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정치의 수사 혹은 반정치적 맹목: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조기숙, 『왕따의 정치학』
제목에서 드러나듯 나는 이 글에서 2017년 초반에 출간된 두 권의 저술을, 좀 더 정확하게는 저자들이 공유하는 수사학적 실천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읽었다. 글의 요지는 분명하기 때문에 추가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다만 예상되는 몇 가지 질문에 미리 답을 한다면, 첫째, 나는 적지 않은 인문사회 연구자들이 학술서가 아닌 책은 내 서평에서처럼 진지하게 다뤄질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담론과 사상의 역사를, 아니 하다못해 동시대의 공론장을 조금이라도 살펴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매우 좁은 분야의 책들만이 특정한 관념·가치관·이해체계를 형성하고 유포시킨다고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장르·저자와 무관하게 어떤 텍스트들은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서평을 쓴 책들처럼 말이다. 이런 책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와 별개로, 대중저자·대중서이기 때문에 진지한 검토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는 한국의 독서공중들만 아니라 인문사회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전문성을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발휘할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어리석고 자멸적이다.
둘째, 이 글은 문재인 정권 혹은 지지자들을 비난할 의도로 쓰인 것이 아니다. 201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문재인 정권이 한국에서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임은 좋든싫든 분명한 사실이며, 이번 정권이 그 지지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을 감안할 때 문재인 지지자들은 역시나 호오를 떠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대중집단이다. 나의 관심사는 일부 이데올로그들이 만들고 유포하여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는 수사·논리가 어떤 점에서 문제적인지 드러내는 데 있으며, 이러한 문제의식에 함축된 바람은 가능하다면 보다 타당하고 성찰적이며 포용력 있는 정치적 언어가 도덕정치의 언어를 부분적으로라도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나는 특히 대중정치담론에서 도덕의 언어가 완벽하게 추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규범적 언어는 도덕적 요소를 포함하며, 도덕적·종교적·감성적 요소를 철저하게 배제한 담론이, 그런 담론이 있을 수 있다면, 현실의 세계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일부 순진한 '지식인'들의 망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모든 종류의 도덕주의적 언어 혹은 '수사학적' 요소를 완전히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수사학적 언어의 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좀 더 적절하게, (이 말의 다소 모호한 의미에서) 정치적 선과 보편적인 윤리적 규범에 복무할 수 있도록 활용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인문학 연구자가 시민사회의 운행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 내용은 <학산문학> 97호 학산 북카페(인문학) 란에 게재된 글의 원고를 옮긴 것이며 따라서 실제 지면에 게재된 글과 작게나마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학산문학> 97호(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7142707)에 실린 글 자체는 이 링크에서 읽을 수 있다(https://goo.gl/yeZ3Ze).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우창, 「도덕정치의 수사 혹은 반정치적 맹목: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조기숙, 『왕따의 정치학』」, 『학산문학』 97(2017 가을): 337-54.
언제나처럼 한국의 통상적인 서평에 해당하지 않는 길고 논쟁적인 글에 지면을 제공하고 블로그 게재를 허락해 준 학산문학의 관대함에 감사드린다.
도덕정치의 수사 혹은 반정치적 맹목: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조기숙, 『왕따의 정치학』1)
유시민과 조기숙은 과거 참여정부의 구성원으로서 현재까지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및 문재인 현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 상당한 담론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사다. 국가운영의 경험과 대중저술가로서의 역량을 함께 갖춘 이들이 결코 흔하지 않음을 고려할 때, 두 사람이 2017년 5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각 ‘국가’와 ‘정치’를 주 표제로 내걸고 출간한 저술인 『국가란 무엇인가』(개정신판, 돌베개, 2017)와 『왕따의 정치학: 왜 진보언론조차 노무현·문재인을 공격하는가?』(위즈덤하우스, 2017)는 분명 독자의 눈길을 끈다.2) 앞질러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두 권 모두 국가와 정치라는 주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올바른 길잡이라고 평가하긴 어렵다. 그 이유는 각각의 경우에 조금씩 다른데, 그러한 목표를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추구하는 유시민의 경우 지적 역량이 뚜렷하게 부족하며, 조기숙의 책은 애초에 정치현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노골적으로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겨냥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이들의 책을 전적으로 무의미한 소음으로 치부해야 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특히 지난 대선기간부터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까지 간헐적으로 나타났던 진보진영과 열광적 문재인 지지자들 사이의 충돌을 놀라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던 독자들이라면, 유시민·조기숙처럼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폭넓은 영향을 끼치는 저자들이 정치적 현실을 어떠한 ‘이야기’로 재구성하는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서평의 1절은 우선 두 저작의 문제점을 짚고, 2절은 그들이 제시하는 ‘이야기’를 정리하며, 마지막 3절은 그러한 이야기가 어떠한 대가 또는 위험부담을 요구하는지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일부 열광적 문재인 지지자들이 공유하는 정치적 수사를 이해하는 것이 본 서평의 목적이다.
