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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박사하기』출간을 앞두고: 20세기 미국 영문학 연구 방법론의 간단한 스케치

BeGray 2022. 12. 1. 11:15

지난 교수신문 좌담회를 책으로 엮은 결과물이 이번 달(12월) 중순 『한국에서 박사하기: 젊은 연구자 8인이 말하는 대학원의 현실』이란 이름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출판사는 북저널리즘). 제가 직접 기획하고 참여한 프로젝트에 관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만, 지금까지 한국 인문사회 학계·대학원에 관해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하지만 꼭 이야기가 필요한 여러 사항을 논의 테이블 위로 꺼내놓는 책이 될 거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어떠한 과장도 덧붙이지 않고요. 조금 더 상세한 내용은 출간과 함께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초고에는 포함되었으나 분량상 빠진 내용으로, 20세기 후반 미국/한국 영문학계의 변화(중 일부)를 거칠게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공개해 둡니다 :)




"방법론의 차원에서 20세기 중반 이래 영문학 연구는 크게 대륙 철학의 영향을 받은 철학적, 이론적인 접근법, 그리고 주로 사회 문화사의 영향을 받은 역사적 접근법 이렇게 두 가지 축 사이의 스펙트럼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먼저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영문학계에도 다른 인문‧사회학처럼 문학 연구를 일종의 과학 또는 고유한 접근법을 가진 엄밀한 학문으로 만들겠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유럽 학문의 여러 성과물을 모방하고 흡수하면서 만들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다양한 학문적 혼합물입니다. 정신분석이나 마르크스주의, 대륙 철학에 기반을 둔 접근법 외에도 1970~80년대 데리다와 해체deconstruction의 유행,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푸코의 영향을 받은 신역사주의의 유행이 대표적이었고, 21세기에 들어서는 정동Affect이나 물질적 전회Material Turn, 포스트 휴머니즘 등의 인간 너머를 바라보는 철학이 유행하고 있어요. 타 학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지적인 유행이 빠르게 교체되고 공존한다고 볼 수 있겠죠.

 

문학 텍스트를 연구하고 비평하는 과정에서 작가론이나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적 비평과 같은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는 접근법은 20세기 초반부터 존재했습니다. 다만 20세기 후반부 영문학계의 역사적 문학 연구는 이전 시대와는 꽤 달라졌어요. 먼저 20세기 서구 인문학계를 바꾸어놓은 두 가지 거시적인 흐름을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20세기 중반,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경제 결정론을 비판하며 문화와 정신, 무의식과 같은 상부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인문학자들의 등장입니다. 이들은 지배 체제와 사회를 비판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영역의 분석이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들,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가들은 인간과 사회의 무의식을 분석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각광 받은 정신분석을 수용했습니다. E. P. 톰슨Edward Palmer Thompson이나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같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이후 사회사와 문화 연구로 이어지는 역사, 사회 연구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조금 더 거시적인 두 번째 경향은 최소한 20세기 초에서부터 사회과학 분야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방법론이 유럽의 인문학, 특히 역사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경향은 앞서 말씀드렸듯 유럽의 성과물을 열정적으로 흡수한 미국의 영문학 연구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는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텍스트를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문제의식과 함께 여러 역사적 문학 연구 모델을 낳았습니다. 당장 떠올려 봐도 문학 텍스트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맥락과 연결하여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신역사주의적 접근법이나, 텍스트를 당대의 여러 문화적 생산물과 함께 이해하려는 문화 연구적 접근, 텍스트의 생산 및 유통, 수용 과정에 주목한 매체적 접근, 문학텍스트에서 특정한 문화적 유행의 코드를 읽어내려는 문화사적 접근, 대규모 데이터를 계량화하여 거시적인 흐름을 읽어내려는 특정한 유형의 디지털 인문학적 접근 등이 있겠네요. 다만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실이 있다면, 이와 같이 인접 분야의 여러 문제의식을 받아들여 역사적 연구를 시도한 문학 연구들이 꼭 전문 역사가들의 그것과 같은 엄밀함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문적인 역사가들과 함께 작업이 가능한 비교적 소수의 연구자들을 제외하면, 다수의 역사적 문학, 문화 연구는 역사적 분석으로서는 엄밀함이든 깊이로든 훨씬 낮은 기준만을 충족하는 게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영문학계의 변화는 단순히 형식과 방법론의 차원에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68운동 이후 1970~80년대 대학에서 미국 인문학계의 급진화, 특히 다양한 유형의 소수자 정치와 결합한 자유주의 및 진보 진영의 담론이 점차 지배적인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상의 규범이라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연구의 방향과 모델을 설정하는 지점에서도 말이죠. 최근 탈식민주의나 인종문제,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사가 급속하게 커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점차 학술장의 중력이 되어 이전까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던 수많은 주제를 열어주는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만, 그와 함께 연구자들의 시선을 특정한 방향으로 고정해버리는 문제도 다소간 있는 듯합니다.

