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정치적·비판적 예술문화비평이란 무엇인가?
1. 오늘날 예술/문화/이데올로기 연구 쪽 저술, 특히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는 저술을 읽다가 특정한 문제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화)"를 지목하는 대목을 마주하면 반사적으로 해당 저술의 지적 신뢰도를 절반쯤 낮춰보게 된다. 나를 포함해 이러한 필드에 속한 저자들 중 구체적인 역사적 대상으로서의 신자유주의 혹은 20세기 후반-21세기 초의 한국 혹은 특정한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끼친 영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무엇보다도 길어봐야 수십 년의 기간 동안 단 하나의 정치·경제·이념적 조류가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의 악덕으로 완벽히 물들이는 것이 가능할만큼 현대사회가 단순하지 않다는 데 합의할 수 있다면, 어떤 텍스트 혹은 현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충분한 부가설명 없이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병폐라고 설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상업화라든가 부에 근거한 계층화, 소비주의로 인한 인간관계의 황폐화 같은 것을 비판할 때, 신자유주의란 단어가 등장하기조차 전부터 비판받아 온 그러한 현상들이 갑자기 신자유주의의 산물로서 설명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솔직히 말해, 특히 예술/문화/이데올로기 연구계열의 많은 저술에서 신자유주의를 최종적인 문제로 지목하는 대목들을 보면 "신자유주의"를 "인류의 오래된 적 사탄과 벨제붑"이나 "심해에서 울부짖는 크툴후", "무시무시한 날으는 스파게티 괴물"로 바꿔치워도 논지전개에 별 지장이 없는 경우가 많다(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지금 당장 아무 글이나 찾아서 직접 바꿔 읽어볼 수 있다). 이쯤되면 이러한 비평·연구는 근대적인 학문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매우 조잡한 버전의 성경해석학에서 단어 몇 개만 바꾼 것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이 사실이 가리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많은 필자들은 "신자유주의"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 자신의 글이 정치적·사회적 현실을 비판하는 "현실참여적" 성격을 지닌다고 자찬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단어는 실제로는 우리의 사고를 자극하고 현실을 의미심장하게 통찰하도록 인도하기는커녕 분석과 성찰이 작동중지되는 바로 그 지점을 꽃무늬 레이스로 덮어 가려버린다. 오늘날 한국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 비판"은 실질적으로 사유의 무능을, 그리고 그 무능함에 대한 자기인식조차 불가능한 지적 빈곤함을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드러내는 표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A가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래서 마치 사탄을 저주하듯 신자유주의라는 초월적 대상을 저주하면 된다는 식의 발화에 도대체 무슨 현실적인, 또 정치적인 의미가 있단 말인가?
2. 물론 여기서 예술/문화/이데올로기 연구가 역사적 현실과 스스로를 접합시키고 또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러한 목표를 고민해온 연구자의 한 명으로서 나는 우리가 그러한 과제를 유의미하게 수행하고 싶다면 그만한 지적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하며, 지금처럼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등등의 단어들이 지적인 게으름을 덮어주다 못해 용인하는 상황을 벗어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전체 학술장에서 볼 때 일부 게토에서나 대가로 통용되는 몇몇 신좌파 혹은 포스트 이론가를 몇 번 인용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연구에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함의가 생길 수 있다면, 정치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을 갖는만큼 간편한 일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이는 자칭 "역사화하고자 하는" 연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인용문구를 덧붙인 비평문이나 저명한 포스트이론가의 논리를 되풀이하는 글이 실제로 유용한 현실분석을 제공하거나 현실의 정치적 행위자들에게 참고할만한 지침이 되어주는 경우는 당연하지만 드물다. 현실에 대한 정치적 분석을 시도해보지도 않은 글이 그런 의미를 갖기를 바라는 것은 복권을 사지도 않은 사람이 내일 일어나면 복권에 당첨되어 있기를 눈감고 기도하는 모양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의 연구는 어떻게 정치적 분석·비판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정치적 분석·비판을 자신이 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유사 신학적 진술이 아닌 현실의 정치적 행위자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행위하는지를 설명하거나 그에 대한 규범적인 판단을 제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어떤 예술·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분석이 정치적 분석·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것이 어떠한 맥락 속에서--이때 나는 그 맥락이 반드시 그것이 최초에 생산된 시공간적 배경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정치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맥락에서 무엇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무엇이 정치적이고 또 정치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의 논리가 결여되어 있거나 극도로 제한된 상태에서 현재 분석 중인 텍스트를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몇 이론가·철학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정치적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일부 게으른 동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러한 독해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든 사유를 밋밋하게 만들어버리는 환원론의 대팻날 뿐이다.