1.
“객관적인 입장에서 국가와 정치를 분석하는 지식인의 시각”(7)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유시민의 책은 서구정치사상에 토대를 두고 국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기초적인 사실의 차원에서부터 적지 않은 오류가 드러난다. 홉스가 국가, 정부, 군주를 구별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리바이어던』(진석용 역, 전2권, 나남출판, 2008)만 꼼꼼히 읽었어도 나오지 않을 잘못된 진술이며(41), 마키아벨리를 전제군주를 위한 매뉴얼 작가로만 소개할 때 저자가 『로마사 논고』(강정인 역, 한길사, 2003)나 로베르토 리돌피의 고전적인 전기 『마키아벨리 평전』(곽차섭 역, 아카넷, 2000)조차 참고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로크를 자유주의와 법치주의, 미국 연방헌법의 아버지로 이해하는 관점은 약 반 세기 전부터 논파당해 온 시대착오적인 주장의 반복이다(56-58)―로크를 단순한 법치주의자로, 루소를 혁명의 개념을 도입한 저자로 대조하는 대목은 과연 유시민이 매우 급진적인 인민주권론을 제시한 로크의 『통치론』(강정인·문지영 역, 까치, 1996)을 끝까지 읽었는지조차도 의심하게 만든다(64-65). 스미스의 국가론을 단순히 공공재 공급자로 축소해 이야기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특히 스미스에서 민병대와 상비군의 문제를 그냥 지나치듯 언급하고 말 때 그는 자신이 국가의 역할에 대한 18세기 영국의 논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주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60). 한국어로 번역된 칸트의 직접적인 정치저술만 네다섯 권인 상황에서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칸트는 주목할 만한 글을 남기지 않았다”(275)는 진술은 당황스럽다.3)
단지 사상사적인 사실에서만이 아니라 이론적 정리에서도 『국가란 무엇인가』는 그다지 신뢰할만하지 않은데, 애초에 국가주의, 자유주의, 맑스주의라는 다소 자의적인 분류 자체가 그가 1980년대에 공부했을 낡은 프레임을 되풀이한다는 점에서 과연 2010년대 한국의 독자들에게 유의미한 지적 기여를 할지 의심스럽다. 특히 불만스러운 것은 오늘날 가장 강력한 사회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주의 전통을 개인의 자유와 법치, “더 적은 통치”라는 개념으로만 설명하고 넘어간다는 점이다. 2010년대 초에 읽을 만한 한국어 번역이 나온 푸코의 강의록이 잘 보여주듯, 자유주의적 통치, 시민사회, 시장과 같은 개념적 상관물은 단지 개개인의 욕구만을 상정하는 것을 넘어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 및 명령할 수 없으며 오로지 특수한 방식으로만 조정할 수 있는 모종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 기초한다.4) 이러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유시민이 설명하는 자유주의 ‘국가론’은 오로지 개개인의 권리만 남은, 소극적으로만(negative) 존재하는 앙상한 뼈대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유시민은 자유주의자들이 “시장형 보수”라는 피상적인 단정 외에 자유주의 사회이론들이 어떠한 국가모델들과 결합할 수 있는지, 그것이 갖는 개념적 탄력성과 긴장이 무엇인지를 규명할 시도조차도 하지 못한다. 