 

한국 영문학 연구에서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미국 유학파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전의 운동권적 학술 기조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다는 것입니다. 보수적인 관점을 가지신 분들께는 다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80년대까지의 민중주의적 정서와 이후의 서구적인 진보 사이에는 미세하지만 지울 수 없는 감각의 차이가 있죠. 특히 1990년대부터 점차 한국 영문학계는 미국 영문학계를 10년에서 20여 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따라가는 공간이 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한국에서 석사 정도까지만 하고 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국내에 돌아와 일자리를 잡는 게 연구자의 일반적인 경로가 되면서, 박사 과정에서 습득한 북미 학계의 유행을 한국 학계에 수입하고 이 지식의 유통기한이 지날 때쯤엔 새로운 박사들이 또 새로운 유행을 계속 수입하는 구조가 정착됩니다. 이런 구조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이 곧 북미 학계의 대세와 최신 유행을 계속 따라가려는 노력과 동일시되는 상황이 그렇게 의아한 일은 아닙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인문·사회 학술장의 가장 중요한 동인은 영어권의 선진 학술장에 최대한 가까워지려는 모방과 일체화의 열망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게 바로 영어 논문 생산, 즉 몇몇 리스트에 등재된 영어권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걸 가장 중요한 학문적 성취로 평가해주는 제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한국 영문학계에 상대적으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듯합니다. 애초에 영어권 연구의 수입이 매우 중요한 분야고, 연구자들도 영어에 익숙한 편이다보니, 한국 내에서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려는 동기가 빠르게 사라지고 몸은 한국에 있지만 지적으로는 영어권 학술장의 일부가 되는 연구자들이 많아졌고, 이 흐름은 더 가속화됐습니다. 더불어 연구자의 업적을 평가하는 체계가 사실상 이공계를 기준으로 정립되면서, 연구자의 역량 평가에서 학술서 출판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영어권 인문 학술장과 달리 한국의 영문학 연구자 다수는 학술서 출판을 고려하는 대신 논문에만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특히 과거 시대를 연구하는 경우, 현실적으로 영어권 연구자들에 비해 같은 시간 대비 적은 양의 문헌을 읽는 처지다보니, 한국어 논문에서 풍부한 자료를 섭렵한 연구를 보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굳이 공을 들일 거면 영어논문으로 쓰자!’가 합리적인 전략이 되었다고 할 수 있죠.

 

이러한 상황의 부작용 중 하나는 영문학자들이 한국 학술장 및 사회와 교류하고 그에 기여하는 정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페미니즘 연구 같은 분야를 포함해 영문학 전공자들이 중요한 학술서를 번역해서 한국의 학술 문화 및 사회의 담론을 이끄는 광경은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그런 종류의 열망이 상당히 줄어든 것 같아요. 최근의 학술 번역을 보면 책 자체는 영문학 관련 비평서인데 번역은 국문학자나 다른 전공자들이 맡은 예도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현재 영문학계는 한국 인문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에 반해 지적으로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한국 영문학계에서 자신들이 학술장 내에서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묻는 객관화의 의지 역시 희박해졌다는 점입니다. 개별적으로 영어권 학술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한국 영문학자는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겠지만,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지도 않습니다. 또 이러한 활동은 그 자체로는 한국 학술장에서 영문학의 의의를 입증하는 방향으로도 흐르지 않습니다. 영어와 미국의 헤게모니 덕분에 제도로서의 영문학이 지닌 지분이 하루아침에 감소하지는 않겠지만, 지식으로서 또 학문으로서 어떻게 단순히 어학 능력의 전달을 넘어 하나의 학문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영어 자료를 읽는 데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면서, 영문학자들 또한 특별히 전문화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과거와 같은 지식의 창구 역할을 하기 어렵게 된 것도 현실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