 세 가지 영역은 모두 "인문학(적) 분야"로 지칭된다('자연과학·과학기술과는 다른 무언가 인간적인 지혜를 담은 것'을 지칭하는 매우 일상적인 용법은 일단 제외하도록 하자):
a) 이른바 문사철을 포함한 전문 지식으로서의 인문학 연구(당연하지만 문학, 역사학, 철학 모두 전문연구와 교양지식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b) 과학기술을 비롯한 인문학 외부의 학문분과에서 연구자들의 필요에 따라 인문사회적 지식 혹은 접근법을 받아들여 나타나는 연구(과학사/과학기술학 연구 등; a와 교집합을 구성하기도 함)
*편의상 여기서는 인문학에 인접한 특정 사회과학 영역을 포함하는 말로 "인문사회"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c) 교양지식의 핵심적 영역으로서의 인문학
이 세 가지 영역에 대한 의식적인 구별이 없다면 누구는 a를 이야기하는데 다른 이는 c로 반론을 제기하는,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전개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실질적으로 대화도 논쟁도 아니기에, 유감스럽게도 인문학의 효용에 대한 논의 다수가 이렇게 흘러가고는 하는데, 논리적으로 생산적인 진전을 가져오는 경우가 드물다.
2. 먼저 a, 즉 전문지식으로서의 인문학에 관해 간략히 이야기해보자.
우선 오늘날 심지어 인문학자들에게까지 널리 퍼져있는 오해를 지적해야 할 것 같다. "과거에는 (철학 중심의) 인문학에서 모든 영역을 포괄했으나, 근대와 함께 각각의 전문적인 영역을 나누는 분과학문이 독립해나가면서 남은 것들이 오늘날의 인문학이다"라는 식의 믿음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서구 학문의 역사를 상당히 잘못된 방식으로 단순화하고 있다(이하 서술과 함께 다음 포스팅을 참조: https://begray.tistory.com/526 ).
과거에 지식/학문 간 영역 구별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중세 지식인들도 법학, 신학, 의학이 서로 다른 지식이라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략 17세기까지 인문주의자(humanist)라 불릴 수 있는 지식인 집단이 포괄적으로 다루던 여러 지식이 특히 19세기부터 고유한 학문분과로 나뉜다는 큰 흐름은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 이상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건 이 주제가 영어권 학계에서도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수십 년 간 17세기 인문주의 연구는 그래도 엄청나게 많이, 또 깊은 수준으로 나왔는데, 19세기부터 분과학문이 성립하는 역사적 과정은 1980-90년대에 조금 이야기가 나오다가 더 진전되지 않고 있는 상황으로 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근대적인' 인문학 분과학문 자체가 다른 과학기술·사회과학 영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18-19세기 대학의 분과학문성립 과정에서 탄생한 '전문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인문학에서 다른 전문학문들이 갈라져나와 비전문적인 인문학만 남은 게 아니다. 19세기를 전후로 대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전문분야가 본격적으로 성립하면서 근대의 전문분야로서의 인문학 역시 성립하게 된 것이다. 철학에서 칸트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한번은 이름을 접하는 랑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는 19세기 '근대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을 정립한 것으로 간주되는, 인문학의 전문연구화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근대 인문학=전문연구화의 과정을 일반화해서 말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사실상 20세기 중반 이래 북미에서 어느 정도 완성된 체계를 수입한 한국 인문사회 학술장에서는 느낌이 다를 수 있으나, 분과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구축한 학자들, 그것도 국가와 대학에 따라 상이한 제도적 환경에 놓여있던 이들 중 자신들이 결국 무엇을 만들게 될지 명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여튼 이러한 학문분과체제가 성립하기 시작한 이래 19-21세기까지 각각의 인문학들은 수 차례 전문화의 계기들을 거쳤다. 아마도 19세기 후반부터의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자연과학-사회과학 방법론의 도입을 둘러싼 격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중반에는 미국 대학에서 "프랑스철학"이나 "포스트이론"으로 넓게 불리는 지식들이 '전문화'의 한 가지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보통 문학연구의 비합리성(?)을 고발하는 타깃으로 꼽히는 "프랑스철학적" 글쓰기...는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 대학 영문과의 전문화과정이 도달한 결과물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 이러한 전문분과로서의 인문학에는 어떤 효용이 있는가? 즉각적인 답변은, 유감스럽게도 이를 하나로 아울러 논의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한데, 무엇보다 인문학 분과 외의 다른 전문영역이 인문학 연구의 영역을 대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및 심리학의 발달과 함께 철학의 일부 영역을 과학에서 가져간(?) 예와 비슷한 일들이 계속 발생하리라는 전망도 있겠으나, 반대로 역사학적 접근법은 자연과학이나 공학이 아무리 발달한들 대체가 불가능하다. 디지털역사학처럼 역사학자들이 과학기술자들이 만든 지적 도구를 가져다 쓰거나, 아예 (b에서처럼) 그러한 영역 자체를 역사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예는 계속 나오겠지만 말이다. 반도체 연구가 지정학적 고려를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전자가 지역학 연구를 대체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이는 학문 간 우열과 별다른 상관이 없다. 단지 애초에 전문화의 진행방향이라는 것이 기존의 방향을 더욱 깊게 파고들어가는 쪽으로 작동하지 상이한 계통의 연구를 대체하는 쪽으로 확장되는 게 아닐 따름이다.
