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논쟁을 이해하기 위한 모델: 한 가지 사례
과거의 논쟁, 특히 어떤 문화 혹은 사회의 행위자들이 다른 사회에 통용되던 개념·논리를 수용하여 자신의 사회에서 벌이는 논쟁의 섬세한 구도를 이해하는 일은 언제나 매우 까다로운 과제입니다. 비교적 균일한 하나의 시공간에 속한 논자들이 주고 받는 논쟁의 양상을 이해하는 것도 상당히 많은 지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일인데, 둘 혹은 그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역사적으로 세밀한 지점까지 파악하는 일이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일의 난이도를 조금 덜어내는 방법 중 하나는 역사적 행위자들이 주고 받는 논쟁의 복잡성을 근사하게나마 담아낼 수 있는, 적어도 그러한 가능성을 확장시킬 수 있는 좀 더 정교한 논쟁 모델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직전의 18세기 세미나 발표를 염두에 두고) 그러한 모델의 한 가지 형태를 전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특히나 "근대적 발전사관"의 뼈대를 이미 채택하기 시작한 사회에서, 다른 좀 더 '발전된' 사회·문명의 논리를 수용하여 어떤 정치적인 행보를 정당화하는 세력이 있고, 필연적으로 그러한 흐름에 저항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이 등장하여 충돌 또는 논쟁이 발생하는 상황을 상정해 봅시다. 이때 많은 연구자들이 가장 쉽게 떠올리는 구도는 다음과 같은 도식입니다.
[도식1]
(좀 더 발전된 것으로 상정되는) 사회1의 지적인 흐름 및 그 대변인(A)
↔
(덜 발전한, 낙후된 상태로 여겨지는) 사회2에 통용되는 기존의 믿음 및 그 수호자(B).
2.
[도식1]에 입각한 해석은 지금도 아주 많은 책과 연구서에서 되풀이되고 있지만, 우리가 조금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도식1]은 현실 세계에서는 거의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논리나 사고가 아무런 매개mediation도 없이 다른 논리와 치고 받는 건 극단적인 관념론자의 머릿속이 아닌 이상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논쟁이란 것은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지 논리들끼리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보통은 B의 사회에 일정 이상 지분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A의 세계에도 접점이 있는 누군가(a)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a가 번역을 하든, 번안을 하든, 혹은 자기의 주장에 슬쩍 집어넣든 하는 식으로 A의 (일부) 요소를 채택하고, 그걸 B의 사회에 제출하면서 그에 반발하는 주장이 나와야 논쟁이란 게 생기는 것이겠죠. 이걸 간단히 도식화해 봅시다.
[도식2]
사회1 → 논리A가 통용
사회2 →
행위자a: 사회1로부터 가져온 논리A에 기반, 자신이 활동하는 사회2에서 스스로의 정치적/사회적 목적을 위한 주장A1을 제출
↔ 비판자b: 행위자a의 정치적 목적에 동의하지 않음. 따라서 사회2의 구성원들에게 널리 통용되고 있던 논리를 활용하여 행위자a와 그의 논리A1에 대항하는 주장B를 전개
이때 [도식2]에 해당하는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행위자a가 전략적인 사고력을 갖춘 사람일수록, 또 정치적으로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자신의 주장A1에서 논리A를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사회1이라는 맥락에서 최적화된 형태로 만들어진 논리A가 사회2라는 상당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구성원들에게 그대로 설득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행위자a가 영리한 사람이라면, 그는 논리A를 원래의 형태로 엄밀하게 가져오는 것보다 자신의 정치적 목표 및 사회2의 상황에 맞추어 적당히 취할 것만 취하고 필요하다면 원래의 논리를 곡해하는 편이 좀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걸 잘 알겠지요(물론 종종 사회2의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논리A를 그대로 엄밀하게 옮겨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발견되고는 하는데요, 이들은 대체로 학자로서는 존경받지만 정치적인 영향력은 미미한 편입니다).* 따라서 후대의 연구자는 주장A1이 논리A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이걸 행위자a의 지적 능력의 한계로 볼 것인지 아니면 행위자a의 전략적 선택으로 볼 것인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다만 주장A1식의 '맥락에 따른 변용' 전략에는 한 가지 리스크가 있는데, 자신처럼 사회1과 논리A를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행위자a가 주장하는 주장A1은 논리A를 가져온 것처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말도 안되는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행위자a는 바보거나 사기꾼이다"라며 그의 지적 발언권을 무너트리는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구는 선진국이니까 우리도 서구의 유행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어설픈 서구 추종 지식인이 종종 이런 위험에 처하고는 합니다).
