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그릇이 넘칠 때: 작두에서 AI까지 (<책과참치> 11호 서평)
지난 달 하순에 공개된 서평뉴스레터 <책과참치> 11호에는 두 편의 글이 실려있다. 첫 번째는 제1회 독자 서평 공모 선정작이고, 스크롤을 좀 내려야 볼 수 있는 두 번째 글이 바로 나의 서평이다(<책과참치>에 실은 글로는 두 번째다). 정신없는 일정 사이에 짬을 내어 즐겁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발간 시점에는 최소한의 홍보를 위한 접속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글은 남아 있으니까, 이제라도 간단히 이야기를 풀어본다.
https://booksnchamchi.stibee.com/p/12
전문적인 독서가로 훈련받은 인문학자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나도 몇 가지 서로 다른 독서 스타일을 함께 사용하는 편이다. 때로는 책을 양손으로 한번에 움켜 쥐어짜듯 핵심만 건져내기도 하고, 고유의 논리에 따라 굴러가는 밀도 높은 책을 만나면 종종 멈춰서 저자의 사유 패턴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형상화해보기도 한다(그래야 내 도구상자에 넣을 수 있다). 견고한 논리와 풍부한 정보를 아울러 갖춘 훌륭한 책은 의외로 꽤 있지만, 그 테두리에 고유한 레토릭의 스타일을 새겨넣을 수 있을만큼 집요하고 섬세한 저자는 정말로 드문데, 그런 경우 그 다양한 층위를 하나씩 뜯어보려 한다(그래서 결국 전문가로서의 독자는 어느 정도는 테크니션이 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기술적인 부분까지 뜯어보는 독서를 가르칠 수 있는 교육은 정말로 드물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자신들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삶을 끝낸다).
내가 좀 더 좋아하는 독서는 그런 분해의 과정 자체보다는, 그렇게 추출한 요소 혹은 이를 재조립한 가공물을 다른 책, 다른 앎과 연결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연결이다, 그저 나열이 아니라. 따로 떨어진 앎은 희미하게 사라지거나 화석처럼 굳어지지만, 연결을 거치면서 앎은 좀 더 많은 변화가능성을 잠재한 굵고 탄력적인 밴드처럼 다른 무언가가 되어간다. 충분히 많은 것들과 연결될 때 읽기는 하나의 작은 세계를 빚어내는 행위와 비슷해진다. 서평으로 아주 약간은 그런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까, 라는 도전의 마음이 내가 한 권에 오롯이 집중하는 가장 정통적인 서평 양식과 의식적인 거리를 두는 이유다. 서평은 결국엔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각자의 답변을 담기 마련이니 말이다.
<도서관의 역사>는 앞부분을 읽으면서 이미 서평을 쓸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다(알라딘에는 가격이 비싸다는 불평이 전부인 쓰레기--더 적절한 말이 있는가?--서평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고 전자서점 서평의 90%도 쓰레기다). <인덱스>는 소품이지만, 곳곳에 흥미로운 디테일이 붙어있을 뿐더러 나름의 묵직한 메시지도 지니고 있다. <시간 지도의 탄생>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특히 이 번역본에 들어갔을 공을 생각하면, 너무나 슬픈 일이다. 한편으로 이 책들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다른 한편으로 그 독서로부터 떠올랐던 어떤 연결 지점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서평으로 나를 이끌었다.
앎의 물질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제약적으로 증폭하는 앎과 마주하는 인간의 물질적인 한계에 대한 의식과 다름 아니다. 물론 좀 더 흥미로운 것은 물질성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물질성에 지금까지 인간들이 대처해온 시도들의 역사다. 이런 연결이 가능했던 것은 서평 첫 문단에 언급한 경험 덕분이었다. 수개월 전 (한창 박사논문을 쓰고 있던) 어느 후배가 이사 때문에 그동안 소장하던 책을 디지털화하는, 좀 더 노골적으로는 작두로 잘라내어 스캔한 경험을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한편으로 디지털화된 앎이 "네트는 광대해"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을 상상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광대한 영역 또한 물질성의 근본적인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숙명을 생각했다. 그 물질성을 지워버리지 않은 상태야말로 사실은 우리의 역량이 계속해서 자극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닐까--그러니 종이책에 펜으로 끄적이고 지우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도 조금은 품었다.
이러한 결론이 무엇의 출발점이 될지 나는 아직 모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서평을 다시 읽는 일이 아직 지루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