이는 다시 한 번 언급하겠지만 저술 자체를 통틀어 국가와 사회, 정치와 도덕의 구별 자체가 흐릿해지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처럼 유감스러운 결과의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추측컨대 권말의 주석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유시민이 인용하는 문헌 중 카야노 도시히토의 잘 정리된 책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본질에 대한 역사적 고찰』(김은주 역, 산눈, 2010) 정도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국가에 대한 현대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저술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유시민의 국가이론은 그 자신이 학습했던 한국 1980년대의 지적 전통에서 그 자신의 정치적 경험에서 비롯된 깨달음을 제외하면 그다지 나아간 바가 없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상의 차원에서 사고를 전개하고자 한 시도에서 그러한 지적 정체는 치명적으로 작용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전업 대중저술가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지적인 뒤처짐을 전혀 보완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다루고자 했던 대상들에 대해 한국어로 이미 출간된 자료들만이라도 좀 더 성실하게 검토했거나, 하다못해 출간 전 관련 분야 전공자들에게 원고 감수만 받았더라도 『국가란 무엇인가』 개정판이 이처럼 심각한 명백한 오류와 개념적 혼란으로 뒤덮인 채 출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이 책이 학술적으로 부족한 게 아니라 대중교양서로서도 문제가 많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탓인지 출판사의 탓인지, 혹은 둘 다의 선택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누군가의 지적인 게으름이 이런 결과물을 용인했고, 우리는 30년 전의 사고방식을 되풀이하는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국가와 정치의 관념을 안내하는 좋은 안내서인양 널리 읽히고 있는 상황을 바라보게 되었다.
조기숙의 책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역시 정치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지 않는다. 시민들이 자신들이 부도덕하다고 믿는 인사들을 수록한 “시민징계리스트”를 만들고 이것이 “자율적인 정화”이기에 “『친일인명사전』처럼 시민징계리스트를 더 많이 만들어야 사회정의에 기여”한다는 매우 논쟁적인 주장이나(186-87), “신좌파”를 대부분의 학계에서 통용되는 역사적 대상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다소 자의적으로 규정한 뒤 (가령 저자가 157쪽에서 도표로 제시하는 “시민권의 역사”에 역사가들은 상당히 회의적일 것이다) “친노는 신좌파 시민들이고 유럽의 역사를 봐도 민주주의 발전에 꼭 필요한 바람직한 집단”(188)이며 “노사모는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데 꼭 필요한 원동력이고 민주주의 정치체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189)이라고 거의 신앙고백에 가깝게 말하는 대목은 저자가 중립성을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위험에 자주 노출되면 두려움의 뇌가 발달”하고, 이것이 “구좌파의 핵심”인 “육체 노동자들”을 보수적으로 만든다는 진술(267-68), “교육 수준은 뇌의 기능과 관련”있다고 말한 뒤 곧바로 “호남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지역주의 투표를 했다면, 영남 지역에서는 교육 수준이 낮을수록 지역주의 투표”를 했기에 “지역주의 투표라 해도 호남과 영남이 같지는 않다”는 말이 이어지는 것(285),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원래 전두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진보적이 되는 게 자연스럽다”(327-28)는 이야기 등은 특정한 정치적 입장과 두뇌의 발달정도가 연관이 있다는 우생학적 전제를 자명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독자의 경계심마저 불러일으킨다.