3.
마찬가지로 중요한 지점은, 주장A1를 비판하고 그에 반론하는 방식이 한 가지만 존재하라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비판자b처럼 아예 논리A 계열의 파생물과는 전제도 구조도 다른 주장B를 내세워 반대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논리A 계열의 언어와 전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꼭 주장A1과 같은 결과로 갈 이유는 없다는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행위자a가 "수학적으로 계산해볼 때 이게 가장 효율적이야!"란 주장A1을 전개할 때, "꼭 수학적 효율성을 따져야 해? 우리들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낫지"라고 아예 판단근거 자체를 달리하는 주장B로 반박할 수 있지만, "수학적 효율성은 중요한데, 내가 계산해보니까 다른 게 더 효율적인데?"로 A1의 전제를 받아들이면서 A1에 이의를 제기하는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겠지요. 이에 기반하여 아주 약간 더 복잡해진 도식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식3]
사회1 → 논리A가 통용
사회2 →
행위자a & 주장A1 : 사회1로부터 가져온 논리A에 기반, 자신이 활동하는 사회2에서 스스로의 정치적/사회적 목적을 위한 주장A1을 제출
↔ 비판자b1 & 주장B1: 행위자a의 정치적 목적에 동의하지 않음. 따라서 사회2의 구성원들에게 널리 통용되고 있던 논리를 활용하여 행위자a와 그의 논리A1에 대항하는 주장B1을 전개
↔ 비판자b2 & 주장B2: 행위자a의 정치적 목적에 동의하지 않지만 논리A가 나름의 타당성과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 따라서 논리A를 활용하되 행위자a와 그의 주장A1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주장B2를 전개
4.
[도식3]까지만 와도 상당히 복잡한 단계에 온 것 같지요? 하지만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 남아있습니다. 사회1은 정말 논리A만 통용되고 있는, 논리A에 도전하는 비판론이라고는 없는 단순한 곳일까요? 이미 정교하고 설득력 있는 논쟁이 전개되고 있는 곳이라면, 영향력 있는 주장·논리A에 대항하는 반론(A-) 또한 나름의 형태를 갖추어 유통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사회2에서 사회1의 지적 세계 및 논쟁구도를 이해하는 정도가 높아짐에 따라 사회2의 다른 행위자들 또한 반론A-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중에는 반론A-를 어설프게라도 가져와서 사회2에 유통되고 있는 주장A1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하려는 행위자들 역시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다시 도식을 그려봅시다.
[도식4]
사회1 →
논리A가 통용 ↔ 이를 비판하는 반론A-
사회2 →
행위자a & 주장A1 : 사회1로부터 가져온 논리A에 기반, 자신이 활동하는 사회2에서 스스로의 정치적/사회적 목적을 위한 주장A1을 제출
↔ 비판자b1 & 주장B1: 행위자a의 정치적 목적에 동의하지 않음. 따라서 사회2의 구성원들에게 널리 통용되고 있던 논리를 활용하여 행위자a와 그의 논리A1에 대항하는 주장B1을 전개
↔ 비판자b2 & 주장B2: 행위자a의 정치적 목적에 동의하지 않지만 논리A가 나름의 타당성과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 따라서 논리A를 활용하되 행위자a와 그의 주장A1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주장B2를 전개
↔ 비판자b3 & 주장B3: 행위자a의 정치적 목적에 동의하지 않음. 사회1에서 (주장A1이 기대고 있는) 논리A를 공격하는 반론A-가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알게 됨. 따라서 반론A-를 활용하여 행위자a와 그의 논리A1에 대항하는 주장B3를 전개. (*경우에 따라 반론A-를 만들고 유통시키는 사회1의 행위자들과 우호적인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함.)