이 주장이 역사적·정치적 맥락에 대한 앎을 습득해야 한다는 옳고 상식적인 주장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우리의 과제에 내포된 서사적 측면을 강조하고 싶다. 실제 분석작업을 추체험해보면 알아차릴 수 있듯, 단순히 개별적인 대목에 대한 분석이나 관련 지식을 다양하게 축적하고 쌓아놓는다고 해서 유의미한 설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다양한 자료들의 수용과 축적 못지않게 불가결한 것은 갖가지 인상·자료·단순한 사고라는 구슬들을 고유의 논리라는 실에 꿰맞추어 체계적으로 종합하는 작업이다. 이때 자료를 유의미하고 설득력 있게 연결하기 위해서는 분석자에게 그에 걸맞은 실, 즉 종합의 논리가 존재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종합의 논리를 하나의 이야기, 즉 서사(narrative) 형식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분석대상에서 즉각적으로 설득력 있는 종합의 논리를 도출해내는 극소수의 매우 운좋은 천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분석자들은 자신이 기존에 보유한 서사형식 중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거나 기존에 보유한 서사적 자원에 기초해 새롭게 만든 서사형식을 활용하여 자료들을 종합, 결과적으로 하나의 설명력 있는 해석적 서사를 생성한다. 그런 점에서 분석과정은 서사화과정,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며, 뛰어난 분석자는 좋은 이야기꾼이다. 이때 유의해야 할 점은, 우리의 시각이 가시광선 영역 바깥에 있는 빛을 인지하고 또 그것을 풍경의 일부분으로 통합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대상에 존재하는 특정한 면모를 인식하고 또 그것을 유의미한 체계 내의 일부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서사형식이 없다면 그러한 면모는 분석에 포함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만을 인지하며, 우리의 서사가 허용하는 것만을 선택하여 이야기에 포함시킨다. 보수적인 연구자들이 종종 “실증”을 내세우며 반(反) 이론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물론 이때 그들이 거부하는 “이론적 분석”이 대체로 조악한 환원론의 면모를 보여주곤 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점에서 자신들의 작업이 어떻게 수행되는지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무반성적 맹목에 불과하다.
앞의 문단에서 나는 “서사적 자원”이란 표현을 썼다. 나는 이 말을 사용할 때 우리의 분석과정=서사화과정이 우리 자신이 이미 보유한 서사형식의 창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앞서 말했듯 분석 혹은 서사화는 선택과 배제의 과정이며, 아직 어떠한 배제 없이 대상의 모든 면모를 선택하여 유의미한 해석적 서사로 만드는 형식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그러한 시도는 대체로 서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자료들의 무질서한 나열로 귀결된다―우리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제한된 대상만을 포착하여 그것을 우리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제한된 서사형식에 따라 서사화한다(그런 점에서 서사형식은 발견술적인[heuristic] 성격을 띤다). 이는 단지 분석자료의 선택만이 아니라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서조차도 우리가 주어진 서사적 자원을 초월할 수 없음을 뜻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되풀이하거나,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 기대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로부터 특히나 우리 인문사회분야에서 훈련받은 분석자들을 위한 실용적인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양한 층위의 대상을 다룰 수 있는, 그 대상의 다양한 측면으로부터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개별적인 의미단위들을 종합하여 설명력 있는 서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서사형식을 습득하고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단순화시킨다면 분석자의 역량은 세 가지 척도로 평가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축적하고 있는가, 대상에 따라 적절한 설명을 이끌어낼 서사형식을 얼마나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는가, 주어진 대상을 보유한 서사형식에 따라 분석하고 서사화하는 과정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가. 나는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두 번째 사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의 비평·연구가 언제부터인가 유사한 도식을 반복하고 있으며 다수가 뻔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무의미한 글을 생산할 뿐이라는 많은 연구자들의 불만섞인 인상은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즉 많은 인문사회 연구자, 특히 예술/문화/이데올로기 분야의 필자들이 교육받고 또 습득한 서사형식의 레퍼토리가 매우 한정되어 있으며, 그 제한된 레퍼토리들이 오늘날의 다양한 독자들을 위한 설명력을 갖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대에 뒤떨어진 클리셰로 전락한지 오래라는 것이다. 특히나 정치적·비판적·역사적 분석을 수행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에게 이는 더욱 잘 들어맞는 진술이다.
