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을 마주하기" (<책과참치> 4호 서평) 외 근황
1.
지난 3월 출범한 서평 뉴스레터 <책과참치> 4호에 서평을 기고했다(여유없는 일정이지만, 앞으로도 때때로 기고하게 될 것 같다). 제목은 고민 끝에 “내전을 마주하기”로 정했다.
https://booksnchamchi.stibee.com/p/4/
내전이라는 주제를 정하게 된 것은 지인과의 대화에서였다. 탄핵 반대 여론의 상승세가 35%에서 멈추었음에 아주 약간이나마 안도하던 내게, (해외에 있는) 그 친구는 드라이하게 말했다. 정치적 견해가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35% 정도라면 충분히 내전이 일어날 수 있고, 40%를 넘어간다면 국가를 분리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헌법재판소의 숙의가 기약없이 늘어나는 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나는 계엄이, 좀 더 본질적으로는 지난 10년 간의 정치적 분열이 단순히 극우파 집단의 형성을 넘어 한국의 공론장과 사회 자체의 파열을 촉발한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는 탄핵 가결 후인 지금도 사라지지 않은 질문이다. 계엄-탄핵 기간 동안 구축된 극우파의 네트워크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지금도 이를 통해 반중담론과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뒤섞은 과장된 선동, 헌법재판소에 대한 갖가지 음모론, 보수가 더 이상 법에 묶이면 안 된다는 메시지와 같은 것들이 유통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서평 본문에서 썼듯, 내란은 종식되었으되 내전의 위기는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한국어로는 내전에 관해 성찰할 수 있는 문헌이 별로 없다(조르조 아감벤의 <내전>도 읽어보았는데, 그다지 의미있는 저작은 아니다). 그것은 트럼프 정권 출현 이전 미국의 학자들이 그러했듯 아마도 한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영미권의 학자들이 스스로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내전이라는 개념을 돌아보기 시작한 지금이야말로 내전이라는 개념을 숙고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내전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내전이라는 개념 자체를 마주해야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주제에 대한 성찰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홉스와 슈미트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내전의 위기 속에서 (설령 잘못된 해법을 도출했다고 해도) 내전을 사고한 이들, 그래서 결국 국가와 주권의 문제로 나아간 이들이기 때문이다.
초고는 지금보다 원고지 10매 정도 긴 분량이었다. 좀 더 정제된 논지를 펼칠 수 있게 해준 책과참치 편집진 및 기획위원들께 감사드린다. 책과참치에 실릴 다른 글과 비교할 때 내 글은 상대적으로 좀 더 좁은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있다. 뉴스레터라는 포맷에 비추어볼 떄 길고 무겁고 뻑뻑한 이런 글이 여기서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사실 그래서 나는 폰보다는 좀 더 큰 스크린을 가진 매체로 보기를 추천한다)? 나는 단지 한 가지 최소기준만을 지키고자 한다. 몇 해가 지나도 내 이름을 여전히 붙여놓을 수 있는 글, 그런 글을 쓰겠다고 말이다.
2.
<서구지성사입문> 녹화는 마지막 회차를 남기고 있다. 감기가 오래 가면서 녹화 마무리도 당초 계획보다 한 달 늦춰졌다.
다음 학기에 개설될 <인물로 본 근대> 과목 교재는 본문 수합이 끝나고 편집 절차에 들어섰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전자보다 순수하게 교재 자체로는 좀 더 완성도가 높을 거라고 보고 있다.
카트리나 포레스터,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 한국어판 추천사를 써서 넘겼다. 다음 달 중엔 나오지 않을까 싶고, 그때 따로 더 포스팅을 할 생각이다. 아주 강력한 책이 될 거다.
2021년에 썼던 안티페미니즘 관련 시론을 수정보강해서 다른 편집본에 싣게 되었다. 역시 상반기 중에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혼트의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번역원고 검수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고...
90년대 초에 나왔던 어느 노래에서 심심한 하루를 안타까워하는 가사를 문득 들었다. 심심하지는 않은 나날인데, 이제는 반대로 조금은 심심한 나날이 그립기도 하다.
3.
BeGray 블로그 방문자 수가 개장 11년만에 100만명을 막 넘겼다는 사실을 오늘 알게 되었다. 언젠가 이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지난 1년 간은 준 방치한 상태였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블로그를 시작한 건 반쯤은 스스로의 고독을 위해, 나머지 반쯤은 나처럼 외로운 사람들을--주변에 공부 이야기를 나눌 동료들이 별로 없는 사람들을--위해서였다. 한창 가라타니 고진을 읽던 시절, 주변에는 이야기할 사람이 없고 인터넷에는 읽을만한 글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어딘가 또 나 같은 사람이 있겠지, 그러니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쓰자, 그것이 블로그를 시작한 마음이었다. 내 블로그는 오로지 지적인 주제, 혹은 지적인 역량을 가지고 다룰 수 있는 주제만을 딱딱한 문체로 쓴다. 모두가 대중의 흐름을 좇아 쉽고 재밌고 대중과 소통하는 글을 써야하고, 또 그런 흐름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조롱하는 것이 우리의 사회이지만, 어딘가엔 바로 그런 게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내 블로그는 대중적인 것을 다루는 순간에조차도 근본적으로 반대중적이고 반시대적인 장소, 적어도 그런 지향에서 출발한 것을 잊지 않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런 곳에 도달한 발걸음의 수가, 광고든 스팸이든 뭐든 간에, 어느새 백만이 되었다.
100만명 째 방문자는 스크린샷을 보내주시면... 모르겠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