보다 근본적인 수준으로 나아간다면, 이 책이 뼈대로 삼는 “왕따의 정치학” 자체가 유의미한 정치적 분석틀로서의 가치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 그 이름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듯 저자는 이 틀을 통해 정치 현상으로서 친노 및 문재인(지지자)에 대한 공격 혹은 “친노 왕따”가 개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벌어지는 “왕따” 현상과 동일한 층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92-95쪽은 저자가 왕따라는 표현을 단순한 비유로 활용하는 걸 넘어 직접적으로 정치현상의 분석에 적용하고자 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친노·문재인 지지자는 왕따 “피해자”이며, 이들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보수진영은 “권력이나 기득권을 가진” 왕따 “가해자”, 새누리당 지지자는 “동조자”, 비판에 합류하는 진보언론은 왕따의 “강화자”라는 설명은 왕따와 정치현상이 일대일로 대응한다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조기숙의 설명은 정치적 여론형성 및 의사결정과정의 복잡함을 우리에게 친숙한 두 가지 틀, 즉 개개인의 도덕과 심리라는 훨씬 단순화된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도덕주의와 심리주의에 기초해서 정치를 바라볼 때의 장점은 세상이 지나칠 정도로 명쾌하게 이해된다는 것이다. 만사는 선과 악, 도덕과 부패라는 두 가지 진영으로 나뉘며, 사람들의 행동은 몇 가지 심리적 유형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학문의 목적 중 하나는 이와 같은 지나친 단순화의 유혹으로부터 현실의 복잡성을 구출해내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조기숙의 책은 학문적으로 참고할만한 분석을 제공하기는커녕 그러한 목적을 노골적으로 위배한다―이 책을 포함해 곳곳에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주장하는데, 어느 정도 지적인 훈련을 받은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라면 그의 진술을 수사적 제스처 이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음 절에서 좀 더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조기숙의 책은 정치에 대한 균형 잡힌 설명을 제시하는 대중학술서나 안내서가 아닌 (강준만으로부터 이어지는) 정치평론, 정치 팸플릿 장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왕따의 정치학』의 조기숙은 객관성을 추구하는 전문가·연구자라기보다는 명확한 정치적 목표를 갖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독자들을 설득 및 동원하려는 이데올로그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책과 저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놓인 합당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2.
조기숙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왕따의 정치학』이 나오기까지의 맥락을 간략히 훑어볼 필요가 있다. 이전부터 진보운동권을 겨냥하는 대표적인 보수논객이자 “선거전문가”, ‘여성계’의 주요인사 등으로 지명도를 확보해온 그는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지지를 공언하고 이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취임사 준비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노무현의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2004년 발행된 정치평론집 『한국은 시민혁명 중』(여성신문사)에서 그가 이미 노무현 지지자의 관점에서 시민운동·보수언론개혁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후에도 참여정부 후반기인 2007년 『마법에 걸린 나라』(지식공작소) 및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에 나온 『문재인이 이긴다: '보수'가 먼저 참고하는 선거전문가의 대선 정밀 예측』(리얼텍스트) 등 꾸준히 정치평론집을 출간해왔으며 『왕따의 정치학』 또한 그 연장선에 놓여 있다. 실제로 『마법에 걸린 나라』는 이어지는 두 책에서도 크게 바뀌지 않는 서사의 골자를 이미 제시하고 있다. (이후 친노·친문으로 이어지는) 참여정부는 뛰어난 도덕성, 역량, 업적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공격받거나 저평가되어 왔는데, 그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도 언론을 통한 “담론경쟁”에서 열세에 놓여있기 때문이다(61). 조선일보·동아일보·문화일보와 같은 보수언론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참여정부를 깎아내리는 “주술”적인 프레임을 유포하고, 다음으로 어용 컴플렉스 및 추상적인 좌파이념에 사로잡힌 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와 같은 진보언론이 그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에워싸는 “왕따” 구도를 완성한다(226). 참여정부·친노는 “우직하고 애교없는 곰 같은 맏며느리”(130)처럼 제대로 된 여론투쟁을 꺼리기 때문에 좌우파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는 참여정부의 업적이 국민들에게 저평가되는 결과를 낳는다. 책 전체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도덕한 보수우파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진보·좌파진영이 친노·참여정부의 중도담론 혹은 “우파진보”(68)·“중도실용”(70)과 전략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이제 좌파운동권·민주화세력이 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고 진보의 새로운 동력은 “성공한 신중산층”이므로 진보언론은 지금까지의 입장을 포기하고 중도파에 협력하여 새로운 진보세력연대를 만들어야 한다(277).