[도식4] 만큼만 복잡한 모델만 생각해볼 수 있어도 우리는 과거의 (심지어는 현재의) 논쟁 및 그를 구성하는 문헌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뛰어든 치열한 논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도식4]로는 어림도 없을만큼 복잡하고 역동적인 모델을 그릴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특히나 시간이라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논쟁이 치열하게 지속된 시간이 길수록, 참여자 중 전략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처음 단계에서는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던 다양한 논리 내외적 요소들이 작동하는 양상을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는 논쟁이 전개되면서 나타날 수 있는 몇 가지 독특한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나, 모든 사람이 비판의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정치팸플릿 같은 장르를 보면, 반대편을 공격하거나 자신이 지지하는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도식4]의 용어를 빌어오자면) 딱히 서로 논리적으로 합치되지 않는 주장B1, B2, B3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정교한 펀치 테크닉만을 활용하는 우아한 복서와 같은 타입의 논쟁자도 있지만, 대체로는 상대를 때릴 수만 있다면 주먹, 발, 몽둥이를 가릴 필요 없이 있는 무기를 다 쏟아붓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죠. 이는 딱히 고금을 가리지 않는 것 같네요.
둘째, 논쟁의 전개가 언제나 동일한 강도·진지함을 동반하지는 않습니다. 참여자들이 어떻게든 하나라도 새로운 논박 방식을 발명해내고자 치열하게 분투하는 시즌이 있는 반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서로 할 말도 대충 정해져서 각자 자신의 진영에서 굳어진 클리셰를 되풀이하는 때도 나옵니다. 이제 주장도 반론도 하나의 의례처럼 서로 대충 훑어주고 지나가게 되는 것이죠. 이럴 때 연구자 입장에서는 이게 정말로 싸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대충 선배들이 하던 걸 단순히 흉내내고 있을 뿐인지를 판단해야만 합니다(닳고 닳은 전문가들은 가끔 해당 분야를 모르는 사람들이 유명한 저자의 텍스트 하나만 읽고 사실은 상투어에 불과한 내용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사악한 마음으로 그 삽질을 즐기고는 합니다). 이런 '교착상황'이 길어지다보면 논쟁의 언어는 원래의 의미와 힘을 잃고 파편화된 레토릭으로서의 흔적만 남거나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셋째, 그러나 가끔 '교착상황'에서 사태를 전부 뒤흔들어버리는 새로운 논리가 벼락처럼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연구자로서는 이런 장면을 포착하는 게 가장 흥분되는 순간입니다). 특히 다수가 아무런 생각없이 물려받은 대로 말하고 다니는 상황일수록, 기존의 입장이 너무나 지배적인 통념이 되어있을 수록 그 논리적 기둥을 무너트리거나 전제 자체를 뒤흔드는 도전자가 등장했을 때 충격도 큽니다. 도전자가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만(기존의 입장이 지배적인 입장이 된 것은 대체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완에 그치더라도 논쟁의 구도, 심하면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해버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넷째, 도전자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다른 영역·사회에서 유행하는 논리를 새롭게 수입해 가져오는 사람도 있고, (특히 엘리트와 구별되는 대중이 일정 이상 지분을 가진 사회에서는) 꼭 논리적으로 우세하지 않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의 정서적 동의를 받는 주장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는 사람도 있지요(반대로 그런 식으로 논리적으로 날카로운 도전을 대중의 목소리로 뭉개버리는 예도 흔합니다). 그러나 지배적인 언어의 가장 강력한 도전자는 역설적으로 기존의 통념과 그 전통을 골수까지 파헤쳐 본, 따라서 통념의 논리적 주춧돌이 어디에 놓여 있으며 그게 어떤 점에서 취약한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초기 근대 이후 서구 세계의 가장 논쟁적이고 위험한, 또 위대한 사상사적 순간에 종종 인문주의·문헌학의 전통을 마주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불평분자들은 지배적인 사고의 근원적인 약점이 위차한 곳에 도달할 만큼 열심히 공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대부분의 모범적인 학자들은 자기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장소에 건물의 토대를 송두리채 무너트릴 수 있는 부실한 지점이 있는 걸 깨닫지 못합니다(혹은 깨달아도 그냥 조용히 지나갑니다). 지적인 역량과 정치적인 열정, 그리고 적절한 상황이 함께 만나는 순간이 아주 가끔 있고, 그때 많은 것이 바뀝니다.
한국에서 문헌을 다루도록 하는 대부분의 인문학과는 하나의 문헌이 곧 하나의 완결된 사고의 단위인 것처럼 훈련시키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글쓰기가 하나의 닫힌 세계가 아니듯, 과거의 문헌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이 아닌 지속되는, 울퉁불퉁한 대화를 구성하는 일부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읽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글에서 저는 그러한 사고를 촉진하기 위한 한 가지 요령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앞으로 좀 더 복잡한 상황과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려는 시도가 더 일반적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