이로부터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전문분과로서의 인문학의 효용을 유의미하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문학을 통칭하는 대신 개별 학문으로 들어가야 하며, 각각의 학문에서 생산하는 결과물, (재)생산하는 인적 자원이 지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검토해야만 한다. 이는 특정한 분과학문의 지식·접근법의 잠재성을, 또 해당 영역 종사자들이 지닌 현재의 역량을 함께 들여다볼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절차를 생략하고 인문학 연구의 효용과 미래를 말하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답변을 들려줄 수밖에 없다.
3. b에서 언급한 영역, 즉 비인문학 분과에서 인문(사회)학적 접근법을 채택하는 연구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예를 들면, 컴퓨터공학 연구에서 탁월성을 보이는 것과 컴퓨터공학의 역사에 관해 (전문역사가들의 기준치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연구를 하는 일은, 비록 전자의 숙달이 후자의 작업을 보다 철저하게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과업이다. 과학기술자들은 종종 STS나 과학사의 성과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는 한다. 하지만 전자에게 과학기술 분야에 관한 철학적·사회적·정치적·역사적...등등의 메타적인 성찰을, 혹은 그러한 영역들과 과학기술이 결합하는 양상을 전문적으로 탐구할 역량을 요구한다면 이는 상당히 과중한 부담이 될 것이다. 이는 과학기술자들의 지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들이 훈련받은 지적인 도구가 그런 걸 연구하는 용도로 다듬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톱이 망치를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좋고 나쁨을 떠나, 한국의 학술·지식장에는 아직 특정한 학계나 지식의 생산-작동방식을 엄밀하게 탐구하는 연구자들 자체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렇다보니 이러한 주제는 과학기술사·과학기술사회학 등에 친숙한 소수를 제외하면 인문학 분야의 논쟁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브뤼노 라투르는 인문학 연구자들에게도 종종 읽히지만, 그의 경험적 연구나 이언 해킹의 저작까지 읽는 인문학 연구자들이 흔한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는 인문학 본진(?)의 쇠퇴와 별개로, 비인문학 분과들의 발전이나 전문화 과정에서 메타적 논의를 위한, 혹은 상이한 영역들의 접합을 다루기 위한 지적 도구로서 인문사회적 접근법의 효용은 감소하기보다는 증가하리라 전망한다. 물론 한국의 학자들과 연구행정가들이 이 사실을 깨닫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4. c, 교양지식으로서의 인문학을 논의하기 위해 먼저 짚어야 할 점은 대학의 "교양지식" 또한 "인문학"과 마찬가지로 서로 연결되어는 있으나 상이한 영역들을 지칭한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구별해보면,
i) 인간/시민으로서 바람직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
ii) 전문 분과학문을 습득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
iii) (i, ii 의 파생물로서) 각 학문분과의 요소를 필요에 따라 결합하기 위해 요구되는 기본적인 지식
정도를 떠올릴 수 있다. 이중 인문학의 효용과 관련된 것은 주로 i)과 iii)일텐데, 내 생각에 해당 영역의 필요성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간단히 말해 읽고-생각하고-쓰기로 통칭되는 정보의 습득-검토-생산-소통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앞으로의 교육에서도 여전히 필요하며, 인문(+사회) 분과 외의 대부분의 분과학문은 이 역량을 기본으로 전제하지 이것 자체를 훈련시키는 과제를 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통계적 지식, 코딩 능력 등이 이런 교육과정의 중요한 영역으로 편입될 수는 있겠으나, 이는 기존 교육과정에서 볼 때 대체가 아닌 확장에 가깝다. 