이후 『문재인이 이긴다』를 거쳐 『왕따의 정치학』으로 향하는 조기숙의 여정은 중도·진보연합 대 보수라는 선악적 대결구도 및 여기에서 보수라는 악을 막기 위해 진보언론이 기존의 좌파적 견해를 양보하고 친노에 협력해야 한다는―혹은 친노가 진보의 유일한 대안이라는―기본적인 틀 위에서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특히 2017년 대선을 앞둔 후자의 저술에서 어떤 변화가 두드러지는가? 첫째, 이전의 저술이 참여정부가 중도적·우파진보적 지향으로 말미암아 좌우파 모두에게 공격받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음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면, 『왕따의 정치학』에서 노무현 정부는 도덕적으로든 실제 업적으로든 완벽하게 성공적이었던 정권으로, 친노친문은 억울한 왕따 피해자로 묘사된다. 둘째, 이는 필연적으로 참여정부와 친노에 비판적이었던 진보언론에 대한 폄하와 비난으로 이어진다. 책 2부 “구좌파 진보언론 대 신좌파 노무현”은 이러한 수사적 전략의 정점에 있는 대목으로, 진보언론의 노무현 비판은 “양심 결벽증”, “열악한 업무환경”(으로 인한 무능), “폐쇄적인 엘리티즘”, “스톡홀름 신드롬”, “특권을 이용한 킹메이커 바람”, “언론권력의 사유화” 등에서 초래한 부패와 무능, 비합리성의 소산으로 그려진다(114). 2부 중간에 두 진영 사이의 이념적 갈등이 짧게 언급되지만, 그런 부분조차도 두 진영의 지향점이 어떻게 다른지를 소개한다기보다는 낡은 권위주의적 좌파가 새로운 탈권위주의적 시대정신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돌려 전달할 뿐이다.
셋째, 조기숙은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진보를 단순히 친노친문 정치인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재인 지지자”로 지칭되는 “깨어있는” 참여적 시민집단과 연결시킨다(64-66). 물론 『마법에 걸린 나라』에서 이미 “개혁네티즌”(11)의 존재에 중요한 의미가 부여되었지만, 2007년의 저술에서 시민 지지층을 직접적으로 동원하려는 의도를 찾기는 어렵다. 『문재인이 이긴다』를 참조한다면, 우리는 조기숙이 2012년 “나꼼수” 열풍을 계기로 문재인 지지자들의 역할과 가능성에 본격적으로 주목하게 됐으며, 2017년의 저술에서 이들을 본격적으로 동원하고자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조기숙은 한편으로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도덕적 가치와 정치적 역량, 그리고 “탈물질주의적”·“탈권위주의적”인 “신좌파”로서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거라는 역사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며(157)―대표적으로 “친노 유권자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대목을 보라(101)―다른 한편으로 이들을 정치세력으로서의 친문그룹과 동일시한다.5) 조기숙이 설정한 구도에 따른다면, 이제 친노친문을 비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들은 곧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참여민주적 시민들 자체를 거역하는 셈이 된다. 물론 친노 유권자 혹은 문재인 지지자들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시민인 것도, 친노와 충돌한다고 해서 곧 시민의 뜻을 거스른다고 말하는 것도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조기숙의 수사적 전략은, 얀-베르너 뮐러의 정의를 따르면 “오직 자기 지지자들만 진정한 국민이고 자신만이 유일하게 정당한 대표자라는 포퓰리스트”(『누가 포퓰리스트인가』, 노시내 역, 마티, 2017)의 특성에 매우 잘 들어맞는다.
참여정부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몰락을 초래한 주요 원인으로 (그것이 무엇이었든)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한미FTA 등을 추진하면서 진보진영과 결별했고, 이어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내의 갈등을 겪으며 호남 유권자들의 지지를 상실했다는 사실을 꼽는 게 특별히 논쟁적인 설명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초래된 반(反)보수 진영의 분열은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도 쉽게 아물어지지 않았고, 2016년 2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안철수가 이끄는 국민의당이 호남 지역에서 80% 이상의 의석을 점유하면서 안철수-호남세력이 진보언론과 연합하여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의 집권에 위협이 될 가능성은 현실적인 것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에서 볼 때 조기숙의 수사적 실천이 갖는 의미는 좀 더 분명해진다. 『왕따의 정치학』 1부 및 2부는 진보언론이 더 이상 친노친문을 견제하지 못하도록 공격하고, 이어 3부는 “호남 왕따와 친노 왕따, 그 불가분의 관계”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노무현·문재인이야말로 호남유권자들을 보호하고 대표할 정치인임을 선언한다. 이 과정에서 특히 진보언론을 견제하고 여론을 바로잡을 행위자들로 친노 유권자·문재인 지지자들이라는 “시민”집단이 호출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에서 민중주의적·민주주의적 전통이 공유하는 근본전제로 인해 참여적 시민이라는 주체 자체에 강력한 도덕적 정당성이 부여된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문재인 지지자들은 참여적 시민이기 때문에 도덕적 정당성·우월함을 부여받으며, 이들의 (집단적) 행위는 그것이 참여민주주의적 행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옳고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분명 이는 그 타당성을 합리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신학적 순환논리다. 