3. 왜 정치적이고자 하는 예술·문화비평이 (적어도 10여개의 선택지를 제공하는) 음료수 자판기보다도 못한 동어반복으로 전락했는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정치적 비평이라고 불렀는지 과거를 간략하게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80년대의 표준적인 정치적 혹은 “참여적” 비평은 대체로 맑스주의와 민족주의, 근대비판론의 혼합물인 민중주의적 서사형식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때 정치적이고 참여적인 것은 현실의 억압적이고 타락한 면모를 드러내고 민중적 주체의 생명력과 전망을 밝히는 서사를 채택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이러한 구도는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초보적 여성주의 예술비평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수입된 다양한 포스트이론과 신좌파적 서사형식은 한편으로 이전의 민중주의적 서사를 점차 밀어내고 새로운 서사형식 및 언어를 제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특히 진보적 비평가들이 전유한 이론의 경우 그것들이 대체로 국가·제도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반(反) 근대·자본주의적 신좌파 서사를 새로운 거대서사(grand narrative)로 채택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는 이전의 정치적 비평으로부터 이어지는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이론의 수용자들이 관습적으로 읊조리는 ‘거대서사로부터의 탈피’는 오직 절반만 진실이며, 실제로는 근대화론이나 맑스주의와 같은 과거의 명확한 거대서사가 자신이 거대서사임을 숨기는 새로운 서사들에 점차 주도권을 넘겨주었을 뿐이라는 것이 좀 더 사실에 가깝다.
문제는 90년대에, 그리고 좀 더 관대하게는 2000년대 초중반 정도까지 현실을 좀 더 새롭게 조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던 “이론” 혹은 그러한 서사형식들이 점차 기계적인 환원장치에 가깝게 퇴락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진보적 문화연구자들에게 지적인 권위의 원천이었던 서구 “이론” 장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한국의 문화연구자들은 political · progressive · left · radical 과 같은 단어에 매혹되어 서구 학술장 전체에서 볼 때 (푸코를 비롯한 소수의 이론가를 제외하고) 매우 한정적인 지분만을 행사하는 “급진적” 연구자들의 게토만을 계속 들여다보는 지적인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들이 지금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이고, 진보적이고, 급진적인지를 자신의 머리로 질문하지조차 않은 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예술문화비평이 점차 현실의 정치적 행위자들 혹은 주요한 정치적 담론들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에서 실제로 활동하는 사람들 및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 조롱받는 처지로 몰락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현실을 타기하기 위해 “진짜로 정치적”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맑스주의의 고전 혹은 또 다른 급진적 좌파 이론가의 텍스트를 다시금 경전으로 받들어 깊이 탐구하라는 처방전이 주어지는 것을 보면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현실을 더욱 비판적으로 보기 위해서 몇 개의 경전을 탐독하고 급진적인 “정치적 상상력”을 짜내면 된다니, 현실이 그렇게 값싸게 다뤄질 수 있는 것이었던가? 그러한 수련의 결과물이 대체로 몇 개의 예술텍스트를 선정한 뒤 그로부터 자신이 그동안 외워온 “급진적” 논리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서사를 덧씌우는 것뿐이라면, 도대체 어디에 정치가, 현실이, 비판이 있단 말인가? 2000년대 중반에 유행했던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에서 “노무현”을 “신자유주의”, “가부장적 질서”, “식민성”으로 바꾸면 되는 정도의 메시지를 말하기 위해 수십 장의 글을 쓰고 그 배 이상의 책을 읽는다는 건 SNS 이상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짓이다.