무엇보다 한 명의 인간/시민에게 정확히 어떤 유형의 지식이 얼마나 요구되는가의 문제는 개별 전문분과의 지식으로 깊이 있게 논의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며, 여전히 시민사회에서 인간의 운명을 종합적으로 성찰하는--달성불가능지만 어쨌든 인문학적 담론의 몫으로 지목되는--과제는 인문-교양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물론 지금까지 한국 대학에서 고유의 정합적인 교양교육 모델을 구축한 예는 매우 희귀하다. 최근 많은 대학들의 교양학부/자유전공학부 설립과정을 봐도 알 수 있지만, 한국에서 인간-시민-직업인에게 정확히 어떤 역량과 교육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이 깊이 있게 다뤄진 예는 아직 찾기 어렵다. 한국사회에서 교양교육은, 그리고 거기에 포함된 인문학적 지식의 효용은 그 전공자들에 의해 심도 있게 탐구된 적이 없다보니 역으로 그것이 도대체 얼마나 유의미한지 자체가 (대학행정가, 그리고 자칭 '개혁가'들에게)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저평가가 곧 그것의 객관적인 필요성 자체를 부식시키는 것은 어렵다. 근대 사회는 갈수록 개개의 사회구성원에게 더 많은 지식을 더 효율적으로 처리할 것을, 또 정치, 경제, 사회, 국제적 공간에서 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구하는 쪽으로 움직여 왔으며, 현대 한국의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곧 근대 사회의 발전사이기도 하다. 이를 고려하면 시민성 및 그에 필요한 역량을 규정하고 훈련하는 과정을 구성하고 또 이를 메타적으로 논의하는 도구로서의 인문교양 지식의 필요성은 어떤 형태로든 돌아올 수밖에 없다--단지 그러한 필요성을 일깨워줄 만큼의 지적 역량이 아직 투입된 적이 없을 따름이다.
5. 위 모든 이야기에는 공통된 전제가 하나 깔려 있다. 이른바 인문학적 지식의 여러 유형이 어떠한 필요성을 가지고 있느냐와, 현실의 한국 인문학계가 그러한 필요성을 충족시키고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인문학 분야 업계인(?)으로서 나는 한국 인문학계가 스스로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 또래의 성찰적인 연구자는 물론, 이제 한국 인문학계 중추에 있는 연구자들조차 점점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다만 학계 안팎으로 충격과 공포, 비관론이 급속하게 퍼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제껏 한국 학계에서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다뤄본 예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공정하게 말하자면 한국 대학에서 근대학문이 성립한 건 기껏해야 수십 년에 불과하다), 또 아직 이런 문제를 제대로 논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인문학의 지분이 급격히 감소하는 시기를 맞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스스로의 입장을 충분히 암시했는데, 학문의 역사와 분과학문체제를 더 깊이 이해할수록, 또 사회발전과 전문지식의 관계를 더 깊게 생각할수록 지금까지 인문학 분과에 요구되었던 지적인 과제들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거라 판단되지는 않는다. 물론 사회가, 연구자들이 어떻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5줄 요약:
1) 인문학 쓸모 논쟁을 하려면 먼저 "인문학"이란 말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따져봐야 함, 안 그러면 서로 헛발질만 하기 쉬움
2) 전문영역으로서의 인문학의 쓸모를 이야기하려면 분과별로 파고 들어가서 거기서 나오는 지식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따져봐야 함, 인문학 일반으로 논의해봐야 죽도 밥도 안됨
3) 비인문학 분과학문의 발전과정에서 인문사회적 접근법의 필요성은 급격하게 늘지는 않더라도 줄어들 것 같지는 않음
4) 교양지식 영역에서 인문학 분야의 역할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다른 분과학문지식은 그런 용도로 발달한 게 아니기 때문임.
5) 인문학의 쓸모/필요성과, 현실의 인문학계가 잘 돌아가고 있는가는 별개인데, 후자가 별로라고 전자도 필요없다고 하기는 곤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