그러나 한국의 주요 진보언론 및 반(反)보수진영에서 이 명제와 그에 함축된 도덕정치적인 힘을 정면으로 비판할 수 있는 집단은 없다는 점에서 이 순환논리는 무척이나 강력한 수사적 무기이기도 하다. ‘깨어있는 시민의 정치참여’는 곧 그 자체로 모든 정치적 복잡성을 분쇄하는 도덕정치적 수사의 핵심적인 칼날이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또한 마찬가지로 정치가 도덕에 종속되는, 그러나 그 도덕이 무엇에 기초하는지는 불분명해지는 양상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 저자는 국가주의와 맑스주의 국가론을 거부하되, 자유주의 국가론이 시장형 보수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 “진보자유주의”적 요소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나아간다. 당혹스럽게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론하면서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고 국가는 미덕과 선의 목적론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고전적 전통을 소환한다(225).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선·덕이란 무엇인가? 8장에서 우선적으로 제시되는 답변은 “[국가에 있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지만(242) 이는 다시 그 정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유시민은 에드먼드 버크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에 도달한다―“[인류가] 그 모든 희생을 치른 끝에 세운 정의의 원칙들은 민주주의 문명국가의 헌법에 새겨졌으며, 대한민국 헌법도 그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244). 하지만 과연 헌법이 어떠한 원칙이 정의인지를 판별하는데 도대체 그 자체로 유의미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헌법에 수록되지 않은 원칙은 정의가 아닌가? 유시민은 이러한 물음에 답변하는 대신 헌법에 수록된 몇 가지 원칙들, “자유권적 기본권”(246), “사회권적 기본권”(247),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배분하는 원리로서의 경쟁, “경제의 민주화”(254) 등을 다소 편의적으로 나열한다. 8장의 결론은 진보자유주의정치는 (국가주의·맑스주의로 특정되는) “특정한 가치 하나만을 추구하는 ‘절대주의’”와 “광신주의”를 배격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내면”을 존중하는 “관용의 정신”, 즉 “자유주의적 기풍”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262-63). 정치인이 따라야 할 도덕법을 논의하는 9장은 다시금 도덕정치의 수사가 기묘하게 활용되는 광경을 보여준다. 유시민은 칸트적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대립이라는 베버적인 구도를 참고한 뒤 결국 조기숙의 주장과 같은 논지에 도달한다. 보수정당의 지배를 막기 위해 진보진영과 자유주의(민주당계 정당)는 연합해야 하며, 이러한 연합에 응하지 않고 각자의 노선을 고집하는 태도는 정치가로서의 따라야 할 책임윤리가 아닌 무책임한 신념윤리의 추종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진보진영을 겨냥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8장 및 9장에서 전개되는 유시민의 논변은 헌정주의, 자유주의와 도덕정치적 수사가 뒤섞인 기묘한 키메라와 같다. 이중 다른 무엇보다도 문제적인 위치에 놓인 것은 덕치(德治) 혹은 도덕정치의 수사다. 결국 헌법에 수록된 가치들의 실현이 국가의 목적이라고 주장할 거라면(물론 이 자체도 논쟁적이지만), 도대체 덕과 정의에 대한 기나긴 논변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잘못 설계된 미궁을 빠져나가기 위한 실타래를 붙잡기 위해선 이 키메라가 무엇을 겨냥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정답은 간단하다. 결국 유시민이 말하고 싶은 바는 (종종 노무현 지지자들이 그러하듯) 첫째, 보수정당의 지배를 막는 일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선이며, 둘째, 진보진영이 선의 실현을 위해 민주당계 정당·자유주의자들에 협조하지 않고 자신만의 목적을 고집한다면 이는 “절대주의”적이고 “광신주의”적인 태도로서 전략적으로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태도라는 것이다. 텍스트 내내 강조되는 도덕과 윤리는 엄밀히 말해 실체가 있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유시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 즉 보수의 지배를 막기 위해 진보가 중도파에 협력하는 구상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에 가깝다. 정치적 갈등은 도덕적 목표에 흡수되고, 도덕은 다시금 은밀히 저자의 정치적 지향점에 복무하는 순환적 논리가 도덕적 이상이 텅 빈 수사로 전락하는 위험을 모면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유시민의 도덕정치적 수사가 자신의 도덕적 이상의 공허함을 어떻게든 지워버리려는 발악과 같은 것이 아닌지 한번쯤 의문을 품어볼 수 있다.