4. 나는 오늘날의 예술문화연구자들이 이러한 서사의 빈곤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현실적·정치적·비판적이고자 한다면 지금까지의 지적 경로의존성을 벗어나 다음과 같은 행동양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현실의 다양한 행위자들이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보여주는 정치적 발화·행위를 추적하고 그에 대한 자료를 축적, 그러한 언행 및 그에 수반하는 인격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의 행위자들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지 않은 정치적 비평은 존재할 수 없다. 특히나 초월적인 그리하여 다시금 유사 신학으로 돌아가는 글쓰기가 아닌 현실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정치적인 작업을 목표로 하는 분석자라면, 당장 자신이 속한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떤 발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어떠한 정치적 효과를 가질 수 있는가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초월적인 것을 사고할 때조차도 특정한 시공간 속에 있으며, 따라서 모든 정치적인 것은 고유의 시공간 내에서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역사적 현실은 보다 적합한 서사형식을 새로이 끌어내기 위한 발견의 원천이다. 물론 이것이 단지 자료를 많이 보면 된다는 실증에 대한 물신숭배로 귀결되면 곤란하다. 나는 그런 점에서 우리가 20세기 후반부터 발전해온 지성사·담론의 방법론 및 이와 연관된 사회과학적 논의를 참고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특히나 언어적 대상에 대한 분석에서, 20세기 후반 포스트이론들과 함께 확산된 사회사·문화사·미시사 전통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맥락을 제공하긴 어렵다).
둘째, 주로 몇몇 (신)좌파적·급진적 전통에 국한되었던 이론적 참고문헌목록을 더욱 폭넓게 확장해야한다. 이것들이 제공해오던 서사적 자원의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점에서, 우리는 물기가 남은 진흙을 매만지는 대신 다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때론 독립적으로, 때론 상호 간의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시켜온 여러 경험적·이론적 연구를 참조해야 한다(나는 특히 사상사와 사회이론에 친연성을 느끼지만, 우리의 새로운 참조점이 반드시 여기에 한정될 이유는 없다).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미학술장을 예로 든다면, 급진적 연구자들의 동종교배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조금만 탐색해 봐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영미학술장이 광범위한 지식의 축적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반드시 “이론적” 작업이 아니더라도 뛰어난 경험적 작업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서사형식은 얼마든지 있다. 스스로의 비사회적 성격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몇몇 동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수많은 필드에서 새로운 연구물의 폭발적인 축적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혼자서 고전을 탐독하면 비기를 수련할 수 있으리라는 무협지적 망상은 버리는 게 현명하다. 타 분야의 뛰어난 연구성과에 대한 반복적인 참고 없이 사고가 발전하기란 불가능하다.
셋째, 예술문화텍스트를 분석해온 고유의 방법적 지침들과 그것에 정치적·역사적 맥락을 제공하는 서사들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다른 지적인 산물에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고유의 장르적 관습을 확립한 예술문화텍스트일수록 단지 외적인 맥락을 그대로 반영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단적으로 나는 여러 예술문화연구자들이 역사화를 추구한다는 이름 하에 사실상 문화사와 사회사를 유일한 “역사”로 간주하고 그것이 곧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의미한 맥락을 제공한다고 주장해온 바에 비판적이다. 특히 예술이 점차 하나의 자율적인 영역으로서 간주되기 시작한 시기 이후로 예술작품은 다른 정치적·경제적 맥락만이 아니라 그것이 속한 시기의 담론적 맥락,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당 예술장르가 역사적으로 형성한 고유의 규칙들 위에 존재한다. 정치적·비판적 독해가 예술텍스트를 구속하는 장르적 규칙들을 무시하고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그것이 왜 예술텍스트로 생성되었는지를 망각하는 것일 뿐이다(이는 다른 종류의 지적 생산물도 마찬가지다). 예술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연구는, 그것이 설령 정치적 비평을 지향한다고 할지라도, 장르의 규칙·관습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개별적인 텍스트가 다양한 맥락 속에서 주어진 규칙과 관습을 어떻게 따르고, 활용하고, 변용하고, 파괴하고, 또 새로운 전통을 제시하는지는 그것이 해당 장르의 창작자와 수용자들이 공유하는 문법을 재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나름의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
여기까지 읽은 시점에서 많은 동료들은 이렇게 많은 과업이 필요하다니, 도대체 정치적·현실적 예술문화비평이 가능하기나 한가에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전문화된 연구분야들이 그러하듯 오늘날 유의미하게 존재하고자 하는 지적인 작업은 그 자체로 고도의 정신적 노동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예술문화비평만이 예외일 수 있으며 자신의 직관만으로 뛰어난 작업이 나올 수 있다고 외치고 싶다면 그것은 각자의 자유겠지만, 거기에 대한 뭇 사람들의 무관심과 조롱 또한 피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지성과 존재를 스스로 경멸의 대상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면 현재를 반복할 수도, 과거를 되풀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근대의 지식장은 앞으로 힘껏 질주해야 현재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는 체스판과 같으며, 우리도 그러한 조건에서 예외는 아니다.