3.
마지막으로 나는 두 저자가 공유하는,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확산시켜온 도덕정치적 수사가 어떤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지 간략하게 짚고 싶다. 양자는 정치를 보수진영이라는 “악”과의 투쟁이라는 구도로 바라보며(물론 지난 9년간의 한국이 이런 선악구도의 렌즈로 바라볼 유인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에 따라 보수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적 행위 혹은 “책임윤리”에 도덕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여기에, 예컨대 “꽃이 진 뒤에야 봄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란 문구에 담긴 후회와 죄책감의 정서가 보여주듯,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부당하게 핍박받은 순교자로, 그를 외면한 한국의 시민들을 순교자를 부당하게 저버린 죄인들로 간주하는 신학적-역사적 서사가 덧붙여진다. 이전까지 (특히 진보진영에 비교할 때) 도덕적 타협·실용주의로 여겨지던 친노·문재인에 대한 지지는 이제 그 자체로 바람직하고 선한 실천으로서의 (주관적) 의미를 획득한다. 친노 지지자는 자신이 단순히 보수에 대항하는 투쟁에 참전할 뿐만 아니라 낭만적 이상에 붙잡혀 노무현을 음해한 진보와 달리 실질적인 승리에 기여하는 따라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주체이며 자신의 진영이야말로 ‘유일하게’ 정당한 입장이라는 판단에 도달한다. 진보는 원론적 도덕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충분히 도덕적이지 못하며, 자신들은 원론에만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더욱 도덕적이라는 흥미로운 논리적 전도가 작동한다. 문제는 정치적 현실주의가 도덕정치적 수사를 통해 도덕적 우월감·자기확신으로 이어질 때 여기에 단순히 사악한 적을 무찌른다는 것 이외에 어떤 고유의 선 혹은 도덕적 기준이 있는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선에 대한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유시민은 이 기준을 정립하려 시도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고, 조기숙은 아예 이러한 선의 정립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다―도덕적 자기확신만 남을 때, 최악의 경우 이러한 믿음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지지대상과 충돌하는 다른 모든 입장을 맹목적으로 조롱하고 공격하는 행위로 표출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대선후보 토론에서 당시 후보였던 문재인이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답변한 뒤에 벌어진 사태를 이런 가능성이 현실화된 예로 볼 수 있다. 문재인의 해당 발언을 비판하는 성소수자 운동진영에 대해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은 이를 정치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순진하고 이기적인 “떼쓰기”, 혹은 명시적인 호모포비아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에게는 따지지 못하면서 선량하고 만만한 문재인에게만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비열한 태도로 단정짓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조롱과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시 몇몇 문재인 지지자가 정의당과 무지개행동의 의례적 정책협약식이 ‘문재인을 공격하기 위한 진보의 계획된 음모’라는 의혹을 제기했던 사례는 평범한 정치적 일상까지도 도덕적 타락의 산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피해망상적 사고과정의 좋은 본보기다.
더 심각한 문제는, 특히 조기숙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도덕정치의 수사학이 친노·문재인 지지자들의 도덕적 자기확신을 더욱 강화할 뿐더러 “참여”라는 개념을 통해 심지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행위까지도 무제한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수에 맞서 싸우는 정치 지도자를 위한다는 점 이외에는 행위의 타당성을 판별할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참여”가 그 자체로 더 선하고 뛰어나다는 부추김만 남는다면, 이는 난 옳고 넌 틀리므로 나는 그릇된 너를 배제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식의 논리를 용인하게 될 수 있다―“무엇”의 정당성을 판가름할 객관적인 기준 없이 단지 올바른 의도에 입각한 행위는 무엇이든 옳다는 믿음은 분명 위험하다. 특히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태도는 다원적 민주주의 질서에 반드시 요구되는 갈등상태에서의 타협과 공존, 비판적인 대화를 수반한 의사결정과정 등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문재인 대통령과 같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도덕적 탁월함이 공인된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정권·여당 내부의 인사 혹은 입장들 또한 공격대상에서 면제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심지어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구성원들에게도 반드시 유리하게만 작용하지만은 않는다. 특히 노무현의 순교라는 서사적 기억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한 정권 내부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나오는 반대·비판의 목소리는 배신으로 낙인찍힐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누구도 바라지 않겠지만) 노무현·문재인 숭배가 비공식적인 교리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다. 요컨대 조기숙이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준 ‘깨어있는 참여적 시민’은 단 몇 걸음을 내딛는 것으로도 냉전기의 전투적 반공 자유주의자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과 경쟁자·비판자의 배제를 핵으로 삼는 도덕정치의 수사는 이처럼 우리를 정치적 맹목으로 인도한다.
마지막으로 유시민과 조기숙의 저작 모두 참여정부 시기의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앞서 언급했듯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와 한미FTA 추진을 밀어붙였을 때 이 결정이 당시 진보언론이 동의할 수 없었던 것들임은 분명하다. 사태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은 지난 10년 간 참여정부의 선택에 대한 평가가 극적으로 바뀌었다는 데 있다. 이후의 두 정권이 매우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리고 그동안 지구화가 가속화되면서 우리가 세계시장에서의 국제경쟁력과 같은 개념을 과거에 비해 우호적으로, 적어도 불가결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이제 진보적 인사들조차도 두 정책을 포함한 참여정부의 ‘우파적’ 성격을 쉽사리 비난하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선택이 얼마나 옳았느냐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2000년대 초중반의 진보언론이 당시의 결정에 매우 비판적으로 대응한 사실을 도덕적·윤리적 악덕의 소산으로 비난하는 것은 명백히 시대착오적이다.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타당했는가와 별개로 당시의 진보언론은 어느 정도는 자신들이 보유한 가치에 의거하여 사태를 판단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판단을 당시의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오늘날의 기준에 의거하여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태도야말로 역사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윤리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를 이해하는 일은 언제나 높은 수준의 인식능력을 요구하며, 특히 참여정부시기의 여러 선택을 이해하는 과업은 더욱 그 난이도가 높은 현재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그 어려움은 과거를 단순화하려는 도덕정치적 수사를 뿌리치지 못할 때 더욱 커질 것이다. 우리는, 특히 역사적으로 사고하고자 하는 이들은 강력한 정치적 동원력을 가진 도덕정치적 수사의 달콤함에 빠져드는 대신 역사의 복잡함과 솔직히 대면해야만 한다. 내 생각에 이는 역사만이 아니라 국가와 정치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이들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의무다.
1) 이 글의 내용 일부는 2017년 5월 17일부터 8월 초까지 내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해 단편들의 형태로 공개되었다. 여러 차례의 대화를 통해 내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김효민, 서명삼, 최영찬 님, 그리고 특히 초고를 읽고 유용한 지적을 해주신 김헌주, 박종석 님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2) 유시민의 책 초판은 2011년 출간되었으며, 개정신판을 내게 된 경위는 6-9쪽에 서술되어 있다.
3) 가령 칸트의 『속설에 대하여』(오진석 역, 도서출판b, 2011); 『학부들의 논쟁』(오진석 역, 도서출판b, 2012); 『칸트의 역사 철학』(이한구 역, 서광사, 2009); 『영원한 평화』(백종현 역, 아카넷, 2013); 『윤리형이상학』(백종현 역, 아카넷, 2012) 등을 보라.
4) 미셸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1977~78년』(오트르망 역, 난장, 2011) 및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1978~79년』(오트르망 역, 난장, 2012)을 참고.
5) 앞서 말했듯 조기숙이 규정하는 “신좌파”는 학계의 통상적인 규정범위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실제로 『마법에 걸린 나라』의 경우 참여정부의 정치적 입장이 “우파진보”·“중도실용” 등으로 규정되었으며 이후 2012년의 저작부터 친노를 “신좌파”라 부르는 용법이 등장했음을 고려할 때, 조기숙의 개념규정은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된 정치적 선택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